경북 예천,
갑오년 동학때
경상도지역에서 가장 맹렬히 싸웠던 곳!
이곳에서 동학서훈 일인시위에 나섰다.
감동이다.
동학을 계승한다는
천도교가 미적거리는새
동학의 후손들이 들고 일어서고 있다!
2차동학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라!
#예천동학, #서훈피켓 참여하다.
8월 10일,
#박용규 님 왈 " #정남기 유족회 고문님에게 보내온 사진인데, 예천 #전장홍 님이 보내주신 사진이라고 합니다."
8/11 전장홍 님이 카톡에 올린 글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장홍 입니다.
우선 예천 1인 시위 참여자명단입니다.
전장홍(회장) 김두년, 류진상(부회장) 문제갑(사무국장) 4명 입니다."
◆■◆
예천 동학하면 생각나는 분, #최맹순 !
먼저 예천동학을 정리한 어느 분의 블로그 글
https://blog.naver.com/theme101/220159311172
[동학농민혁명] 경상북도 예천 -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
아래는 예천동학에 대한 메모(https://blog.naver.com/yamu1023/222237839534)
위 링크에서 #예천 꺼만 가져옴
-1894.3 예천 소야(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 옹기장수 최맹순 집강소. 6,7월에 세력 커지다 . 최맹순은 춘천출생. #옹기장수 라는 직업으로 동학포덕하며 조직 구축. 갑오년11월21일 아들 #최한걸 과 함께, 또 소야리 출신 접사 #장복극 (1840-1894)도 처형됨.
- 7/5밤 수십명의 동학도들이 대지주인 전영장 이유태를 끌어내어 죽이고 재물탈취. 7일에는 향리 황준대의 동생 무덤이 파헤쳐졌다. 9일에는 향리 김병운이 심하게 맞았고 그의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짐. 15일에는 우음동 접주 박래헌이 수십 명과 함께 서울나들이에서 안동부사의 행차를 막고 의관을 뺏고 구타, 안동부사 부인의 금품 탈취.
- 7/27 예천 향리들은 민보군 조직, 이방 정대일 등이 보수집강소 설치. 관아의 무기로 주민들 무장.
- 8/8 동학군 읍내거주 대지주(박기양, 이유태, 이삼문, 윤계선)을 지명하여 보내라 요구. 민보군, 이들 지주 4인의 재산은 예천 일대의 수만 농민이 생명을 유지하는 자원이 되어 왔기 때문에 무력으로써 보호하겠다는 결의.
- 8/9 보수집강소가 동학군 11명 체포하여, 체포된 동학군은 오히려 민보군을 협박, 그러자 한천가로 끌고가서 생매장. .
- 관동포, 13접주 소집하여 화지도회 후 보복경고. 바로 공격하지 않고 매살책임자 인도요구, 서로 싸우지말고 하나로 뭉쳐 일본군을 무찌르자 호소.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해치는 것은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상정이 아닙니다. 500년 동안 왕정(王政)에 왜인(倭人)이 득세하여 억조창생이 덕화(德化) 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리의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중(道中)의 본뜻은 왜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예천의 일은 읍인들이 도인들의 집회를 의심하고 도인들은 읍인들의 군대 편성을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갑오척사록
- 척왜 호소에 답이 없자, 양식 땔감 읍내로 못들어가게 막다. 읍내에 양식이 떨어져서 군수까지 죽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자 읍내의 민보군은 전면 결전을 시도하고 먼저 화지도회로 도발.
- 8/25 동학군 용군현(문경) 침입 / 태봉(상주) 일본병참부 정탐조, 태봉 근처 산양에서 대위 피살(자살했다고도), 예전보수집강소 안동도총소에 원병요청
- 8/26 日부산수비대50명, 용궁-문경 간에서 동학군6백과 전투 2명죽이고 가옥불지름.
- 8/28낮12시. 예천의 수접주 최맹순이 읍내 공격을 결정하고 서쪽의 화지와 북쪽의 금곡(금당실)에서 협동 공격. 한천 제방과 현산에 있는 민보군을 상대로 대치한 동학군은 금곡의 동학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예정된 시각이 지나자 공격,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 이 전투는 완강하게 방어한 민보군의 승리. 늦게 도착한 금곡의 동학군도 패배. 다음날(8/29)일본군 들어와 금곡의 동학지휘소(함양박씨유계소)불태우고 분탕질. 예천전투는 우금티, 청주성, 홍성, 장흥 등을 제외한 최대전투. 민보군은 1천 5백여 명을 비롯하여 읍내의 부녀자 등 2천명 이상, 동학군 4-5천명(관군보고). 동학군 생매장터 추정지에 작은 비가 서있다.
- 8/29 예천읍내로 안동도총소3천여명 도착.일본군53명통역등10명, 오후에 안동500명 또
-8/29 석문에서 동학군600여명 일본군과 전투.
-9/1 석문에서 일본군 동학군과 전투 2명 사살
-9/3 하시다부대 예천에서 동학군4명사살
- 양9/28 충주의 공병소대 왜군, 문경에서 50리 떨어진 석문에서 왜는 동학군과 전투.
- 최맹순, 강원도로 은신, 11월 다시 예천으로 왔다가 체포되어 피살.
***전돼지(刀也只; 전기항 1827~?)
예천 용문 금곡(금당실)접소에는 몰락양반인 함양 박씨들도 동학군에 가담했거니와 만석꾼으로 이름난 전돼지 (본명은 기항)가 모량도감으로 경비를 대다. 사헌부지평을 지냄. 전돼지는 모습이 돼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돈 많고 글 잘하고 풍채 좋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향촌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고손자 전장홍씨의 증언_이이화) 최맹순 체포될 때 전돼지는 살아남았다. 후손들이 전기항의 묘와 추모비를 세움. 추모비(1997.4.5)는 유림들 반대로 금당실 숲에 세우지 못하고 묘소에 세움, 글은 이이화.
***윤치문(1866-1894)
예산 유천면 고산리 출신. 1888 무과 합격, 사헌부감찰. 1894년 동학혁명 가담, 민보군과 싸움에서 8/28전사.
*** 채홍우(1857-1894)
문경 산북면 석달마을(석봉리)에서 동학혁명 가담. 갑오년 8/28 예천 한천전투에서 전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록1호, 증손 채홍빈. 증손자가 2004년 무덤도 발굴, 시신은 없고 나무인형에 옷을 감싸 장사지낸 형상만 남았있었다 함. 주변 흙은 문경 산북의 조모 옆에 안치. "문경 석문전투에서 일본군에 동학군 많이 죽었다. 문경 산양 전투에서 일본군 대위 죽었다. 우리마을에 증조부랑 같이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아직 살아있다. 황의남이라고 산북면 우곡리에" . 채홍빈(71)씨는 1949년 12월24일 양민86명 학살사건 때 총알받이가 되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고아로 살아남았음.
[수운최제우와 동학, 향토와문화44, 대구은행,2007] 가운데서 예천 꺼 파일은 아래 참조. 꼭 보세요~]
https://m.blog.naver.com/yamu1023/222465362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