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 얼굴도 잊어버린 청도가 고향인 경북고 38회 동기인 박종희(전 법무부 연수부장 대한법률구조공단 상임감사 ) 김영창(경북노인회 감사)의 반세기가 넘는 60여 년 만의 만남
최승환 악단장 허 진 시가흐르는 마을 회장
허 진 낭송인 회장
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김면장군 전적비
김면 장군의 본은 고령 자는 지해 호는 송암 1541년 4월 2일 고령 양전동에서 아버지 경원부사 세문과 김해김씨 판관 중손의 딸 슬하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기가 영특하여 경학을 통독하며 퇴계·남명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한강·동강과 벗하고 학덕이 널리 알려져 유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비분강개하여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하리오" 하고 분연히 창의하여 열읍에 기병유사를 두고 의병을 규합하니 수일만에 친족의사8인과 사위 박산립등 이천여명이 모였다 참모장서기 곽준 문위 유중룡 윤경남 박정번과 전향 박성을 본진에 배치하고 장군은 본부병력을 이끌고 고령에 주둔하며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왜적을 쳐부쉈다 개산포에서 백육십여명의 적을 베고 왜선 두 척을 나포해 수많은 궁중 내탕보화를 노획하여 행재소로 보냈으며 정암진에서 대승한후 무계에서 적을 치니 국왕께서 합천군수로 제수할때 교서에 "정진鼎津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무계茂溪에서 칼을 휘두르니 적의 시체가 강물에 가득하더라"했다 이 전투에서 선봉장인 종질 홍한이 전사했다 7월 초순 김천에 주둔한 왜적 천오백여명이 전라도로 진입하려 우척현을 넘을 때 고개좌우에 군사를 매복급습하여 적을 토벌하는 대승을 거둬 왜적이 전라도로 진격할 수 없게 했다 우척현전투는 임란 산악전의 큰 전투로 산중지리에 밝은 산척의 전공은 컸지만 복병장 이형이 전사했다 장군은 지례에 주둔한 천오백여명의 왜적을 화공과 시공으로 박멸하고 8월에 진주목사 김시민군사와 연합해 거창사랑암에서 사천여 왜적과 싸워 대승했다 장군은 9월에 당상관 첨지중추부사에 올라 위세가 우뚝하니 국왕께서 경상우도의병도대장의 교서를 내려 경상도의 모든 의병을 통솔하고 익년 정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되어 관군과 의병을 지휘했다 장군은 1년간 격전기에 10여차례 큰 전투와 30여회 작은 전투를 치르며 갑옷을 벗지 않았다 선산의 왜적토벌 계획 중 김천 진중에서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을 남기시고 1593년 3월 11일에 운명하니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통곡했다 관찰사 김성일은 장계에서 "장성이 무너지다 국사도 흔들리다 그의 충성심은 보석같이 빛나도다 경상도 오른쪽이 보존된 것은 그의 공"이라 했다 국왕이 크게 애도하며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자헌대부병조판서에 추증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하고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했다 만석재산을 군비에 충당하며 나라 위해 바친 장군의 우국충정을 돌에 새겨 청사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