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幻想
安 泳
봄이다. 나른한 사월. 첫 휴일.
날씨는 화창했지만 외출은 싫다.
따순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워, 재치있고 구수한 수필이나 두어 편 읽었으면. 그런데 따르릉, 전화가 왔다. 방정!
“지은이냐? 오늘 별일 없니? 숙부님이 올라오셨대. 서울고등학교에서 정구대회가 있다는구나. 나가보지 않겠니?”
오빠였다. 그런 걸 모르고 방정이라니? 죄송해요, 오빠.
숙부님…….
나는 그분에게서 언제나 따뜻한 부성(父性)을 느끼면서 살아온 셈이다. 생의 황국기라는 내 고등학교 시절 3년을 그분 보살핌 밑에서 생활했으니까.
숙부님은 훌쩍 큰 키에 퍽 깡마른 체구로 그 고장의 대표 정구선수이시다. 소화기관이 좋질 않아 항상 누룽지를 곱게 끓여 잡숫곤 했다. 숙모님은 그러니까 건강이 좋지 않으신 숙부님 뒷바라지에 퍽 신경을 쓰셨다. 게다가 넉넉지 못한 공무원 살림에 조카인 나까지 끌고 살았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시집식구 거느리기 좋아하는 사람 없다는데 숙모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안하셨다. 늘 따뜻한 얼굴, 즐거운 대화로 나를 아껴주셨다. 그랬기에 나는 오 남매나 되는 사촌동생들과 이리 열리고 저리 얼려 전혀 구김살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고말고. 나는 따뜻한 아랫목의 감미로움을 서슴없이 뿌리치고 일어났다. 문득 한 장의 사진이 망막에 떠올랐다. 내 졸업식날, 숙부님 곁에 단정히 서 있는 나의 모습. 흰 칼라위로 나란히 드리워진 두 갈래의 땋은 머리.
그때가 근무시간이셨을 텐데도 그렇게 나와주셨지. 카메라를 메고·…….
외출 준비를 하고 거리로 나갔다.
봄이라지만 아직도 바람이 차가운 4월 초. 군데군데서 휘잉, 흙먼지가 일어 눈을 찔렀다. 정구엔 안 좋은 날씬데!
서울고등학교 앞 버스정류장에 내리자 길 건너편에 〈일본 파견 연식정구 선수권대회〉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천천히 육교를 건넜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답지 않게 조금 감상에 젖어 천천히 뚜걱뚜걱, 계단을 밟았다.
정문에 이르자 휜히 트인 교정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나무와 꽃들이 시새워
나를 반겼다. 노오란 개나리가 재잘재잘 매달려 그 옛날 사촌동생처럼 깔깔대고 있었다. 옛모습 그대로인 숙모님께선 횐 목렇 결에서 다정히 웃으시고.
정구장은 교문에서 조금 들어가다가 왼쪽으로 굽어진 곳에 있었다. 삼면이 바다가 아니라 언덕으로 둘러싸여 그야말로 최적의 위치였다. 오늘 같은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별천지인 양 아늑하기만 했다. 조금 전 거리에서 마신 흙먼지를 모두 씻어내주기라도 할 만큼 공기는 신선했다. 저 나무들 좀 봐. 언덕이 온통 파랗지 않는가.
숙부님은 마침 경기중이셨다. 두 개의 면에서 열심히들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쪽 면에서 전위를 보고 계시는 숙부님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나는 본부석 뒤로돌아 숙부님이 계시는 면 옆으로 갔다. 벤치에서 한 청년이 후딱 일어난다. 누님! 오오, 너 왔구나. 오랜만이다. 잘 있었니?“
회사에 다니는 숙부님의 장남이다. 서울이란 어찌된 게 일가친척도 몇 달씩 못 만나고 살게 만든다. 조부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호통을 치실 것인가.
경기는 팽팽히 계속되고 있었다. 숙부님은 그 큰 키로 높이 떠가는 볼도 찰칵찰칵 내리쳐서 관람객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찰칵! 그렇지. 좋다! 박수 박수·…….
오랜만에 정구경기를 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아버지 방에 대롱대롱 걸려 있던 라켓도 떠오르고, 여학교 때 방과 후 친구랑 남아서 땀흘리며 배우던 생각도 났다. 그뿐인가. 대학교 때 남학생들이랑 즐겁게 경기하던 생각, 더 훗날 직장에서 동료들이랑 점심 후의 몇 십 분을 즐기던 생각도 어지럽게 떠올랐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 다니실 때 정구선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숙부님, 오빠, 언니들까지도 정구에 관심을 가졌었다. 오빠도 참, 선수였었지. 어느날 해묵은 앨범에서 중학생인 오빠가 다른 몇 학생들과 함께 우승기를 가운데 놓고 뺑 둘러서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 그 오빠도 지금은 불혹을 훨씬 넘어섰다. 병원을 차리고 환자와 더불어 진종일 시달리느라고 그 좋아하는 정구나 제대로 치시는지 모르겠다.
숙부님이 이젠 후위를 보신다. 긴 볼이 보기좋게 메네트를 넘어간다. 삼십여 년 정구로 다져진 몸매가 예순올 바라보는 나이에도 오히려 날렵하시기만 하다. 조오타! 누군가의 흔쾌한 고함소리. 그와 동시에 박수, 박수, 박수. 긴 볼이 세차게 날더니 상대편 코트의 구석자리에 찰칵 떨어지고 공중은 잠시 고요하다. 상대가 볼을 놓친 것이다.
정구는 분명 귀족이다. 아무도 밟히지 않고 다치지 않고 흥분하지 않은 가운
데 경기는 끝났다. 숙부님 만세!
본부석을 향해 걸어오시던 숙부님이 나를 보시자 무척 반가와하셨다.
“바쁜데 뭐하러 왔어?”
그러나 저 표정 좀 봐.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무렴, 뜨신 아랫목의 수필 한편에 낼까.
숙부님 다음으로 코트에는 한 노인 선수가 나오셨다. 하도 늙은 분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신기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잇었다. 어깨는 앞으로 굽고, 머리는 거의 은발이었으며, 얼굴은 검고 주글주글했다. 게다가 저승점이 군데군데.
그러나 정구하시는 모습 자체는 결코 늙지 않았다. 공을 들고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서브를 넣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탄력있는 젊음이 씨잉 날아간다. 어머나, 나는 신이 나서 빵긋 웃었다. 상대는 50대. 두 어른이 길게길게 난타를 치셨다. 잠간 연습인 듯.
나는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젊은날의 향수를 달래며 굳은 몸을 힘주어 푸시겠지. 조금 가련하다는 생각과 함께 존경의 박수를 드리고 싶기두 했다. 고희의 나이도 넘었을 할아버지가, 세상에!
그때 문득 음료수를 들고 계시던 숙부님이 나를 쿡 찌르신다.
“아이, 너 참, 인사드릴래? 저분이 바로 일본에서 느이 아버지랑 함께 선수이셨던 김 영감님이시다.”
나는 깝짝 놀라 그 노인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숙부님께 쏟았다.
“그러니까 금년에 일흔여섯 이시다. 형님 동기니까.”
“네?”
나는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빠른 속도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일흔여섯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런 나이는 우리 조부님 가지 왜 아버지 꺼란 말인가. 나는 아직도 한번도 돌아가신 아버님의 나이를 헤아려본 기억이 없다. 도대체가 헤아리고 말고 할 필요를 느끼지 않흗 것이다. 그분은 그저 언제나 마혼여덟. 아직도 패기만만하고, 선이 굵고, 호탕하고, 엄한 눈빛으로 우리를 제압하고, 공무를 위해 밤낮없이 바쁘신 분이거니·…·하는 생각으로 아버님을 기억해왔을 뿐이다.
그러네 저렇게 늙은 노인이 아버님 동기라니? 그럼 아버지가 계신다면 꼭 저만큼 노인이 되셨을 거란 말인가? 아냐, 아냐, 그럴 순 없어. 결코 믿어지지 않아. 저렇게 어깨가 굽고 주글주글한 얼굴! 나는 도저히 그런 아버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 싫어. 상상하기 싫어.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잘레잘레 저었다.
“가자. 경기 시작하기 전에 인사드리게. 아주 반가와하실 거다.”
숙부님이 앞장을 서셨다. 나는 재빨리 숙부님 앞으로 건너가 만류했다.
“싫어요. 가지 말아요, 숙부님!”
내 목소리가 금세 축축이 젖어버렸다. 동공도 물론, 숙부님은 그런 내 눈을
보시며 민망한 듯 되돌아오셨다.
아버지.
나는 그분을 바라보며 오래 잊고 있었던 그 말을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정감어린 마음으로 불러보았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찌잉한 전류가 치솟아 목줄기를 울려왔다. 침을 꼴까 삼키며 두 눈을 깜짝깜짝 대엿 번 움직여서 동공에 어린 물기를 말렸다.
그때 바로 그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요즘 우리 세대가 즐기는 테니스와는 달리, 어딘가 유연한 울림. 텅 덩 텅
텅. 거의 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연식정구의 음량이 질 좋은 악기처럼 감미롭다. 감미로운 게 어찌 소리뿐이랴. 말랑말랑한 그 공. 여학교 때 정구를 치면서 서브를 넣을 때마다 조물락거렸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좋아서. 보들보들, 보들보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공 퉁기는 소리는 때로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숨차게 긴박감을 주기도 하면서 공중을 갈랐다. 나는 갈매기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넘나드는 공을 따라 고개를 좌우로 돌려댔다. 양쪽이 다 팽팽해서 나의 고개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새라도 한 마리 날으게 되면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진다. 공이 새인지, 새가 공인지……포르르 폴 포르르. 그것들은 너무나도 닮아버린 비상을 한다. 아이, 어지러워라.
아버지는 그때 왜 그토록 상황 판단이 늦으셨을까.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J씨 가족이 서울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일부러 우리집에 들러 하룻밤 묵으면서 함께 떠나길 종용했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부리고 전주에 남으셨다. 지금 현재로는 야인(野人)인데 무슨 변을 당하겠느냐고, 허긴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감히 저들의 만행을 짐작할 수 있으랴.
그러나 호남지방까지 붉은물이 점점 번져들기 시작한 어느날, 아버지는 간단한 옷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떠나셨다. 중학교 5 학년이었던 오빠, 당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제일 진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역시 그날 피난길에 오르던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와 우리들 세 딸은 대문 앞까지 전송을 나가 불안하고 암담한 눈길로 한없이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뒤를 돌아다보셨다. 어서들 들어가거라. 오빠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말이 없다. 아버지가 다시 한걸음 걸으셨다. 오빠도 마지못해 따라 걷는다. 잘 가서 몸 조심해라. 어머니의 젖은 음성이 나직이 울린다. 다시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신다. 어서 들어가라니까.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 한마디 하시고 또 걸으시고, 한마디 하시고 또 걸으시고…….
나는 그때 열한 살의 막내로 도무지 무겁디무거운 그 분위기가 으스스하여 엄마의 허리춤을 꽉 붙든 채 말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그게 가여웠던 것일까. 아버지가 문득 우리들에게 걸어오셨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언
제 보다도 다정히 말씀하시는 거였다.
“잘 있거라. 세상이 조용해지면 아버지가 곧 돌아올께. 우리 지은이 선물이랑 사가지고 올께. 자, 들어가, 응?”
곧 돌아올께. 곧. 곧. 도대체 그 곧이란 것은 몇 분, 몇 시간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일까. 한 달을 지나고 일년을 지나고, 세상이 조용해져서 많은 가족들이 상봉하는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막내딸이 그 많은 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해도 선물은커녕 빈몸 한번 나타내지 않으셨다. 카메라를 어깨에 멘 수백의 아버지들 틈에서 나는 끝내 당신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곤 말았다. 무려 30년이 가까운 오늘토록·……˙.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첫번째로 타격을 받은 건 국민학교 졸업 때였다. 담임선생이 학급애들 여남은 명을 불러 은밀히 연필 한 자루씩 주면서 그것으로 중학교 입시를 치르라고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입시경쟁이 치열했던 때라 나의 분노는 대단했다. 세상에 내가 그 열 명 중에 끼지 못하다니, 아버지가 계셨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믿으며 눈물지었다.
나는 그 담임의 뚱뚱한 몸매와 훌렁 벗겨진 대머리를 기억한다. 그뿐인가. 중고등학교 담임도 다 기억을 못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한다. 유 우근. 어린 나의 가슴에 너무나 쓰린 아픔의 자국을 콱 찍어준 그 선생님. 결국 그분은 내게 뜨거운 교훈을 남겨주신 셈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더욱 따뜻이 격려해주어라. 네, 알겠어요. 그래서 지금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어요.
그때 그 열 명 친구들은 대개 그 지방 유지의 딸들이었고 어머니가 신식들이라 노상 교실 복도에 와서 서 있곤 했었다. 그때로선 참으로 보기드문 치맛바람인 셈이다. 그런데 한없이 부럽게만 보이던 그 연필이 예상밖으로 영험은 없었던지 내 성적이 훨씬 앞질러 먹글씨로 쓴 긴 방의 머릿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소했던가.
텅 텅 텅 덩.
연식정구 공소리는 고요히, 그리고 감미롭게 들려왔다. 정한 간격으로 계속 울려오는 깊은 산사의 북소리와도 같이.
어깨가 굽고 주름살 투성이인 김 영감님은 외모를 무색하게 잘도 치신다. 지금은 뭘 하신대요? 변호사지. 이제야 뭐 아들들이 장성해서, 운동이나 하고 여
행이나 하시는 거지. 멋진 분이야.
나는 숙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근히 그분 팀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또다시 일흔여섯의 아버지를 상상해보았으나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문득 국민학교 때 월사금 타러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내라고 내가 앞장서 들어가면 언니 오빠는 조금 겁먹은 얼굴로 따라 들어왔었지. 급한 성미시라 걸핏하면 큰소리를 내셔서 온 식구가 어지간히들 무서워했었어. 그래도 내게만은 다정한 아빠이셨어. 봉부 잘하니까 예쁘다 하시며 깨끗하고 빳빳한 새돈으로 골라 나를 먼저 주시곤 하던 아버지. 미술엔 소질이 없어 학교서는 늘 뒷벽에 그림 한번 걸려보기가 소원이었는데, 어느날 여름방학책 표지에 나온 수박을 보고 그대로 그렸더니 우리 막내 그림도 잘 그리네. 하며 궁둥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시 던 아버 지…….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유언 한마디 남겨두지 못하고 허허벌판 산몬당에서 뜻밖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순간 어떤 기분이셨을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의 총부리를 대하고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체념? 허무? 고독?
그날 조부님이 그곳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묘한 피의 정기(精氣). 신의 계시여.
어느날 조부님께선 곳곳에 폭탄이 떨어지는 생사가판의 위기속에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놀래어 몹시 말리셨지만 굳이 괴나리봇짐 하나를 메고 집을 나서셨다. 꿈자리가 사나워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노라고.
그무렵 우리는 진을 치고 있는 공산군들 틈속에서 주눅이 잔뜩 들린 생활을 견뎌야만 했었다. 두 칸 겹집으로 방이 여덟 갠가 되었던 임봉리 큰 기와집. 아버지가 고향 할아버지를 졸라 그곳 까끔(山)에서 가장 좋은 목재들을 움반해다 온 정성 다해 지은 집. 그러나 마지막 세부적인 손질도 채 끝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그들은 이게 오ᅟᅦᆫ 떡이냐며 우리집 큰 대문에 인민위원회란 간판을 붙였다.
그들에게 본의아닌 공로를 크게 세운 우리는 맨 가운데 방 하나를 보상으로 얻어 말도 크게 못하고 숨 죽여 살았다. 대문에는 핏빛보다 선명한 붉은 깃발이 노상 펄럭이던 기억도 난다. 비행기소리가 나면 잽싸게 뛰어가 그 깃발부터 땅바닥으로 철썩 눕히던 그들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인다. 하루아침에 모든 살림살이는 그들 차지였고 우리는 불쌍한 더부살이였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어느샌지 까맣게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도 모자랐던지 하루는 장롱이며 다락이며 벽장이며 온통 문짝마다 딱지를 붙여 도장을 쾅쾅 찍더니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는 며칠 후 트럭 두 대를 가져와서 살림을 모조리 실어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 끔찍한 만행을 점잖게 서서 구경만 할 뿐 참으로 속수무책 이었다.::
아, 생각난다. 어머니!
시집올 때 갖고 오신 노리개. 오만가지 패물이 조랑조랑 엮인 그 영롱한 보석 꾸러미. 급한 일 있으면 돈을 만들어 쓰라고 외할머니께서 넣어주셨다는 그
노리개꾸러미는 우리도 몇번 만져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워낙 소중하게 다뤄 혼자만 알게 두신 모양인데 그날 실어낸 이불짐 속에서 그것이 나왔었다. 이것만은 주고 가시오. 이것만은. 뭐야? 노리개여요. 우리 어머니가 물려주신 노리개여요. 아무것도 아니여요.
그러나 그들 눈이 보석을 못 알아볼 리 있는가. 얼굴이 밝아지며 아예 돌려줄 생각도 않는다.
“우리 어머니가 주신 거란 말예요. 그것만은 이리 주어요. 어서, 어서.”
그렇게 애원하며 매달리다가 놈들의 발길질에 채이고 나동그라지신 어머니.
철없던 나는 그까짓 노리개가 뭐길래 저토록 창피를 당하는가 싶어 어머니가 미웠다, 나는 추석에 신으려고 아끼고 아껴둔 운동화를 뺏기면서도 그냥 있는데. 까만 운동화. 얼마나 신고 싶어했던기. 아버지가 서울 갔다오시면서 사다주신 고 예쁜 운동화. 그걸 그냥 신어서 흙이라도 묻혔더라면 놈들이 뺏어가진 않았을 텐데. 아깝고 아까워라.
그러나 훨씬 후에 고향에서 조부님 이 올라오셔서 통탄한 것은 두 개의 왕골 고리짝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왕골 고리짝.
아버지는 유별나게 서화를 좋아하셨었다. 멀리 중국의 것에서부터 우리 선인들의 귀하고 값진 글씨며, 그림들.
단원 김 홍도, 사임당 신씨, 이당 김 은호 제씨의 그림들이며 의제 허 백련씨로부터 선사받은 열두 폭 병풍. 그리고 대원군의 글씨, 해공 신 익희씨며 백범 김 구 선생님의 글씨 등등.
아버지는 참으로 거의 광적 일 만큼 서화를 좋아하셨다. 그걸 표구해서 걸어놓으면 남들이 욕심낸다고 모으는 족족 두루말이로 말아 고리짝 속에 넣어두시고는 시간날 때마다 넓은 방에 좍 퍼놓고 무아경에 빠져 감상하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곁엔 듯 느끼며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유산으로는 최고품인 그 고리짝을 뺏기다니 무슨 소리냐고.
조부님은 죄없는 담뱃대만 두드려대셨다. 그것은 물론 어머니나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일과는 달랐다.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고서 어찌 견디시겠는가.
아, 조부님. 아들의 죽음을 예감하고 폭탄 속을 걸어걸어 오십 릿길. 마침내 산야에 팽개쳐진 아들의 시체를 손수 묻어준 당신의 부성애야말로 삼십 년이 가까운 오늘토록 나에겐 영원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조부님 길 떠나신 뒤의 상황을 내게 자세히 일러주신 분은 숙부님이섰다. 언젠가 꼭 소설을 써야지 하며 내 기억의 정수리에 묻어두고 6·25 때마다 살포시 꺼내보며 더운 가슴 달래온 게 어느새 몇 년인가. 이제 그 생생하던 몇 개의 장면은 희미해졌다. 더이상 안개가 끼지 않게 오늘 또한번 꺼내봐야지.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다
시 한발 한발, 구이면을 향해 초조한 걸음을 옳겼다. 초여름의 태양은 뜨거웠다. 인가라도 있으면 찬물 한 사발만 얻어마셔도 한결 수월할 텐데.
부웅, 우잉, 쌔앵.
비행기소리가 진동을 한다. 봇짐을 등에 진 채 노인은 보리밭 속으로 몸을 감춘다. 오늘 한나절, 벌써 이런 고역을 몇 번째 치르는가. 비행기는 어딘가에 폭탄을 던지는지 어두운 귀에도 멀리서 굉열한 폭음이 들려온다. 제발. 제발. 아들을 만날 때까지만 내 앞에 폭탄이 떨어지지 말기를. 늙은 이몸, 지금 죽어도 그만이지만 틀림없이 아들한테 무슨 일이 난 거 같애. 그애를 만날 때까지는 살아야 돼. 가다가 죽어선 안되지 안돼.
노인은 안간힘을 쓰며 비행기를 피해 걷고 걸었다. 아침이라고 꽁보리밥 겨우 한술 뜨고 점심도 굶은 채 언덕을 넘고 산을 넘자니 칠십나이에 도무지 말이 아니다. 배는 등에 달라붙고 다리는 휘청거려 길바닥에 쓰러져 한 소금 자고만 싶다. 해그림자를 봐서 네시는 넘었을 듯. 이제 거지반 다 왔는가. 폭격만 아니면 좋은 길로 갈 수도 있으련만 인적 드문 산길로 더듬더듬 오르자니 하루 해가 다 걸릴 모양이다.
투르르투르 쾅! 귀청이 터질 듯한 폭음소리. 노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엎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아예 모시적삼이 찰싹 붙었다. 몇번이나 안경
을 벗어 닦았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났다. 저쪽에서 장정들 여남은 명이 이리로 걸어
온다. 인민군 같은 사람이 앞장 서서 인도하는 듯. 노인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그들을 피해 걸었다. 쯧쯧. 또 어딜 데리고 가서 부역을 시킬라고. 투루루툴 투르르 쾅! 비행기는 계속 쏘아대고, 배는 고프고. 노인은 마지막 온힘을 다해 바삐바삐 걸었다.
노인은 마침내 아들이 가 있기로 한 구이면 당질네 집에 당도했다. 여름철이라 모두들 마루끝에 나앉아 있었다. 느닷없는 노인의 출현에 모두들 깜짝 놀란다.
“영감님. 아니, 이 난리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응. 우리 아를 좀 보려고.”
노인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단도직입적으르 말했다. 오는 길에 먼발치로 웬 사람들이 여남은 명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조급했다.
“어서 좀 불러오게. 어디 있는가?”
온 식구들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잔뜩 겁먹은 사람처럼 눈치만 보고 있다. 노인은 애가 탄다. 후들후들 다리가 떨린다. 아까 그 속에? 예감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린다.
“어디 있냐니까, 어서 말 좀 하게.”
그때 마침 아범과 같이 떠났던 손자 지훈이 건넌방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다가 조부님이 와 계시는 걸 보고 후닥닥 튀어나왔다.
할아버지!
손자녀석은 땀에 후줄근히 젖은 조부님의 모시적삼 잔등을 부둥켜안으며 말도 않고 끄이끄이 울어댄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 소리만 자꾸 지르며.
“무슨 일이 있었지야? 내 다 알고 왔으니 어여 말을 해봐. 꿈자리가 하도 사나와서 그 폭격 속에 걸어왔다. 어서 말을 해라. 어서 끌러갔지야?”
“할아버지. 어쩌면 좋아요. 바로 조금 전에 유격대들이 와서…….”
“내 그런 줄 알았다. 저 산몬당에서 먼발치로 본 놈들이 그들일 게야.”
“죄송합니다. 놈들이 어찌나 냄새를 잘 맡는지. 이 마을에서 일곱 분이나 끌
려갔욥니다.“
순박한 농부인 당질은 자기 잘못이기라도 한 양 풀이 죽어 말했다:
“좀 올라서시죠. 영감님.”
안사람은 이제서야 부채를 챙겨오고 미싯가루를 타오고 한참 분주하다. 그러나 온 집안에는 이미 숨막힌 긴장이 번질 대로 번졌다.
“아 글쎄, 아무일 없이 잘 계셨는데 그만! 옷까지 일꾼 것으로 다 갈아입으시고 신발도 꺼먼 고무신으로 바꾸고 감쪽같이 농부 차림을 하고 제셨는데 하필 오늘사 말고 못된 놈이 와가지고 그만. 글쎄, 유격대 중 한 놈이 시장님을 알아봤지 뭐인가요. 고개를 갸웃갸웃 하더니 대번 전주시장 아닌가, 하면서 손목을 끄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일꾼이라고 소리쳐도 무슨놈의 일꾼이 얼굴이며 손이 이렇게 희냐고 믿질 않는 거라요. 그래 그만 영락없이 붙들리고 말았다니께요.
전주 재판소로 넘긴답니다.”
온 식구가 노인의 표정만 살핀다. 혼자 남은 손자도 눈물을 거두고 노인의 얼굴만 쳐다본다. 무엇을 말하랴.
“지훈이 너라도 남아 있으니 천행이구나.”
“유격대가 왔다고 마을사람들이 귀뜀 해줘서 후닥닥 피신을 서둘렀는데 시장님은 방으로 숨고, 쟈는 마침 칙간에 갔었대요. 시장님 한 분 찾고 나더니 더 이상 가택수색은 않고 돌아가느먼요. 쟈가 뛰어나올까봐 어찌나 가슴을 졸였던지.”
“할아버지, 용서하세요. 애비가 끌려가는 소리를 듣고도 못 뛰어나왔어요. 어째야 좋을 건지를 몰라 너무 괴로왔어요. 할아버지. 저는 죽일놈이에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다. 형제도 없어. 그점 명심하고 앞으로도 몸조심 각별히 해라.”
노인은 하나뿐인 손자녀석이라 이렇게 남아 있는 게 퍽이나 고마웠다. 까까머리가 자랄 대로 자라 부시시 밤송이 모양을 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웅크리고 섰는 지훈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열아홉 살 한창 나이에 전들 오죽 괴로왔을까. 끌려간 아들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무슨 물이 그렇게도 시꺼멓던가. 강인지 소(沼)인지 하여간 시꺼먼 진구렁 속으로 아들이 빠져들어가는 걸 아무리 건져내려 애를 써도 되지 않던 것이다. 그래서 그만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얼굴 한번 못 보고 이게 무슨 꼴인가.
“좀 올라서 쉬시지요. 몹시 피곤하실 덴데. 참말 면목없읍니다.”
노인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미련한 놈. 어디 숨을 때가 없어서 방으로 숨어?
당질이 초석을 갖다 펴고 목침을 챙겨준다. 시들 대로 시든 몸을 눕혔다. 전주로 간다고? 그럼 내일 또 전주로 가야지. 죽일놈들! 지금은 야인인데. 미련한 놈. 부산으로 가라니까 고집부리더니만. 시장 사표 내고 국회의원 출마하여 온 집안 북새통으로 만들더니 그 상처도 아물기 전에 이게 웬말인가. 차점으로 낙선되는 바람에 지금은 야인이라고 버티더니만.
원수놈들! 아까…고개에서 먼발치로 본 그놈들이 바로 아범을 끌고 간 게야.
노인은 좀더 태연히 그들 가까이로 가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바깥이 소곤소곤, 수상하다. 무슨 일이 또 생겼나?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웬 여인이 노인과 눈을 맞추자 겁에 질린 모습으로 외면한다.
“무슨 일인가?”
“……글쎄요.”
“뭘 또 감추나. 말 좀 하게.”
“할아버지!”
“어여 말해. 무슨 일이 또 났냐?”
“글쎄,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애비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제가 저 고개를 넘어오는디요. 갓 피 홀린 시체가 대여섯 구 있그만요. 혹사나 해서 가보섰으먼 하고요.”
“뭐?”
“너무 놀래진 마세요. 확실친 않으니께요. 노인님.”
“가자, 어서 가보자. 자네도 같이 가주게. 날이 어두운데 이일을 어쩌나.”
노인이 앞장을 서고 당질과 손자가 뒤따랐다. 언제 오십 릿길을 걸어왔느냐는 듯 노인은 허둥지둥 아까 넘은 고개 쪽으로 달렸다. 저녁 어스름이 되어서인지 비행기소리는 조금 뜨음한 것 같았다. 쯧쯧. 불쌍한 것. 제 명에 못 죽고 객사를 하다니.
여인이 말한 고개에 다다랐다. 워메! 이 꼴 좀 보소. 세상에 무지막지한 놈들 같으니라고.
띄엄띄염 쓰러져 있는 여섯 구의 시체들. 주위엔 온통 갓흘린 선혈이 낭자했다. 인적끊인 산비탈에 죄명도 모르고 죽어간 젊은이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노인은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고 달려가 끄이끄이 울면서 땅을 쳤다. 이 날도둑놈들아, 새파란 내 아들을 이꼴로 만들다니 너는 자식도 없느냐.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이놈들아, 천벌을 받을 이 몹쓸 놈들아.
그곁에서 당질도 울고 손자도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나왔어야 하는 건데, 아버지 대신 제가 붙들려갔어야 하는 건데. 아버지, 아버지.
아무도 올 리 없는 산마루에서 쌓인 울분을 터뜨리려는 양 울고 또 울었다. 얼마 후 노인이 먼저 눈물을 거두고 일어났다. 시체를 처리해야지. 남의 집으로 끌고 갈 수도 없고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없었다.
이곳에 그냥 묻어줄 수밖에.
“괭이랑 삽을 얻어와야겠네. 자네가 좀 수고를 해주게.”
당질을 가까운 인가로 내려보내놓고 노인은 허울 좋은 염습의 형식을 치렀다. 가슴에 총알이 지나간 자국이 역력했다. 한 발이 아니었다. 적˙어도 서녀 발은 쏜 모양이다. 쯧쯧. 이 피를 다 어찌할꼬. 풀이 있어야 닦기라도 하지. 전주로 간다더니 해가 저무니까 다급했던 게지. 누가 도주를 시도라도 했나?
당질이 삽과 괭이를 얻어왔다. 구덕을 팠다. 시체 옆 비탈진 언덕에 겨우 한
사람 웅크리고 누울 정도의 구덕을.
어이하랴. 이미 빳빳해진 아들을 피묻은 옷 그대로 묻고 흙을 덮었다. 손자를 시켜 한 삽 흙을 떠얹게 했다. 쯧쯧. 불쌍한 것. 칙간에 앉아 제 애비 붙들려가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 맘인들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게다가 이지경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나저나 저들 남은 시체는 어쩔꼬. 서로 연락해서 가족들이 확인하려면 그냥 두는 게 낫겠지. 노인은 마지막 삽을 거두고 무릎 꿇고 훌쩍거리는 손자를 일으켜 산을 내려왔다.
돌아오는 걸음은 유난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당질과 손자가 눈치채고 양쪽에서 부축을 했다. 아무도 말은 없다. 끊길 듯, 끊길 틋 이어지는 한숨소리만이 엇섞여 흐를 뿐.
“지훈아, 마음을 굳게 먹어라. 너라도 살았으니 천행이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휘청 거리는 손자를 노인이 부축한다. 당질은 죄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숙인다. 고개 들게나. 왜 그것이 자네 탓이란 말인가. 세상을,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이지. 후우!
이튿날 노인은 오십 릿길을 되짚어 전주로 왔다. ˙비행기가 무수히 지나갔지만 왜、 그런지 두렵지 않았다. 아들을 만나러 갈 때는 행여 다칠까 아깝던 목숨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마흔여덟. 사내 나이 마혼여덟이면 한창 때다. 무르익은 인생체험을 바탕 삼아 가장 일하기 좋은 나이다.
아들 다섯 중 큰아들 하나만은 어릴 떼부터 머리 쓰는 게 달라, 혹 저 중국 마량의 백미(白眉)처럼 되러나 싶어 일본까지 보내 대학을 마치게 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서울로 광주로 전주로, 관리생활 한답시고 다만 며칠도 합께 못 있어보고 마침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온 집안식구의 진을 빼고, 그리고는 갔다. 말없이 저만 갔다. 처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저만 혼자 갔다. 불쌍한 것. 당선만 되었으면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텐데 공연히 야인이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저지경을 당해…….
부웅. 위잉. 째앵.
비행기가 요동을 친다. 새파란 아들도 갔는데 이 늙은몸 아둥바둥 살아서 무얼 하랴. 그러나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노인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음이 다시 조급해진다. 어서어서 가보자.
해거름에 전주 집 대문을 들어섰다. 며느리가 보리쌀을 확돌에 갈고 있다가 반색을 한다.
“아이고, 아버님. 비행기 등쌀에 어찌 다녀오셨는가요?”
“별일은 없었냐?”
“네. 거기는 모두 무고하던가요?”
“다 잘 있더라.”
“그래요? 꿈자리가 하도 시끄러서 저도 내일쯤 가볼까 했었읍니다.”
노인은 가슴이 미어진다. 전들 느껴지는 게 없었으랴.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린단 말인가. 한없이 숨길 수도 없는 일. 저 어린 남매를 며느리 혼자서 어떻게 추스리며, 생활은 또 어찌한단 말인가. 쯧쯧, 불쌍한 것들.
그때 열한 살짜리 막내손녀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전쟁이 났건 말건, 폭탄이 멀어지건 말건, 애비가 죽었건 맡건 어린 손녀는 표정이 밝기만 하다.
“비행기 왔다갔다 해쌓는데 나가지 말고 집안에 있거라. 폭격소리 나면 얼른 지하실로 숨고, 응?”
“네. 할아버지.”
쯧쯧. 저 어린것이 애비를 잃다니. 그래도 열댓 살이나 돼야 뭘 좀 알지. 노인은 저게 클 동안 자신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는 안돼. 애비없는 저것들을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고향에 있는 까끔과 전답, 그리고 남들이 생금(金)밭이라고 하는 대밭등을 떠올렸다. 잘만 관리하면 저것들 뒤는 댈 수 있으리라. 죽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것뿐이잖는가.
여학생인 둘째손녀가 들어왔다. 철든 아이니까 아범 이야기를 해줄까? 노인은 몇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못해. 못해. 고개를 절레절
레 흔들었다.
상치쌈에 꽁보리밥 한술을 뜨는둥 마는둥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며느리는 잠이 오.지 않는지 풀잎 긁어모은 것을 마당 가운데 놓고 모깃불을 피우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뜨락에 번지면서 기승을 부리던 모기들이 웡윙 도망을 간다. 파리 한 마리가 노인의 정강이를 간지럽힌다. 빌어먹을. 손에 들어 있던 태극선 부채로 다리를 철썩 쳤다. 그러나 파리는 잽싸게 도망쳐 사살되지 않았다. 며느리를 불러야지 하면서 용기를 못 내고 애꿎은 파리만 줄곧 쫓았다. 쯧쯧. 노인은 문득 생각을 비약시킨다. 자슥!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아들을 향한 놈들의 총구가 눈에 선명히 떠오른다. 눈물이 와락 솟구친다. 안경을 벗어 삼베적삼에 문대며 눈 딱 감고 며느리를 불렀다.
“에미야, 이리 좀 오니라.”
모깃불을 뒤적이던 며느리가 놀란 얼굴로 돌아다본다.
“애들은 다 자냐?”
“네.”
“그 사람들은?”
“모르겠어요. 다들 방에서 무얼 하는지.”
“그리 앉거라.”
“?…….”
“내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는 말을 해얄 것 같으다.”
“무슨 일입니껴?”
“맘 굳게 먹고 들어라. 너무 놀래지 말고. ……아범이 갔다.”
“네? 가다니요, 어디로요?”
“죽었어. 놈들한테 붙들려서 총살을 당했어. 소리치지 마라. 저자들 들을라.”
“아니, 아버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왜 죽어요. 살자고 농사집으로 피난간 사
람이 죽다니요?”
“그러게 말이다. 그 골짝까지 유격대들이 왔더란라. 다 제 운명인가 엊저녁에 내 손으로 묻어주고 왔다. 관도 없이 피묻은 옷 그대로 묻었다. 짐승 묻듯이 묻었어. 전쟁이 끝나면 고향 선산에 이장을 하자꾸나.”
멍청히 노인을 바라보기만 하던 며느리가 조금 실감이 나는지 훌쩍이기 시작한다. 이방저방 놈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크게 울 수나 있는가. 쯧쯧. 죽은 아들보다 더 불쌍한게 너로구나.
“세상을 잘못 만나 그런 걸 어쩔 것이냐. 남은 식구라도 별탈 없이 지내얄 텐데 걱정이구나. 언제까지 이 난리를 겪어야 할지. 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안허드냐. 아범말고도 댓 명이 끌려갔단다. 산몬당에서 죄다 그지경을 당했어 아. 전주로 오다가 그리 된 모양이라.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시체라도 반듯하고, 또 내 손으로 묻어주었으니께 다행 아니냐. 이리 왔더라면 저 과수원집 영감처럼 삽괭이로 찍어 토막내서 죽일 줄 누가 아냐. 너무 상심말고 비행기가 좀 뜨음하면 나랑 한번 산으로 가서 실컷 울자.”
며느리는 입밖으로 터지려는 통곡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엎드려 운다. 저 설움이 오죽하랴. 노인은 안경을 벗어 자꾸 닦으며 며느리를 달랜다. 자, 애들 알라. 어서 일어나거라.
며느리가 머리를 들고 자세를 가눈다. 울어도 울어도 신통치 않은 슬픔이지만 어이하랴, 남은 사람은 이 무서운 전쟁속에서 또다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참, 아버님. 지훈이는 어찌 됐는가요?”
“다행히 그놈은 무사해. 그놈까지 붙들렸더라면 어찌 될 뻔했냐. 조금 더 있
다 세상봐서 나오라고 했다.”
“후우!”
며느리가 긴숨을 몰아쉰다. 눈물도 거둬들였다. 노인은 그렇게 큰 슬픔도 그보다 더한 슬픔에 비기며 체념하고 자위할 줄 아는 며느리가 그저 기특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뒤 할아버지께선 전주에서 할일은 다 하셨다고 느끼셨던지 막내아들이 살고 있는 광주로 가셨다. 그러니까 그분이 바로 여기 정구하러 오신 숙부님이시다.
덩 덩 덩 팅. 칠십 노인의 정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조부님께서는 그곳에서 한 사홀 유하셨는데 무언가 긴한 말을 할듯 할듯 하다가 끝내 못하시고 고향으로 떠나는 길에 오르셨다고 한다.
“예감이라는 건 무시 못해야. 아버님이 그렇게 그늘진 얼굴로 담뱃대만 물고 계시는데 꼭 형님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더라. 그래도 내 쪽에서 먼저 그 얘길 꺼낼 수가 있어야지. 헌데 결국 말씀을 안해주시고 떠나시는 거라. 그 비행기통에 노인양반이 엊그제 전주서 오셔가지고 금세 또 광양(光陽)으로 가신다니 참 애가 탈 일이지. 그러나 아버님 성질이 간다 하면 가는 분이니까 어쩔 것이냐. 배웅을 나갔지. 그런데 거기서 또 그러시는 거야. 아이 아범아, 하고 불러서 걸음을 멈추면, 아니다 어서 들어가봐라. 에미 기다리겠다 하시고, 또 한숨을 푸욱 쉬셨다가 이건 내가 여엉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만 화순고개까지 따라가지 않았겠나? 나는 속으로 더이상 따라가서는 돌아갈 길이 바쁜데 생각하며 아버님을 졸랐지. 제발 들려주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껴 ? 그랬더니 글쌔, 한참이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부시다가 입을 여시는 거야. 늘래지 마라. 네 큰형이 죽었다. 피신해 있던 구이면에 유격대들이 나타나서 그만! 이번에 내가 다 묻어주고 왔다. 여기지기 알릴 건 없고 너만 그냥 알고 있거라, 하시더니 목이 메이시는지 더이상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그냥 줄달음을 치시는 거야. 내가 쫓아갈 엄두도 못 내고 명하니 바라만 보고 섰는데 아버님 옷자락이 빨딱 고개너머로 사라지더구나. 어찌나 슬프고 허무하든지. 그때처럼 아버님 이 가여워 보인 적이 없어. 무엇이건 당신 주장대로 하고, 한다하면 누구 힘을 얻든지 다 해내고 하던 분이 그렇게 무기력해져버리다니, 참 기가 차더라. 다 전쟁 탓이지. 앞으로야 그런 고생을 또 하겠냐.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으니 너희들 외로움이 오죽하겠냐만 조부모님 이 그만큼 건재하셔서 신경들 쓰시니 행여 삐뚜루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고등학교 일학년 여름방학을 지내고 숙부님댁으로 거처를 옮기던 날 저녁 들려주신 말씀이다. 네. 나는 젖은 눈매 채로 대답했었지. 나의 미래를 희의하면서.
그해 봄으로 기역된다.
어머니가 이삼 년 내내 몹시 아프셔서 집안식구들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6·25의 상처가 쌓이고쌓여 심장질환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먹을 것 입을것에 궁핍을 느끼며 남은 자식들을 보살피자니 오죽 고달팠을까.
“사람을 데리고 갈라면 살림이라도 놔투든지. 그렇게 몽땅 뺏어갈라면 사람이라도 좀 살려주든지, 세상에 그런 무ㅈ지막지한 놈들이 또 어디 있어.”
어머니는 가끔 우두커니 앉아 그런 푸념을 하셨다. 사실 아버지만 살아 계신다면 두 트럭 세 트럭 실어간 살림이 아까울 게 무어랴.
하여간 전쟁이 끝나고 이땅엔 그런 대로 평화가 찾아왔건만 어머니는 날로 건강을 잃어갔다. 김 진사댁 맏딸로 부러운 것 없이 자란 어머니로서는 한껍에 몰아친 시련이 너무 무거웠던지!
병세가 날로 악화되자 가까이 계시던 대고모님이 자주 드나드셨다. 그러다가 그 봄에 나를 데리고 그곳엘 가신 것이다. 그곳.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그곳. 중년 여인의 변화스런 얼굴. 흰 눈자위. 쉰 목소리…….
변두리 철로길을 건너서 언덕받이를 지나 좁은 오솔길보 한참 들어가니 잘 가꾼 채소밭이 나왔었다. 그리고 하얀 감꽃이 졸랑졸랑 매달린 감나무 한 그루가
딱 버티고 섰는 곳에 그집 대문이 있었다. 옛날 부자집 같은 인상.
“자식들이 알면 큰일 난단다. 아주 양가집 마나님인데 어쩌다 신이 들려가지고 그리 용한 점쟁이가 되었다는구나. 참, 점쟁이하곧 다르대. 바로 죽은 사람이 그 여자를 통해 나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망인 중에 누군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이 여잘 찾아오는 거지. 전쟁을 치렀으니 집집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오죽 많겠냐. 자식, 남편, 부모형제들을 만나러 곳곳에서 온단다. 나는 느이 엄마가 하도 골골해쌓으니까 느이 아범이나 불러볼라고 그런다.”
할머니는 겁먹은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신들린 여인을 만나러 간다? 나로선 생전 처음인 그일에 공포와 더불어 상당한 호기심을 느꼈고 동시에 과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누군가에게 들킬까 퍽 부끄럽기도 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잘 가꿔준 텃밭에서 싱그러운 초록색이 한꺼번에 웃었다. 그 아름다운 풀잎이 그날의 나에겐 왜 그렇게 으스스했던가. 마치 먼 영의 세계에서 배웅나온 요정들만 같았다.
할머니는 그집 아들없는 틈을 타서 사전계획을 잘 짜뒀기 때문에 순조롭게 그 여인을 만났다. 얼핏 보아 오십대가 될락말락. 옷매무새도 깔끔하고 얼굴 모습도 귀티가 났다. 아무리 보아도 양반집 마나님이었다. 방안 살림도 반지르했다.
“자, 빨리 서두릅시다. 중간에 애들이 들어오면 다 망쳐버링게.”
여인이 맘씨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할머니는 접어가지고 온 쪽지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생년월일, 이름, 죽은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여인은 뮈라곤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중얼중얼. 걸곁엣 사람이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말로 숨도 안 쉬고 계속 중얼댔다.
나는 너무 긴장이 돼서 무서무서하며 그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양반집 마나님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양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견디기 힘든, 어딘가 몹시 아픈 몸짓으로 자신의 얼굴을 깨뜨려갔다.
“물, 물, 물, 좀! 한 모금만, 어서!”
몹시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집 일하는 아줌마가 물 한 사발을 떠다 그 여인 앞에 내밀었다. 얼른 받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정신이 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아가, 지은아. 네가 왔구나. 내 새끼야.”
하고는 한 걸음 가까이 몸을 옮겼다.
으음! 그때의 경악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으랴. 귀신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서 잠을 못 이루던 어린시절 잠자리에서처럼 나는 오들오들 떨며 할머니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고모님도 오셨소. 이것들은 어찌 지내고 있읍니껴. 아가. 지은아, 우리 막둥아.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이리 좀 와봐. 내 새끼야.”
여인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나의 대답을 강요했다. 할머니가 나를 달래며 좀 가까이 가라고 재촉을 한다. 나는 그 여인에게 손을 잡힌 채 도무지 입이 열리질 않아서 발발 떨고만 있었다. 몸은 온통 도망치듯 할머니에게로 젖히면서 .
“지은아. 애비다. 애비야. 왜 애비를 몰라보느냐. 지은아. 대답을 해라, 지은아.”
그 목소리는 푹 쉰 듯한, 갈증에 탄 듯한, 거친 숨소리까지 섞여 무척 다급하게 들리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까 처음 들어섰을 때 듣던 그 여인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차츰 그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로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은아. 이윽고 용기가 났다. 네. 나는 겨우 그 한마디를 끌어냈다.
그제야 기분이 나는 듯 대고모.님을 바라보며 우리집 식구의 안부를 줄줄이 묻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랍게도 그 여인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서 오빠 언들 할 것 없이 우리 가족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는귀 잡수시어 많이 불편하실 텐데 귀찮아 말고 옆에서 잘 보비하여 드리라는 말까지 했다. 그것 땜에 가끔 짜증내기도 했더니.
“지훈이는 잘 있냐. 학교 공부는 어쩌는고. 그애가 나 때문에 많이 놀랐을 거다.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라. 그날 그렇게 뜻밖에 나타나셔서 나를 묻고 가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냐고. 나는 맨날 객지로 돌면서 효도 한번 못했는데…… 그리고 참, 나 묻힌 자리가 평지가 아니더라. 비탈이 돼서 반듯하니 다리를 뻗을 수가 없어 어찌나 불편한지. 언제 여유가 생기면 날 꼭 고향 선산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여쭤라잉.”
여인은 정말 이미 자기가 아니었다. 목소리도 얼굴 모습도 자꾸만자꾸만 아버지의 그것을 닮아갔다.
“쯧쯧. 이것아. 내 귀염 어지간히 받더니. 지금도 공부는 잘허냐? 니가 남자만 되었어도 지훈이가 든든할 텐데. 참, 느이 어머니 좀 어떠냐? 아직도 그렇게 아프시냐?”
“네, 아버지. 그것 땜에 오늘 아버지를 뵈러 왔어요. 아버지, 알려주세요. 어떻게 하면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할 수 있나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머닌 데려가
지 말아주세요. 어머니라도 남아 저희를 돌봐주셔야죠.”
나는 엉겁결에 그 여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흑흑 느껴 울면서 애걸했다. 옆에서 할머니가 다시 이야기했다.
“자네 혼자 갔으면 그만이지. 애들은 어쩌라고 그려? 제발 어멈은 좀 냉겨놓아주어.”
“고모님. 내가 데려가려 하다니요. 그일 때문에 나도 얼마나 걱정하는데요.”
“그럼 어떻게 히여. 저것들 부모없이 크는 걸 어떻게 봐. 딱해 죽겠어.”
“살릴 방법이 있기는 해요. 약을 잘만 찾아쓰면.”
“아니, 어떻게, 무슨 약을?”
“아가. 잘 들어라. 풀이다. 약초여. 다섯 가지 약초. 인동넝쿨, 바디나물, 꾸지나무, 어육 해산초, 이 다섯 가지 풀을 구해다가 끓여드려. 그중 한 가지만 빠져도 안돼. 잊지 말고.”
“뭐, 뭐? 다시한번 말하소. 지은아, 얼른 받아적어라.”
고모할머니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서둘러댔고 나 역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받아썼다.
얼마 후 여인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왔다. 우리가 너무 신기해 하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중 목이 몹시 타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것은 총맞아 죽은 사람들의 경우에 느끼는 공통점이라고도 했다. 아버지. 마지막 눈 감으실 때 꼭 그렇게 숨가빠하고 목말라하셨나요. 무슨 말씀을 하며 가셨나요. 신앙도 없던 아버지. 마지막 누구를 부르며 떠나셨나요.
나는 그일로 해서 누가 뭐라든 영혼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단지 그 영혼에겐 아무런 권리도 능력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존재할 뿐. 동작이나 의지나 그밖의 어떤 것도 따를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나는 허탈했다. 아버지라 부르며 그냥 엎드려 울었던 그 여인. 본연의 자기로 돌아와 방글방글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 여인을 앞에 놓고 나는 심한 회의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비밀의 세계였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영혼의 세계에 다녀온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누가 이것을 믿어줄 것인가.
할머니와 함께 그집 대문을 벗어나와 언덕받이를 오르고 오솔길을 걸으면서 나는 아직도 가슴이 뻐근하여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갑자기 눈을 뜬 느낌이랄까. 금지된 구역에 숨어들어가 남몰래 은밀한 것을 보고 나온 사람처럼 가슴을 조마대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찌나 눈이 부신지 몇번어고 눈을 깜짝거렸다. 내 흰 교복 웃도리에 오월의 햇살이 쏴아 부서져내려 더욱 눈이 시린 오후였다. 게다가 행길 옆 채소밭에는 때마침 무우 장다리꽃이 무리지게 피어 있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찬란했다. 아무래도 딴세상에 온 것만 같은 착각, 나는 자꾸 눈을 깜짝거려보았다. 그러나 다시 언덕에 보이는 아가씨들. 어린이들. 분명 아무일도 없는 일상의 거리였다. 한 어린애가 시든 민들레꽃을 따서 후루룩 불며 내 곁으로 지나갔다. 솜털 같은 꽃씨가 팔레팔레 날아갔다. 틀 없는 이승이었다.
“어떠냐. 참으로 그 할머니 용허지야?”
고모할머님께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거셨다. 나는 비로소 내 위치를 깨달았다.
철길에 다다르자 아까 보던 인가도 보이고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한 아카시아꽃숭어리며 이름 모를 나뭇잎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면서 내가 이승에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러나 그 방의 어둑한 분위기와 그 여인의 일그러진 얼굴, 헐떡이던 목소리는 영 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뒤 우리집 직구들은 예의 다섯 가지 풀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이일을 어쩌나. 그중 해산초라는 풀만은 아무리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또 대체 어떻게 생긴 줄을 알아야 구할 것이 아닌가. 약초에는 상당히 박식하신 조부님 이셨지만 끝내 그 풀만은 못 찾고 말았다.
우리는 그냥 한 가지가 포자란 대로 네 가지 약초만을 달여드리기로 했다. 행여 넘을세라 탈세라, 온갖 정성을 다해 달여드렸다. 아버지가 구해 보내신 약이니 효험이 있을 거라고 모두들 위로했고 어머니 자신도 기꺼이 그 거무튀튀한 풀물을 마셨다.
그러나 몇날이 가고 몇달이 지나도 어머니의 병환은 아무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얼굴이며 손발 할 것 없이 퉁퉁 부어가지고 차마 볼 수 없는 몰골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팅 텅 텅 텅.
지금도 생각난다. 정구가 그렇게도 재미있었을까. 진종일 대문께만 보고 날 기다릴 어머니 생각은 않고 해거름까지 친구들과 정구를 즐겼었다. 한번만! 이
번 한번만 더. 그대신 공 떨여뜨리지 않기, 하며 왼발 앞으로 살짝 내고, 두 손 함께 공중으로 모두어 찰칵 서브를 넣던 소녀. 철없는 단밭머리 여학생.
그때 의과대학쟁이 된 오빠는 이따금 집에 들러 어린 나에게 어머님 간호에 필요한 의학지식을 가르쳐주셨다. 바로 위 언니에겐 혈관주사 놓는 법까지도.
말코피린. 마르코피린? 틀림없이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독일제 주사약으로 기억되는데. 그때로선 상당히 귀한 약이었지. 아뭏든 이틀거리 약국에 들러서 가용을 쪼개 그걸 사왔었어. 기껏 내 무명 지손가락만한 새끼유리병 하나를.
어찌된 약인지 그 주사만 놓아드리면 징그럽도록 부어오른 부기가 다 빠지고 내 선량하고 다정한 어머니, 평상의 모습이 되던 것이었다. 그새 요강이 철철넘치도록 방뇨를 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 무렵엔 언니들도 졸업하여 모두들 조부님 곁으로 내려가고 나 혼자서 어머니를 모셨었지. 손수 밥짓고 빨래하며 하교를 가는데 정말 눈코뜰새 없었다. 그런데도 그놈의 정구를…….
텅 텅 텅 텅. 나는 그때 학창가를 휩쓸던 연식정구에 상당한 흥미를 가졌었다. 오빠가 쓰던 헌 라켓을 얻어들고 시간가는 줄 모르며 즐겼으니까. 터엉. 라켓의 한중간에 공이 와닿으면 울림소리부터가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다. 그 흔쾌한 한순간을 위해서 나는 몇번이고 실수를 하면서 땅거미가 내리노록 정구를 쳤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면, 아이고 나 좀 봐. 미쳤네. 하고는 죄스런 마음으로 줄달음을 치곤 했다.
“어므니이.”
나는 대문을 밀면서 늦은 귀가를 용서해달라는 듯 정답게 불렀다. 어머니는 늘 우두커니 문께를 바라보며 안방 문턱에 기대앉아 나를 반겼다. 나는 울컥 솟으려는 연민과 참회의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가방을 내려놓고 잽싸게 손을 씻은 다음, 퉁퉁 부은 어머니의 팔뚝에 주사를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부억으로 들어가 쌀씻어 밥짓기, 밤이면 또 남에게 뒤질세라 예습 복습하기…….
그런 생활이 몇달 계속되자 조부님께선 오빠를 시켜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갔다. 그때의 허전함이라니. 징그럽도록 부은 얼굴로라도 좋았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묻턱에 팔을 기대고 앉아 나를 반겨주던 어머니. 내겐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뜨겁도록 필요했다. 방방이 세들어 사는 여인들의 동정을 사는 것도 그젠 신물이 났다.
여름향학이 되기가 무섭게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방학 때마다 들뜬 흥분 속에 자랑스런 마음으로 내려가던 고향. 나의 고향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기차를 타고 순천까지 가서 하릇밤 묵고 이튿날 아침 다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달려 진상(津上)이란 곳에 내린 다음 또다시 산길을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을 가야만 하는 산간벽지, 진월(津月). 그런데도 불원천리 방학마다 기꺼이 내려갔던 것은 조부모님의 훗한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또 있지. 그 아름다운 자연. 우리집 뒤란을 삥 둘러싼 대숲의 운치. 철따라 날아드는 갈가마귀떼들의 날갯소리. 퍼써도 퍼써도 다시 솟아넘치는 마당가의 우물물. 감히 어떤 음로수가 그 맛을 당하랴. 한여름에도 이가 시렸지.
나는 버스에서 내려 너른 들판의 한가운데 한참을 서 있었다. 사방의 논에는볏잎들이 산을 에일 듯 시퍼렇게 잘도 자라 있었다. 모퉁이 가게를 돌아 왼쪽으로 구부러져 산길로 접어들었다. 얼마쯤 오르면 처녀무덤이 있고, 목화밭이 있고·…·저쪽 비탈의 인가에선 여학생 교복 입은 도회아가씨를 구경 하러 꼬마들이 줄을 지어 나올 테지.
그것은 여름방학 때마다 겪는 공식이었다. 언덕받이를 오르니 언제나처럼 팔아름 크게 벌리고 섰는 낙락장송이 나를 반겼다. 고향에 갈 때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짐을 내리고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쉬었었다. 그뿐인가. 즐비하게 서 있는 산딸기나무. 걷다가 따먹고 걷다가 따먹고. 고 빨간 열매를 입에 퐁당 넣으면 달콤한 진액과 함께 오돝오돌 씹히던 씨알의 소리…….
그러다보면 상봉이 나왔다. 거기서 나는 잠깐 멈춘다. 바람이 있는 대로 내게 불어와 등허리에 흐르는 땀을 씻어준다. 타월로 닦듯이 말끔하게. 나는 흩어지는 머리카락 소리를 즐기며 저만큼 아랫마을을 내려다본다. 우리집은 금방 눈에 띄었다. 칠십여 호 인가에 딱 두 채의 기와집. 하나는 안채고 하나는 조부님이 계시는 사랑채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거기서부터 내 걸음은 바빠졌다.
비탈을 이용한 논들에서 피를 뽑고 있는 동네아저씨들. 콩밭을 매다가 나무그늘에서 들밥을 먹고 있는 아낙네들. 푸른 잎 싱싱하게 빛내며 얼기설기 어우러진 고구마넝쿨들. 나뭇가지 위에서 제저금 온갖 교태스런 목소리로 지저귀는 산새들. 햇빛에 부서지며 졸졸거리는 산골 물들…….
그러나 그날은 그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낭만에 젖어볼 틈도 없이 십 릿길 좋이 넘는 산고개를 넘어 뙤약볕 아래 초연히 서 있는 우리집 대문을 밀
었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떻게 견뎠어요. 어머니. 말코피린 안 맞고도. 괜찮어요,”
나는 땀닦을 새도 없이 어머님 누워 계시는 곁에서 숨을 몰았다.
“객지에서 혼자 고생했지야? 이 에민 괜찮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만가지 좋다는 약 다 구해다가 달여주섰단다. 봐라, 부기도 없지야? 나 때문에 니가 너무 고생을 했지. 인제 다 낫거든 너 호강시켜주께, 잉? 아무 염려 마.”
어머니는 아닌게아니라 조금 차도가 있으신 것 같았다. 머리를 깨끗이 감아 빗고 단정히 앉으신 품이 전주서 뵙던 그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을 모습이랄 수 있을까. 몰골. 그렇지. 그건 몰골이지. 차마 끔찍하여 아직 한번도 입밖에 낸 일은 없지만 퉁퉁 부은 그 몰골은 꼭 저 소록도의 나환자를 연상케 했었었지. 그런데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러나 누구보다 선량하게만 생긴 내 어머니의 참모습으로 돌아와 있지 않았던가.
조부모님은 참으로 더할 수 없는 정성으로 며느리를 간호했다. 숯불을 피워 약단지를 올려놓고 일하는 애들도 손도 못 대게 하시며 손수 숯넣기야 부채질이야 불조종을 하셨다. 그리고 마루 한쪽에 삼베수건이랑 하얀 사기대접을 챙겨놓고 하루 세 차례씩 한치의 어김도 없이 손수 약을 짜서 먹이는 것이었다.
“약이란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잘못 돼도 효험이 없는 법이다. 짓는 사람의 정성, 댈이는 사람의 정성, 허고 뭐니뭐니해도 먹는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달게 먹어야 하는 법이거든.”
그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에 인박혀 있어 가족 중 한약 먹을 일이 생길 때마다 신경을 배로 쓰게 한다.
어머니가 조금 우선해지시자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그런 중에 음력 유월 초열흘,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왔다. 조부님은 하루속히 아버지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벼르셨지만 어머니 병환이 더 다급하다보니 손도 쓰지 못한 채 또 제사를 맞게 된 것이다.
할머님께선 섬진강 건너 하동(河東) 큰장까지 사람을 보내어 제수거리를 사들이고 대소가 어른들은 우리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닭을 잡는 사람, 생선을 다루는 사람, 남포를 닦고 석유를 붓는 사람, 마당 앞뒤를 청결히 청소하는 사람·…·갑자기 온 집안이 법석대었다. 언니랑 나랑은 할머님이 시키는 대로 그룻닦기를 맡았다. 가마니를 깔고 마당가에 앉아 무슨 기왓장가루라나 하는 잿빛 약료를 물적신 짚쑤세미에 묻혀 힘껏 닦으면 푸르스름 녹이 났던 놋그릇들이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려지곤 했다. 그중에서 좀더 힘이 들었던 건 향료와 촛대였나. 오불탕꼬불탕 굴곡을 따라 민첩하게 손을 움직이며 우리는 시종 재잘거렸다. 이제 어머니의 병환은 낙관적이라고. 마치 지금부터 씻어야 할 제기(祭器)는 힘들이지 않고 물에 헹궈 마른행주질만 하면 되듯이, 앞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실 거라고.
그러기에 종일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시원해지라고, 샘물에 띄어둔 수박이며 참외도 그날따라 방실방실 웃는 듯 희망스럽게 보였다.
집안 어른들도 모두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마당 한쪽에 자리한 전철가에 모여 앉아 재잘재잘, 깔깔깔깔.
“아이코, 좀 고만들 웃어. 젯상에 올릴 생선전에 침 튀것네.”
숙모님 목소리.
“형님.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오빠 그까짓것 맴에 섭섭해 할 분 아니에요.
큰형님 건강이 우선해지는데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 있어요. 모처럼 모였으니
실컨 웃읍시다.”
고모님도 한마디 .
“원, 뭐라고들 해쌓는지. 어서어서 일들은 않고.”
가는귀 잡수신 조부님의 말씀. 온통 집안은 밤늦도록 웅성댔다.
어머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제사에 참석하려면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칭 얼대시어 저물녁에 우리가 머리를 감겨드렸고 의복도 속옷부터 차례로 일습을 갈아 입혀드렸다. 어머님은 기운이 나는지 높은 문턱에 양팔을 짚고 앉으셔서 밤이 이슥토록 바깥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러다가는,
“그양반은 파산적을 좋아하셨어. 육회도 좋아했지. 사시미랑. 빌어먹을, 날씨나 좀 선선헐 때 돌아가셨어야 싱싱한 해물을 상에 놓지. 원, 이 복더위에!”
하고 말참견도 하셨다. 그뿐인가. 한참 후엔 나도 뭐 할일을 좀 달라고 조루기도 했다. 조부님께선 그걸 아시고는 손수 치고 계시던 밥그릇을 건네주었다.
“기운이 괜찮겠느냐? 한번 쳐볼래?”
“네, 아버님.”
어머니는 몹시 좋아하며 고개를 굽신 하고 덜컥 받더니, 비늘째 물에 담가둔 밤톨을 하나씩 건져, 성했을 적 솜씨로 동글납작 잘도 치시는 거였다.
이윽고 자정이 넘어 젯상에 멧진지가 오르고 숙부님의 축문 읽는 소리가 나직이 번져갔다. 숯불 담은 향로에다간 연필밥처럼 깎아놓은 향나무조각을 계속 집어넣어 온 방안이 매캐한 향내음으로 가득한 가운데 의식은 정중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다들 곡해라.”
얼마 후 조부님의 지시가 있자 온 가족들은 제청마루 앞에 엎드려 어이어이 곡을 했다. 우리 딸들은 소리만 내는 게 아니라 진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슬피슬피 울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제저금 쌓였던 설움이 출구를 찾아 분출했다고나 할까.
“고만들 해라. 이제 고만 거두여.”
목메인 할머님의 목소리가 우리를 제지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제 기어나오셨는지 여머니가 제청마루까지 오시어 머리를 풀고 어엉어엉 통곡을 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너무 당황하여 어머니를 부축하고 고정하시라 만류했지만 결국 거기 모인 친척들까지 합세하여 끄이끄이 울었다. 낮은 담을 넘어넘어 고요한 고향산천을 혼들어놓은 그 밤의 곡소리·…….
바로 그제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실감을 느끼게 한 최후의 날이었다. 마치 다 나은 듯이 지껄이고 행동하던 그날의 어머니. 그러나 그날 이후 어머니는 다시 기력을 잃고 몸져 누우시더니 보름 만에 아버지 곁으로 가시고 말았다.
그 무렵은 우기(雨期)를 맞아 며칠을 두고 장마비가 내렸었다. 하루도 빠안할 새가 없이 추적추적 내렸었다. 젖은 빨래들이 이방 저방에 널려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사람의 몸에서도 쉰내가 났다. 부엌에선 땔감이 눅눅히 젖어 매운 연기를 내뽐고.
조부모님은 약단지 앞에 쪼그리고 앉으셔서 습기 때문에 꺼져가는 화로불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 크신 정성도 어머님의 심장에 멍울진 6·25의 상처만은 달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해라도 솟았다면 또 몰라. 그 우중충한 날 아침에…….
간밤 내내 비바람이 부는데 어지간한 집은 날아가려니만 싶었다. 부엌문 옆에 걸린 키가 후루룩 날았다. 처마 밑에 걸어둔 남포등이 토방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비 젖을까봐 장작을 덮어둔 가마니때기가 훌훌 날았다. 샘물 지붕에 씌워놓은 함석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당을 휩쓸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참 우습기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이다. 어머니 시중을 들며 함께 자고 있던 우리 자매는 누가 먼저였는지 치기서린 제의를 했고 모두의 찬성을 얻어 실천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한 〈은행줍기〉의 추억이다.
고향에는 동구밖에, 네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은행은 참 묘한 것이어서 꽃도 없이 멎바라보는 음양만으로 열매가 연다는 식물이다. 아닌게아니라 네 그루 증 한 나무만은 한번도 열매를 열구지 못했다. 수컷이었던가
그 나무는 둘째숙부님댁 것이었는데 꽤 수입원이 되고 있어 동네사람들이 군침을 홀리기도 했다. 나무가 어찌나 우람하던지 도시의 가로수에서 보던 은행나무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비바람 부는 여름날 아침이면 그 열매가 온 바닥에 떨어져 한 가마 정도 긁어모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동네처녀애들은 여름 소나기 때마다 재빨리 삼태기를 들고 나와 은행을 줍곤 했다. 그 풋풋한 은행을 발로 비벼서 까는 재미. 알갱이를 꺼내 살짝 굽거나, 아니면 속껍질까지 벗겨 전철에 볶아먹는 재미. 그런 것들이야말로 시골하이들만 누릴 수 있는 순박한 즐거움이었다. 아, 그것. 전철가에서 앗 뜨거워 소리치며 비늘을 벗겨내면 반지르 윤기 도는 연초록 알갱이가 쏙 나왔었지. 입에 퐁당 넣으면 야들야들 잘도 씹히던 그 맛!
“이런 날이야말로 은행줍기로는 최고다. 잠도 안 오고, 갔다오자 우리.”
아마, 둘째언니의 제안이 아니었나 싶다. 겁많던 나도 좋다구나 따라나섰다.
“어머니, 우리 잠깐 나갔다 올께. 은행 주워다 볶아먹게.”
“아이구, 야아. 비가 저렇고름 오는디 어딜 가?”
“재미로오. 얼마나 재밌다고.”
“알아서 해라. 요즘 맛있을 때다마는.”
새벽 네시. 그야말로 컴컴한 밤이었다. 삼태기, 자루, 양동이 등 그릇 하나씩을 챙겨들고 낡은 지우산에 몸을 의지하여 동구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 당시 참 귀물이던 플래쉬가 있어 비내리는 어둠속을 비추며.
그런데 이것 좀 보게나. 부치런도 하지. 그곳엔 대여섯 명의 처녀들이 벌써 와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와 합주하여 떨어지는 은행을 찾아 아가씨들은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뇌성벽력 요란한 비바람 속에 무슨 음모나 꾸미듯이 집을 빠져나왔던 우리들은 공범자가 의외로 많음에 허탈해져서 마주보고 껄껄 웃었다.
은행은 정말 많이도 떨어졌다. 후둑후둑 후두둑. 그러면 또 체면도 없이 쪼르르 몰려가는 처녀애들. 여기는 내꺼! 팔을 벌려 원을 그리는 첨령파도 있었다· 그러면 애쓰고 쫓아갔다 헛탕친 아가씨는 뛰뛰발레 주둥이 내밀며 토라지기도 하고. 이따금 온 마을이 쪼개질 듯한 뇌성벽력. 번갯불이 번쩍번쩍 은행나무 주변을 비추면 모두 다 옴싹 젖은 몸매. 얇은 여름옷이 찰싹 달라붙어 가관이었다. 부끄러워라.
은행은 계속 떨어졌다. 우리는 주웠다기보다 긁어담았다. 숙모님 댁에 죄스런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 많이 떨어졌다. 조금 후 버언히 동이 트면서는 더 많은 동네처녀들이 나타나고, 은행나무 주인집 딸인 내 사촌들도 나와서 껄껄대며 함께 주웠다. 그동안 우리들의 그릇은 넘칠 정도로 그득 찼으므로 늦게 온 사촌과 나누어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날 마주보는 우리들의 생쥐 같은 모습이 너무 우스워 키들키들 웃으며. 이건 뭐 알몸 그대로였으니까.
집에 이르자 할머니께서 호통을 치셨다. 에미는 아파 누웠는데 그까짓 은행은 주워다 뭘 할라나, 원. 그래도 한 년이나 남아 있어야하제. 이 속 없는 것들아.
그때 어머니가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씀하셨다.
“제가 은행이 먹고 싶어서 보냈그만요. 아이고, 으흥 으흥, 아가, 어서 좀 들어오너라.”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급히 들리던지 우리는 젖은 몸을 닦는둥 마는둥 달려들어갔다.
“내가 죽는가부다. 조부님 모시고 오니라. 숨이 차서 숨이 차서·…… 누웠을 수두 없고 앉았을 수도 없어.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우리는 허둥지둥 어머니를 안아 요에 눕혀드리고 조부님을 모셔왔다. 지난밤
비˙바람에 훌훌 간 물건 챙져 제리에 갖다 두시느라 마당을 도시던 조부님이 깜짝 놀라 들어오셨다.
“아니 왜 그러냐. 밤에 몹시 앓더냐?”
누가 그 대답을 할 수 있으랴. 우리가 은행나무 밑에서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닐 때 어미님은 혼자 고통을 당하셨구나 싶으니 너무나 죄송했다. 하나만이라도 하나만이라도 남아 있을걸. 잔병에 효자 없다고 시름시름 몇 년을 앓아오다보니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동네가 쪼개질 듯한 뇌성벽력은 바로 어머니의 고통 소리였던가.
“으흐옹 으흐응. 아버님, 죽는가봐요, 저것들을 어쩔까요. 이 몹쓸 며느리 용
서하세요, 아버님. 하나도 아니고 둘다 부모님 먼저 가다니. 아이고, 아이고, 후우, 후우, 숨이 차서. 나 좀 일으켜줘. 못 살겠네. 못 살어. 어머니이……“
조부님이 어머니를 안아 일으켰다.
“괜찮으냐? 눕지 말고 그럼 앉아 었어볼래?”
“아니, 아니, 그래도 숨이 차요. 가슴이 답답해 죽겠네요. 어머니. 어머니, 나 좀 데리고 가. 제발 나 좀 데리고 가. 으흐응 으흐응.”
어머니가 어머니를 찾는 걸 보니 털컥 겁이 났다. 정말 못 견디겠다는 모양
이다.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가 저 목소릴 듣는다면 얼른 뛰어나와 몸소 저승으로 안내해주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혼! 아무런 권한도 능력도 없는 존재 그
대로의 상태여.
조부님은 헐떡거리는 어머니를 팔에 안아 가슴을 쓸어주다가 다시 뉘어보았다가 어떻게든 편안히 운명을 시키려 애를 쓰셨다. 할머니께서 이웃 숙모님들을 부르시고 온 가족이 모여 앉은 가운데 분위기는 차츰 절박해져갔다.
“허고 싶은 말 있으면 해라.”
침착한 조부님의 목소리.
“어머님, 죄송해요. 저것들을 부탁드립니다. 그저 비뚤어지지 않고 올바로 크게, 으흐응 으흐응·…… 아버님 용서하세요.”
“어˙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어머닌 안 죽어. 아버지 한 분 돌아가셨으면 됐지, 왜 어머니까지·…… 싫어요, 싫어요.”
나는 어머니의 초점 잃어가는 눈을 향해 마구 울부짖었다.
“막둥아. 미안허다. 네가 제일 고생했어. 나 죽어도 공부 잘하고 바르게 커라, 잉? 지훈아. 어쩌끄나. 네 침이 무겁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힘을 합해서 살면 못 살기야 허것냐. 조부모님 계시니까 나는 믿고 간다. 으흐응 으흐응…… 제발 어른들 말씀 순종하고 행실 바르게……”
그 다음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한움큼 가래 꿇는 숨소리만
가쁘게 몰아쉴 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이 게슴츠레 눈을 깜박이며 빈사지경이 되어갔다.
“쯧쯧. 저라도 오래 살면 이것들 여우고 한 세상 보련만.”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목메어 하시자 방안에서 방밖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부님은 우리 남매를 어머니 곁에 나란히 앉히고 임종을 하도록 명
하셨다. 방학중이라 다 모여 있어 다행이라 하시면서.
으흐응 소리도 깜깜히 멀어지고 가래 끓는 소리만 가느랗게 들렸다. 일초, 일초. 한 생명이 완전히 끊기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엄숙하고, 긴박한 것인가도 그날 배웠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마지막 숨소리. 나는 계속 신에게 빌었다. 되돌려주소서, 하느님. 퉁퉁 부은 병석의 얼굴로라도 내 곁을 지키게 어머니를 살려주소서. 은행 따윈 줍지 않겠어요. 효성 지극한 딸이 될께요. 하느님. 단 일년이라도, 아니, 며칠 만이라도 함께 살게 해주세요.
그러나 다음 순간 어머니의 고개가 한쪽으로 맥없이 떨어지고 실같이 들리던 가래소리도 뚝 끊겼다. 희멀건 눈동자만이 허공에 떠서 반향을 잃고 있을 뿐.
조부님은 안경을 벗어 눈자위를 훔치시고는 어머니의 두 눈을 쓸어내렸다.
“편히 가거라. 걱겅말고 편히 가.”
그리고는 어머니의 허리께에 손을 넣으시려다가 가족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갔구나. 손이 안 들어간다. 몸을 풀었어.”
곡성이 마구 쏟아졌다. 지겹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그보다 더 높은 곡성이온 집안에 퍼졌다. 조부님께선 그 경황중에 손수 수시(收屍)를 하시고 염할 준비를 서두르셨다. 나는 난생 처음 시체를 동강동강 졸라매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안돼요. 안돼요. 할아버지! 어머닌 안 죽었어요. 쪼끔 있다 눈을 뜰 텐데 왜 그러세요. 답답해서 어쩌라고 그러세요.
나는 펄펄 뛰었다. 어른들이 함께 울면서 나를 말렸다. 할머니가 우리를 달래어 방밖으로 내보냈다. 마루 끝엔 동네에서 모여든 일가친척들이 잔뜩 앉아 연민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위 언니와 함께 아래채의 텃밭 옆으로 가 쭈그리고 앉았다. 간밤의 폭풍우에 오이나무며 가지나무들이 휙휙 쓰러져 있었다. 그곁엔 돼지막이 있어 시큼한 냄새도 났고 먹이를 놓고 싸우는지 계속 꿀꿀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암소먼학 어미돼지가 비스듬히 누워 있고 다섯 마리의 새끼돼지가 촘촘히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억울해. 언니, 우리는 뭐야. 저것들만도 못한 신세가 되나니. 그쳤던 눈물이 또 샘솟았다. 문득 어머니가 깨어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삐 쫓아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왜 이렇게 동여맸냐. 답답하구나. 어서 풀어다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갔건만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라, 그 감촉. 세사에 이럴 수가. 그것은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돌이었다. 우물가에서 만진 확돌이었다. 광에서 만진 널빤지, 장광에서 만진 항아리…… 너무 차겁고 딱딱해서 소름이 쫘악 끼쳤었지.
나는 나를 동정하는 친척들의 눈초리가 싫어서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부엌 앞을 지날 때 비로소 우리 식구들이 여태 아침도 먹지 않았음을 알았다. 상위엔 애꿎은 파리떼들이 모여들어 시식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 언니는 파리 쫓을 생각도 않고 부엌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언니의 어깨너머로 문득 식칼이 보였다.
하, 저 칼! 저것만 있으면, 저걸 내가 빼올 수만 있다면 나는 그걸로 내 가슴을 찌르고 피를 쏟으며 나자빠지는 나를 상상했다. 좋아.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나는 한 발 한 발 부엌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일하는 언니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저런 언니들에게까지 동정을 받다니…… 나는 더욱 용기를 내서 부엌 가까이로 갔다. 칼이 곧 잡힐 듯한 거리에 닿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뚝 발길을 멈췄다. 조부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조부님의 부르심이 없었더라면 그 칼을 집지 못한 핑계는 무엇으로 나타났을까.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지 살아가기 마련인 것을. 〈설워라 설워라 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부터 있단 말가. 빈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암, 그렇고 말고.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뒤따라 자살한 자식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한번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 가신 지 이십오 년. 나는 이렇게 건재한 것을.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어머니가 되어 있는 것을.
결혼 전엔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면 고향으로 갔다. 나의 스승이요, 부모요,
때로는 대화자일수도 있는 조부모님 곁으로, 서도(書道)에 취하신 조부모님 곁에 앉아 열심히 먹을 갈고 차를 끓였다. 그리고 백년쯤은 좋이 묵었을 예의 은행나무 곁으로 꼬박꼬박 갔다.
밤귀신처럼 잠도 안 자고 폭풍우 속을 헤맸던 그 새벽의 치기를 되새기며 나는 자주 은행나무의 폭 너른 그늘을 찾았다. 가을이면 그곳은 천국이었다. 노오란 은행잎이 쌓이고 쌓여 보료를 깔아놓은 듯한 착각. 사뿐히 즈려밟고 안으로 들어서면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의 홍수. 팽개치듯 내 온몸을 눕히면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던 은행 잎 쿠션.
나는 그 낙엽더미에 몸을 묻고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지. 너무너무 눈이 시려 들고간 책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고 삶이 왜 무의미할까보냐. 모든 것은 다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을 나의 고향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다. 나는 한동안 꼬옥 다물었던 입을 서서히 열어 노래를 불렀다. 내 머리 위에서 지저귀는 산새들과 함께. 내 발 아래서 쫄쫄대는 시냇물과 함께. 은은히. 그리고 낭랑히.
나의 손엔 지용의 시집이나 상허의 소설집이 들려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렇듯 가슴 뿌듯한 시를 남겨준 지용. 그가 월북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
다. 방지거 정 지용. 「가톨릭 청년」이란 잡지까지 편집했던 그가 월북을 하다니, 안될 말이다. 상허 이 태준도 그렇다. 그의 〈청춘 무성〉, 〈제이운명〉, 〈구원의 여상〉 같은 소설들은 내 외로운 영혼을 달래준 정화제가 아니었던가. 그들 두 분이 다 북으로 갔다는 사실에 나는 퍽 괴로왔었다. 사실인지 억측인지 알 순 없지만 그분들의 책조차 공식 적으로 구할 수가 없지 않았는가.
공산당으로 인해 직접간집으로 부모를 잃고 재산을 잃고 온몸 가득 상처를 바른 채 숙부님댁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북으로 간 그들이 그저 좋았다.
내가 그 귀한 책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빠 덕분이었다. 6·25 당시 오빠의 책꽂이에는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그후 숙부님댁에서 오빠와 함께
기거하며 살 때도 의학도인 오빠는 늘 문학서적을 읽었었다.
용기를 잃으면 안돼. 더욱 건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거야. 언젠가 우리에게도 옛말 이르며 살 때가 올 테니까, 응?
그 오빠는 지금 어엿한 의학박사가 되어 시내에서 개업을 하고 계신다.
덩 텅 팅 덩.
그래 참, 오빠도 요즘 새벽마다 정구를 하신다지. 연식 아닌 테니스로. 나이도 드셨으니 운동을 게을리 발아야지. 더구나 진종일 의자만 빙글빙글 돌리다보면 군살이 찔 염려도 있거든. 그러니까 오빠가 금년 몇 살이시더라? 6·25 때 열아흡. 지금이 29주년·…·어머나. 마흔여덟!
마흔여덟.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죽는 날까지 나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나이, 바로 아버지가 타계하신 연령이 아닌가.
텅 팅 텅 텅. 찰칵!
더티 포티·…·게임 오버!
일흔 살 노인의 정구가 끝났다. 양쪽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고 본부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박수 박수 박수.
이제 점심식사로 들어갈 모양이다. 두시 반, 너무 늦었다. 아우, 속 쓰려. 숙부님이 일어서셨다. 사촌아우도 따라 일어선다. 가자. 점심시간이다. 숙부님의 말씀.
“아이, 싫어요. 함께들 가실 텐데. 저 여기서 쉬고 싶어요.”
나는 왜 그런지 그 자리를 비키기가 싫었다. 한없이 앉아서 아버지 추억에 묻혀 있고 싶었다. 바쁜 도시생활 하느라고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려본 아버지가 아닌가. 허긴 어젯밤 잠깐 아버지를 생각을 하긴 했었다. 오늘 이런 시간을 갖게 되려는 암시였었나.
열 살 난 아들녀석이 친구를 데리고 무얼 신나게 만들더니 자랑 삼아 내 앞에 들고 왔다. 커다란 조미료상자에다 흙을 퍼다 담고 나뭇가지를 꺽어심어 산골처럼 만들었다. 땅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고 나무숲 새새로는 총을 든 병정들이 서로 겨누며 서 있었다. 이른바 전쟁놀이라는 거겠지. 눈에 몹시 거슬렸다. 게다가 양쪽 기지에 안경만한 깃발이 꽂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머 얘 좀 봐, 이건 미국기고 저건 소련기가 아닌가.
나는 질겁을 하고 깃발을 뽑았다. 어린 것이 무슨 할짓이 없어 이따위 전쟁놀이를 한단 말인가. 부셔. 당장 부시지 못해? 어디서 이런 걸 배웠어? 또 한번만 더 이런 짓 했다간 매맞을 줄 알어. 알겠니? 전쟁이 일어나면 좋겠어? 전쟁 땜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돌아가셨다는 것 알지? 그런 놈이 그런 놀이를 해? 나쁜 놈 같으니, 이제부터 그런 게 만들고 싶거든 오손도손 평화로운 모습을 만들어. 평화! 알았어?
나는 이성을 잃고 악을 써댔다. 전쟁은 싫다. 누가 이기고 지든간에 무조건 싫다. 이제 더이상 잃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게는 없다. 전쟁이라니!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 부자유와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아버지.
당신은 아시옵니다. 어젯밤 철없는 꼬마를 놀라게 한 제 신경질의 의미를. 만일 당신이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을 기억 하신다면 저를 이해하시겠지요. 부모가 함께 계시고 형제가 무고함이 제 일락이라……˙.
다섯 가지 약초를 알려주시며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해보려던 아버지의 혼령, 그러나 아무 효험도 없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일이 적중해서 어머니가 살아나셨다면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야겠지. 저승에서도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더욱 좋다. 그분은 아직도 마흔여덟 한창 나이, 패기만만하고 호탕하며 건장한 체구의 환상으로 내 가슴에 살아 계시다. 머지않아 나도 마흔여덟이 되겠지.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동갑이 된다. 그때쯤은 나도 틈을 내어 고향에 가야지. 선산에 이장되어 조부모님 무덤 곁, 어머니와 함께 묻혀 계신 아버지를 불러내어 산책을 즐기리라.
듬직한 당신의 팔아름에 매달려 꼭 한번 은행나무 숲을 찾아가리라.
정구장이 텅 비었다. 나를 아버지 환상으로 몰아넣었던 노인선수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마지막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아버지를 그분 나이에 맞춰보려 애써봤으나 안될 말이다.
그때였다. 교문 쪽에서 자동차 한 대가 멎었다.
문을 열고 한 중년의 남자가 내리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나와의 거리가 차츰 가까와쳤을메, 아·… ·나는 짧게 소리질렀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진짜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오고 계시는 게 아닌가. 옛날처럼 나를 보고 자애롭게 웃으시면서.
나는 벤치에서 뿔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목메인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갔다. 당신께선 그러나 덤덤하게 아까 그 속도로 몇걸음 다가오더니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으며 말씀하시는 거였다.
“게임이 벌써 다 끝났니? 숙부님 응원해드리려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어머나·…….”
“왜 그러니?”
“아뇨. 오빠이셨군요.”
나는 열쩍게 웃었다. 허탈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신바람이 났다. 옳거니! 바로 이 모습. 아버지는 영원히 이런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 거야. 패기만만하고 선이 굵고 그러면서도 예
술을 사랑˙하고 엄한 눈빛으로 우리를 제압하고 공무를 위해 밤낮없이 바쁘신 마흔여덟 한창 나이로! 마흔여덟. 마흔여덟.
― 198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