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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편집]
생포된 간첩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4년부터 간첩 활동에 잠수함을 투입하였고, 1995년 9월에는 서귀포의 간첩 침투를 지원하기도 했다.[5]
무장공비 요원 중 총책임자인 김동원 대좌의 존재로 인해 이 임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임무임을 알 수 있는데 김동원 대좌는 해상처장이며 그 해상처장이기 이전에 이미 공화국 2중 영웅으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고위 군관이었다. 참고로 공화국 영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심계층 중에서도 아무나 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직함이며 공화국 영웅 1회 수여 하나만으로도 바로 신분이 전사에서 군관으로 변경될 정도이다. 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수여한 인물이 김동원 대좌다.
이 임무의 진짜 목적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을 암살하는 것이다.[6] 이 무장공비들은 1996년 10월 7일에 춘천시에서 전국체전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며 그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낸 상태였는데 그래서 이들 무장공비들은 강릉까지 잠수함으로 침투한 이후 강릉에서 춘천까지 도보로 이동 후 춘천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뒤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저격할 계획이었다. 도보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 일자보다 3주일 정도 전인 1996년 9월 13일에 원산항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원래 항해요원은 전투요원을 강릉에 상륙시킨 뒤 복귀하는 것으로 임무가 완료되었으나 그들이 탑승한 잠수함이 강릉에서 정박이 아닌 좌초를 당한 탓에 원산항으로 되돌아갈 방법이 아예 없어졌으며 이로 인해 항해요원들도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결국 전투요원들이 항해요원들을 총살시키게 되었다.
1996년 2월 초, 동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7] 4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 내에서 시행된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불만을 표하면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일 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8][9] 일부에서는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으로 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붕괴의 가능성과 흡수통일이 논의되고 있는 것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의 위기의식이 표출된 것으로 보고, 확전의 위험성을 예측하였다.[10]
4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기동훈련을 실시하였고,[11] 5월 17일에는 중부전선에서 무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 7명이 비무장지대를 넘었다가 돌아갔다.[12] 5월 23일 새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정 5척이 서해 북방 한계선을 넘었고,[13] 6월 14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정 3척이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14]
8월 14일에는 미군과 러시아군이 동해 북쪽 두만강 국경 부근 연안에서 합동으로 상륙과 구조 및 운송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6년 초부터 미군의 유해 송환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9월 21일에는 미국의 대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16][17]
보도에 의하면, 상어급 잠수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986년부터 자체적으로 개발하였고, 사건 당시 10척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8]
상어급 잠수함은 길이 23.5m, 폭 3.7m에 325톤급으로, 수상 7노트, 수중 12노트로 항해가 가능하다. 승조원은 11명이고, 10명이 추가로 승선할 수 있다. 무장으로는 어뢰 4발과 기뢰가 있다. 선체는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레이다나 음향탐지기로 탐지하기 어려우며, 잠수 및 부상 속도가 빨라 비정규전이나 특수공작에 이용된다.[19]
일부 언론에서는 고위 공직자의 언급을 인용하여 좌초 당시 남한 영해를 포함한 동해에서는 또 다른 2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활동하며 교신 중이었음이 미국 공군에 포착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는 이같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했다고 밝혔다.[20]
탑승 인원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와 증언에 의하면, 잠수함에 탑승한 인원은 모두 26명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찰부 소속으로, 대좌와 상좌 등 고위급 장교를 포함하며, 소위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1] 그중 19명이 승조원인 것으로 파악되었다.[22]
좌초 및 침투[편집]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최초 발견 및 신고
9월 18일 새벽 1시 30분경 택시운전사가 강릉 해안 20m 해상에 좌초된 잠수함을 발견하여 파출소에 신고하였다.[23][24]
내부 조사 및 수색
대한민국 군에서는 2시경에 해안 초소에서 잠수함을 확인하였고, 부대의 전병력이 투입되었다. 3시 40분에는 침투의 흔적을 발견하고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고, 5시경에는 전군 경계령이 내려졌다. 7시 20분에는 부근 도로에서 권총, 구명조끼 등의 유류품이 발견되었고, 19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동해안 일대의 통행이 금지되었다.[23][24]
4시 55분부터 경비함과 대잠초계기를 동원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7시 25분에 구조 대원이 잠수함 내부로 진입하였으며, 내부에서 AK소총과 실탄, 체코제 기관총이 발견되었다.[23][24] 잠수함은 9월 22일에 동해시로 예인되었다.[25]
국방부 성명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대변인 성명에서 이 사건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도발이며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 사항이라고 발표하였다.[23]
검거 및 교전[편집]수색과 검거
16시 45분에 동해 고속도로 부근에서 청바지를 입고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승조원 1명이 주민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격투 끝에 생포되었고, 민간인 복장을 한 11명이 청학산 정상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24][26][27] 달아난 인원은 모두 13명으로 파악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곳곳에서 수색대와 교전을 벌였다.[28] 19일에는 동원된 4만여 명의 군·경찰·예비군과 헬리콥터 5대가 합동 수색을 벌였다.[29]
결과
수색은 9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49일간 계속되었고, 연인원 200만 명이 투입되었다.[30] 그 결과 잠수함에 탑승했던 26명중 살해된 11명을 발견하였고, 13명은 사살하고, 1명은 생포하였다. 수색대측은 장교를 포함한 11명의 군인, 경찰 1명과 예비군 1명을 포함한 민간인 6명이 교전 또는 사고로 사망하였다.[30][31]
상황일지[편집]
잠수함이 출발한 이후부터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의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2][33][34]
침투[편집]
잠수함이 발견되기 전의 상황은 생포된 승조원의 증언을 참고하였다.[35]
탐지 및 신고[편집]
검거 및 사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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