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 박일환
기다리는 자세 외
올 게 뻔하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겨울에 봄을 기다리는 건 정말로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그건 잠시 견디면 되는 일
죽은 나무에도 언젠가는 꽃이 피기를 바라는
그런 간절함을 빼면
우리 삶이 얼마나 얇아지겠는가
생전에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일들 때문에
절망이란 말이 생겼을 테지만
절망이 태어날 때 바로 옆집에서
희망도 첫울음을 터뜨렸다는 걸 잊지 말 일이다
기다린다는 건 싸우는 일이다
나약한 마음
기약 없는 시간
대문을 나설 때마다 발목을 휘감는 검은 그림자와 싸우며
근력을 키우는 일이다
완강하게 버티며 밀어내는 일이다
세상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나마저 꿈쩍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기다림의 자세가 아니다
기다림은 내가 먼저 너를 향해가는 발걸음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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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폭
전쟁 중에는 아주 흔한 일이지
당신이 사는 집은 물론이고
학교나 병원이라고 안전할 리 없지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던 저 자리
구름의 얼굴은 다만 평온할 뿐인데
포탄은 제 발로 학교와 병원까지 찾아갔던 걸까?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 뒤로 숨어버린
오폭은 정말 오폭이었을까?
포탄의 눈을 멀게 한 건 누구였을까?
일상이 참사인 날을 살아가는 이들 많으니
전쟁은 먼 나라 일이라고 안심하는 순간
예기치 않게 당신 곁에서
터지는 포탄, 그리고 아비규환
발사 버튼을 누가 눌렀는지도 모르는 채
당신은 오늘도
오폭이 남긴 잔해를 밟고
전쟁터를 가로지르며 출근하네
오늘은 누가 오폭의 희생자가 될까?
가여운 죽음들만 겹을 이루어 쌓이는
오폭이 정말 오폭이 맞기는 한 걸까?
따져 묻기를 멈추는 순간 어디서 또 길 잃은 척하는 포탄이 날아올지 모른다
박일환 |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는 싸움』,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가 있으며, 산문집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문학시간에 영화 보기 1, 2』, 『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등과 동시집 『토끼라서 고마워』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