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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이끌어 낸다.
좋지 않은 질문을 하면 좋은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길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2장. 치유의 촉진
영혼의 본질은 무엇일까?
영혼은 그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확신할 수 있는 실제일까?
몸과 마음, 영혼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일까?
가장 일반적인 예로 알레르기 환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저는 알레르기를 전혀 안믿어요. 제 삶에 알레르기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인적도 없고요. 그러나 이들의 유년시절로 돌아가보면 대개 아주 어린 두세살부터 알레르기에 대한 믿음체계를 갖고 이 병을 앓아왔음을 알 수 있다. 예외가 거의 없다. 식구중 누군가가 "알레르기는 우리 집안 내력이야"라고 한 말을 받아들이고 믿는 순간, 이것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작동한 것이다. 이처럼 성인의 신체에 나타난 많은 현상은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나 책에서 잘못 받아들인 정보, 교사가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아주 어린 시절에 아이에게 입력된 것이다. 이런 정보들이 암시적인 프로그래밍과 일반적인 믿음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이 정보들은 의식적인 것으로 우리몸에 자리잡는다. 이처럼 마음속에 품은 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병의 본질은 무엇일까?
의식지도를 보면 사랑은 500에서 생겨나고 치유는 540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몸에서 치유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일까?
그렇다면 의식의 전체적인 성격과 단계 덕분에 치유가 저절로 일어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시에 특정한 질병이 치유는 어떻게 촉진시킬 수 있을까?
먼저 자신이 경험하는 감각들에 대한 저항을 버리고 감각들에 이름붙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예를들어 십이자장궤양이나 천식은 경험할 수 없다. 이것들은 단지 명칭이나 정신의 구조물, 정교한 프로그램, 믿음체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천식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난 더이상 그것을 믿지 않아. 난 무한한 존재니까.
그것에 휘둘리지 않지.
내가 마음에 품은 것만은 내게 영향을 미쳐"
"무한한 존재이므로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럼 이 믿음 체계를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설까?
의식에서 형체를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근력 테스트를 해보면 이것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피실험자가 철회한다. 나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내가 마음속에 품은 것만 내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하면 실제로 근육의 힘이 강해진다. 이런 결과는 이 말이 진실임을 말해준다. 요컨대 거짓을 진실로 대체하는 순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과 거짓은 의식속에서 에너지 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 안의 모든 병을 완화시키고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놓아버리려면, 사랑이라는 본성의 표현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믿음체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순진무구할 뿐 부정성은 없던 아이가 그토록 많은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여 병들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증에도 목적이 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식으로 이 목적에 충실할 것이다.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것이다. 병으로 자기 연민이나 분노에 빠지는 대신 "병이 전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모든 비판과 공격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자신과 타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사랑하면, 자신의 순수성을 다시 자각하면서 더 강력하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치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럼 세번째 단계, 즉
기존 의학의 치료단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기치유에서 기존 의학의 치료법은 어떤 역할을 할까?
이제 이런 현상을 설명해주는 에너지 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본질적인 물리학과 에너지 장, 에너지 수준은 무엇일까?
영혼을 위해 영적인 작업을 계속하되 치유는 신에게 맡겨야 한다. 광대한 근원을 발견하고 밝혀내는 일이므로 성공적인 치료와 치유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겸허와 내맡김이 충분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치유와 회복 3. 스트레스
영성은 임상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삶은 세상과 자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간, 신성에 대한 기대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삶 자체는 무엇일까?
사건에서 일어나는 것이 삶일까?
"나는 어디에 적합한 존재일 수 있을까?"
나를 표현하고 이 기회들을 경험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04. 건강
건강은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 장애물들을 제거했을때 생겨나는 거침없는 생기의 발현이다. 한계와 분리의 느낌들을 뛰어넘을때 비로소 건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부할 힘이 있으므로 삶의 부정적인 것들도 부정해버릴 수 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마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건강은 자기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은 어떻게 터득할 수 있을까?
몸은 어떻게 경험되며, 몸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환자가 어느 한 인격의 의식을 받아들이면 이 이의식은 몇 분에서 몇시간, 며칠, 몆주 심지어 몇년에 이르기까지환자의 몸안에서 작용한다. 이 인격이 지배하는 동안 환자는 이 인격의 모든 믿음체계에 영향을 받는다. 이 인격이 궤양이나 비만,알레르기, 게실염, 대장염, 요통 등을 앓고 있다고 믿으면 실제로 이런 병들의 증상이 몸에서 나타난다. 그러다 감정이나 삶의 환경이 변하거나 무언가에 중독되면 이 인격이 떠나면서 흔히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인격이 몸에 들어오고 새로운 인격에는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몸이 즉시 과거의 모든 병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므로 병이나 치유 모두 믿음체계에 스며있는 에너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건강해지려면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일을 자발적으로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부정성을 받아들일까?
이들은 왜 프로그래밍에 그토록 취약할까?
결과는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원인은 마음의 차원에 있다. 그 반대는 아니다. 이런 점을 뒤집어 보기만 해도 건강과 치유에 이르는 완전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건강은 긍정적인 태도에서 생겨난다. 귀가 따갑도록 이런 말을 들어서 짜증날수도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마음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자세를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건강해지는 데 마음의 자세가 어떤 역할을 할까?
피최면자의 마음속에 일부러 주입시킨 증상의 원인들을 마음이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모습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정식으로 최면을 걸지 않아도 마음은 똑같이 할 것이다. 우리도 반평생이나 최면에 걸려 있으면서 이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최면이란 무엇인가?
암시에 감응하는 것 아닌가?
행복의 원천은 나 자신이다. 내가 건강의 원천이다. 전염병이나 바깥 세상의 어떤 것, 내가 먹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라는 인식이 행복의 원천임을 아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 덕분에 거짓된 믿음체계를 초월해서 그것에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거짓된 믿음체계들을 제거하면 삶이 어떻게 나아질까?
'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 정말로 가치있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지키는데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일이나 지위가 없으지면 내 삶에는 어떤 의미가 남을까요?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까?
05. 영혼의 응급처치
영적인 수행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지난 35년 동안 의식자체의 본질을 연구해왔다. 물론 영혼에 대한 연구는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혼에 대해서 아직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많은 의문들을 품는다.
무엇이 그 완전한 장으로 이끌어주는가?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개인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은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가르침을 들을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 이 가르침은 어느 단계에서 나온 것인가?다. 이런 질문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 내면의 아이는 언제나 순진하고 순수하며, 이런 순지무구함이 실수의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구도자들에게도 돈은 종종 갈등의 근원이 된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을 어떻게 봐야할까?
성에 대해 종교적으로 왜곡된 시각을 가진 악마적인 집단도 있고, 과도한 성적 관심과 유혹에 대해 전도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성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표현한다.
진실의 단계에서는 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영적인 작업을 안전하게 수행하고 위기를 피하려면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발견하고 재확인해야 한다. 이 본래의 순진무구함을 얼핏이라도 보고 항상 한 눈으로 주시하지 않으면 영적인 작업은 진정으로 안전할 수 없다. 이 순진무구함이야 말로 늪에 빠지지 않고 다시 진리로 돌아가게 해주는 문과 같기 때문이다.
이 순진무구함을 이해하고 이것의 존재를 깨닫는 방법은 무엇일까?
치유와 회복 06. 성
신은 섹스를 인정할까?
나이가 들면 섹스도 끝나는 것일까?
중년이 된다는 건 정말로 한물간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몸, 마음, 영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호나 유행어에 불과한 것인가?
영혼은 도대체 무엇일까?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영혼에도 에너지가 있을까?
우리 내면의 경험들을 스스로 연구하면 이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욕망과 갈망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런 신체 중심주의와 욕망의 에너지 장에서 온갖 도덕적 문제들이 생겨난다.
종교와 윤리학이 이런 에너지 장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런 에너지 장을 육욕적이라고 부를까?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다른 에너지 장에서 성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안에서 위안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본능에 지배당하거나 통제당하거나 휘둘리는 상태에서 성의 반복적인 악순환에 좌우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에너지 장에서 성을 온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려먼 어떻게 해야 할까?
주정주의에 신체 중심주의가 더해지면 흔히 "미친듯이 열정적인 "포옹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갈망과 욕망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오 널 미치도록 갖고 싶어" '널 얼마나 갈망하는지! 아 널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영화나 대중매체에서 흔히 묘사하는 것은 전부 이런 짜릿한 흥분이다.
성에 대한 이런 인식을 내려놓으면 어떤 경험이 가능해질까?
성을 부분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면 어떤 경험이 주어질까?
가슴, 즉 500의 에너지 장에서 존재의 진실과 실재가 하나되는 공간에서 사랑이 싹트면 성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게 될까?
강아지 코앞에 스테이크를 갖다 대고 먹지 못하게 하면 강아지가 무엇을 경험하겠는가?
행복을 경험할까?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길까?
탐욕의 자리에 내면의 평화가 고요히 깃들면 모두 해결된 것처럼 문제가 사라진다.
문제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사랑있음과 합일, 기쁨속에서 내적인 평화와 완전함의 무한한 상태로 올라가면, 절대적 합일을 느끼고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평화임을 깨닫는다. 완전한 상태는 곧 평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성을 통해 다시 완전함을 체험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편재의 느낌, 초월의 신비적 특징이다. 합일의 느낌이 일어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한 것같은 느낌이 자신이 언제나 모든 남성 혹은 모든 여성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자신이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경험이 비롯되는 바로 그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이상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표현해 낸다. 그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미묘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경험이 환상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는가?
현실의 남자나 여자에게는 불가능한 가공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7. 노화과정
인간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어디일까?
최면같은 간단한 임상학적 예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들어 아주 허약한 노인이 최면을 받으러 사무실에 들어와 "여기 의자에 앉아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을 기운도 없는 사람처럼 털썩 주저 앉는다. 최면요법 전문가는 최면을 걸어 그에게 서른 다섯살밖에 안됐다고 말하고 이 암시를 기억하지 못하게 기억상실증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노인이 최면상태에서 깨어나면 "물한잔 마시겠어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노인은 "네 한잔 마셔야겠네요"라고 말하고 분수식 식수대로 가서 물을 한컵 받아 자리에 앉는다.
허약하기 이를데 없던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말이다. 와들와들 떨어대던 모습은 어디로 간걸까?
그 허약하고 쇠잔했던 노인의 모습은 어디로 간걸까?
힘없던 노인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걸까?
요컨대 생활연령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정말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나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 나이를 받아들이는 방식, 나이에 따라붙는 온갖 믿음체계를 대하는 방식, 오랜 세월 흡수한 믿음체계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사람은 여든살에 춤을 추고 공연을하는데 어떤 사람은 고작 쉰아홉에 무덤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치유와 회복 8. 삶의 큰 위기들을 다루는 법
누구나 한두번 삶의 주요한 위기들에 포위된다. 그런데 죽음이나 이혼, 결별, 상처, 부상, 사고, 파국처럼 정서적으로 압도하는 심각한 사건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이런 경험들에 대처할때는 어떤 기법을 이용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는 경험을 경험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의 수행력을 발휘해서 마음이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를들어 마음은 '음 나는 저기 바깥에서 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저기 바깥이 아니라 "여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곳이 어디일까? 언제나 경험하는 똑같은 자리 경험을 느끼는 자기 안에 있는 자리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느낌뿐이다. 진짜 문제는 사실 저기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다. 내 느낌의 에너지, 즉 내 느낌의 압도적인 에너지에 저항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주의를 돌려 이느낌의 에너지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면 길어질 수도 있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 끊어진다. 경험이 불현듯 끝나는 것이다.
이 에너지를 계속해서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것을 풀어버릴 기회야라고 자신에게 말한다면 그러면 이 경험은 어떻게 될까?
제발 저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이런 형태의 기도는 아무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행태의 기도는 "신이시여, 제발 한쪽 발을 더 크게 만들어주세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신이 문제일까?
아니면 기도의 방법에 대한 이해의 부족일까?
생각과 더불어 고집과 저항을 내려놓는다. 통제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의 경험에 순응하면 드디어 이 경험이 소중한 선물임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 경험을 잘 견뎌야만 그럴 수 있다.
삶에서 의식적으로 영적인 작업을 어떤것으로 생각할까?
영적인 것이나 의식이라 불리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신의 무의식이나 초의식을 다룬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여러분은 이런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극심한 압도 상태에서도 자신이 정말로 경험을 다룰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극심한 공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즉 무력하고 제한된 자기는 이 경험의 위력에 상대가 안된다는 인식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된다. 제한적이고 개인적이며 사적인 나는 이 압도적인 경험을 다룰 수 없다. 압도적인 경험에 마주했을때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런 경험의 영적인 가치가 있다.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로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바꾸고 싶은 것은 우리가 경험을 느끼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 마쳐야 하는 작업에 순응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다.
그럼 작업을 마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작업이 끝나면 불현듯 혼란속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내면상태로 들어간다.
풀어버리지 못한 감정들과 미완의 작업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풀리지 않은 감정들은 정서적 태도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다가 몸에서 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바닥을 치는 내적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 그일을 겪고 싶지 않지만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해요"
세상에서 끔찍한 재앙이나 진행형의 무서운 병으로 치부하는 일에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재앙으로 우리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핵심적인 본질과 다시 연결된다.
또 일상의 삶에서도 조금이나마 순응을 한다. 그러다 커다란 압박을 받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더욱 깊이 순응하며 파국이 불러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깊은 차원에서 기꺼이 순응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인격의 변화와 영적인 위치의 전체적인 이동은 전통적으로 이런 깊은 차원의 순응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깊은 차원에서 순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끔찍한 정서적 파국을 겪지 않고도 깊은 차원의 순응을 통해 똑같은 영적 작업을 이루어낼 방법은 무엇일까?
치유와 회복 09. 걱정과 두려움, 불안
사는 것도 두렵고 죽는 것도 두려워라는 노랫말처럼 심지어는 삶 자체까지 두려워진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이 모든 것을 오염시켜버린 것이다. 이 에너지 장의 근원이 우리라면, 당연히 우리의 모든 경험이 두려움의 장의 속으로 빠져들어 삶의 모든 일이 두렵게 여겨질 것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 어떡하지?
늙으면 어떻게 사나? 내몸을 어떻게 될까?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되는거지? 관계는? 가족은? 은행잔고는?
우리나라는, 세계는 어떻게 되는거지?
이런 이들에게 내가 할 수있는 말은 안타깝다는 것 뿐이다.
자신이나 동료,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생명자체에 대한 사랑이나 그들 자신의 삶 혹은 몸에 대한 사랑에서 그 일을 한게 아니라니 얼마나 슬픈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사랑때문에 우리의 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심근경색같은 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몸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서 몸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살피지는 못하는 걸까?
마음은 언제나 우리의 두려움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음, 노상강도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까 내 두려움은 당연한 거야 하고 꼬드긴다.
그런데 당연한 두려움 따위가 왜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겠는가?
공격을 당하지 않을 방법을 선택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은 걸까?
자신에 대한 충분한 사랑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위험성을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을 정도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즉 자신의 선택으로 이런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우리 마음속의 온갖 믿음체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는 누구일까?
첫댓글 우리 마음속의 온갖 믿음체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는 누구일까?
좋은 질문
좋은 답
화두선!!
의식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