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이 70세에 갔다는 뉴스 후 나는 옥천을 안간다. 이동원, 곤궁한 상황에도 밤무대를 뛰지 않고 예인의 근본을 보여줬던 사람 옥천에 자신의 문화전당을 준비하다 사기를 당해 청도에서 한참을 머물다 결국 지리산에서 떠났으니 그의 혼은 진실이었고 자연이었다.
나는 이동원이 떠난 후 옥천을 가지 않는다 그의 노래든,김희갑의 작곡이든 혹은 옥천의 논밭 혹은 실개천이든 도무지 그를 떠나 정지용조차 희미한 실루엣의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동원이 자기 욕심과 화려한 군중의 찬사속에 풍요만을 누렸다면 나는 오히려 편히 그의 떠난 후를 일상으로 지내겠다.
나 역시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세상이 내 혁명의 기획안에서 쉽게도 성취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19살의 젊음은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데 밥 주는 곳이 없었다. 우선 곡기를 때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ㅇㅇ 여고 3층 증축 공사장 벽돌 운반에 동원됬다. 밥주고 밤에 모기장 쳐주며 노동이 끝난 후 저녘 여학교 운동장에서의 축구는 나의 폭포같은 기쁨이었다.
현실의 불협화음으로 가출을 했지만 그 현실은 녹록치 않었다 입에 풀칠하고 헌옷을 주어 입는 일조차 힘겨운 70년대 말이었다. 훗날 이동원이 값싼 의상과 편한 복장은 오히려 내게 기쁨을 주고 위안을 주었으며 그의 소박한 의식을 좋아하게 됬다. 그가 진정 평상의 의식주를 고매한 예술로 가꾸는 철학적 운률의 본원이라 부르고 싶었다.
모질지 못한 동원과 내가 겹쳐 보였다 때로 마음이 여러 결정을 못하고 분명한 대답을 못해 오해를 사기까지 하는 어설프고 심약하기는 비슷하나 그래도 그는 한줄기 빛으로 예술혼을 장엄한 장인 예인으로 살다간 실다운 자유혼이라 하겠다.
나이가 들어 옥천에 가 보면 역시 이동원의 숨결이 곳곳에 스며 그의 노래가 언제나 솟아나듯 맑은 찔레꽃 샘가의 물소리인냥 혹은 고요인냥 위안을 주며 지난 젊음에 한축 꿈을 버무려 환희와 우울을 동시에 부여했으니 옥천 작으막한 산과 들은 과거와 내일을 모두 머금은 우리의 고향이자 미래였다.
동원이 떠난 옥천은 이제 가지 못한다 아니 가지 않으려 한다. 여기 저기 그의 음성이 솟는 논밭에서 도무지 내가 응답하고 처신할 그 어떤 생각과 행동을 지을수 없으니 차라리 안가서 그의 저승을 축원할 뿐 그의 호흡이 담긴 옥천은 멀리서 멀리서 뒷발꿉들고 그려볼 일이다. 나는 이동원이 떠난 후 이제 더이상 옥천을 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