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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수필을 올립니다.
제가 세 번째로 쓴 수필이 이번 제 41회 문학의 봄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의 봄 2018년 봄호에도 실렸지만 못 읽으신 분이 있을 것 같아 올립니다.
어떤 말씀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끔한 충고와 쓴소리 부탁드립니다.
내가 처음 교직에 발령을 받은 건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던 2000년 3월이었다. 어렵게 임용고시 공부를 해서 합격이라는 기쁨을 얻고 경기도 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은 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첫 출근하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17년 전인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 형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형제 두 명 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학생이었다.
첫 발령을 받은 경기도 광명의 하안중학교에는 나를 포함 다섯 명의 체육 교사가 근무했다. 그 중 네 명의 교사에게 그 학교는 신규 발령지였고, 나이 차이들이 많지 않아 굉장히 친하게 지냈기에 지금까지도 종종 모여서 술잔을 기울인다.
나는 체육부에 업무분장을 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교장이 별실 없이 하나로 통합된 교무실을 선호해서 우린 체육실도 없이 본 교무실에서 근무를 했는데 학생부와 체육부는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학생부장이 체육 교사이다 보니 학생부와 체육부가 회식을 같이 하는 등 가까이 지냈다.
당시 학생부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매일 아침마다 하는 교문지도였다. 지금처럼 학생 맞이나 교통 지도가 아닌 교복, 두발, 지각생 등을 지도하는 전형적인 과거 형태의 교문 지도였다. 그런데 학생부장이 선배 체육교사이다 보니 학생부가 아닌 우리 체육부의 교사들에게도 교문 지도를 도와 달라고 했고, 우리는 기꺼이 교문 지도를 함께 했다.
발령 받은 첫 해였던 것 같다. 3월의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에 교문에 서 있으면 엄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학생이 있었다. 엄마는 아이의 가방까지 매고 선생님들께 반갑게 웃으면서 들어오시는 반면 아이는 간신히 고개만 숙일 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리를 다쳤을 거라 짐작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 주에 교문 지도를 나가서 보니 다리 뿐 아니라 몸 어디에도 깁스나 붕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편하게 앉아 있고, 엄마는 아이의 가방을 맨 채 밀어주고 있었다. 그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막 발령받은 신규 때라 내가 먼저 엄마에게 가서 아이가 많이 아프냐고 물어볼 만큼 넉살이 좋지도, 또 그렇다고 아이에게 “엄마 힘든데 네가 직접 휠체어를 밀지 그러냐.”고 할 만큼 호기롭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아이와 엄마는 늘 같은 모습으로 교문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체육 교사와 교문 지도를 같이 섰는데 선배 교사는 예의 그 아이와 엄마가 들어오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엄마와 대화를 했다. 잠시 대화를 나눈 아이의 엄마가 휠체어를 밀고 가서 나와 선배 교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졌을 때, 나는 바로 아이의 상태를 물어 보았다.
들려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이가 '선천성 근 이양증'이라는 희귀한 질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지극히 정상아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전신의 근력이 소실되는 아주 희귀하고도 특이한 질병이라고 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없다고 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근력이 없어져서 나중엔 호흡에 관련된 근육이나 심장의 근력도 소실되어 서른 살 정도가 되면 심장이 멎는다고 했다.
인생의 3분의 2를 움직이지 못하다가 결국엔 떠나버리는 삶.
그 아이는 말은 하지만 목 밑으론 전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고, 화장실 역시 스스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 종종 실수를 하는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급하면 아이를 들어서 화장실 변기에 앉힐 만한 힘을 가진 선배 체육 교사가 담임이 되었다고 했다.
당시 3학년 교실은 4층이었는데, 그 아이의 교실만 1층이었다. 아이는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체구가 제법 컸다. 아이의 옆에는 항상 도우미 학생이 있었고,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도우미 학생이 담임 선생님께 와서 얘기를 했다. 담임 선생님 혼자 힘으로는 아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같이 있는 체육 교사들이 함께 들어서 변기에 앉히곤 했다. 서 있을 힘이 없으니 소변이나 대변이나 모두 변기에 앉혀서 보게 했다.
한번은 도우미 학생이 왔기에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히려는데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화장실로 데려가기 전에 그만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이.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무슨 방법이 또 있겠는가. 우리는 아이를 들어 변기에 앉혀 마저 똥을 뉘이곤 휴지로 닦아 주었다. 바지를 벗기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호스를 연결해 물을 틀어 닦아 주고는 급한 대로 주인 없는 체육복을 입혔다.
죄송하다고 울먹이는 아이에게 괜찮다는 말 밖에 달리 해 줄 말이 있겠는가? 난 지금까지 살면서 중학생 남자 아이의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절망적이면서도 슬픈 표정.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 후로 우린 도우미 학생이 부르러 오면 번개 같이 달려가곤 했다. 그땐 20대의 열혈 체육교사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같은 일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난 1학년 체육을 가르쳤고,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3학년 체육을 가르쳤는데, 그 반과 내가 가르치는 반이 동시에 운동장에서 체육을 할 때가 있었다. 아이는 운동장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수업 시간 내내 구령대 위에서 휠체어를 탄 채 친구들이 뛰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원하면 체육시간에 나오지 말고 그냥 교실에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아이는 나와서 하염없이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도 뛰어 놀았던 운동장을.
어느 날 아이의 아버지와 체육 선생님들이 저녁을 먹었다. 그땐 김영란법이 없던 때였고,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밥을 사고 싶어 하셨다. 아이의 아버지는 보통의 아버지들 이상으로 교육열이 높았으며 학교운영위원장까지 하고 계셨다. 저녁을 먹으며 소주잔이 몇 순배 돌았지만 그 어떤 푸념도 듣지 못하고, 슬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아이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은 다행히도 형과 달리 잘 뛰어 놀고, 축구도 잘한다고, 아주 건강하다고 웃으신다.
그 해 아이는 졸업을 했고, 담임이었던 체육 선생님도 다른 학교로 옮겼다. 자연히 그 아이에게 관심도 멀어졌고, 그 후론 소식을 듣지 못했다.
4년 후, 나는 학교 만기가 되어 광명시의 다른 학교인 철산중학교로 옮겼다. 근무한지 1년이 지나고 다음 해 새 학기가 되기 전에 학교에서 갑자기 공사를 했다. 학교 건물 출입문 쪽에 장애인용 통로가 만들어지고,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었다. 관공서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건물에 장애인용 시설이 들어서고 있을 때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중증 장애를 가진 신입생이 들어온다고 했다.
입학식 날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던 중에 식장에서 낯익은 분이 인사를 한다.
"주선태 선생님 아니신가요?"
아. 낯이 굉장히 익은데 바로 떠오르질 않다가 이내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듯 기억이 났다. 내 앞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는 분은 5년 전 하안중학교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아이의 아버지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 철산중학교엔 웬일로……."
말을 하다가 이내 그 아이의 동생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초등학생이라던, 형을 안 닮아 축구도 잘하고 건강하다던.
순간 무엇엔가 한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과 함께 가슴이 무너졌다. 아. 그래서 공사를 했구나.
당황한 기색인 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활기차게 흔들어 악수를 할지언정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어떠한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얘기를 하신다. 형과는 달리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너무나 건강했기에 별 걱정이 없었는데 5학년 때부터 아이가 점점 힘이 없어지더니 지금은 혼자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은 손에 힘이 남아 있어서 엄마가 휠체어를 밀어 주지 않아도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조종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가 공부에 욕심이 있어서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체육 수행평가가 걱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들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할 수 있을까?
며칠 후 아이의 아버지가 날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체육 수행평가 얘기를 하신다.
1학년 체육의 첫 번째 수행평가가 청소년 체조인데 아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상의를 하러 오신 것이다.
당시에 나는 3학년 체육을 맡았기에 1학년 체육 담당 교사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체부자유자의 경우 지필고사로 대체할 수 있지만 아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수행평가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방법은 청소년 체조의 동작 순서, 방법, 주의할 점 등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청소년 체조 10개 동작의 그림과 설명이 들어간 유인물 한 장을 주고 다른 학생들이 수행평가를 볼 때 같이 보기로 했다. 나중에 아이의 수행평가는 어떻게 됐냐고 담당 체육 교사에게 물어보니 너무도 완벽하게 공부를 해 왔더라고 했다.
동생의 체육시간은 형의 체육시간과 달랐다.
형 때와 마찬가지로 동생의 학급과 내가 수업하는 3학년 학급이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운동장에서 동시에 체육을 하게 되었다. 동생은 형과 달리 성격이 밝은지 반 아이들이 준비운동으로 운동장을 뛸 때 뒤에서 풀풀 나는 먼지를 마셔가며 전동 휠체어를 타고 따라 다녔다. 몇몇 철없는 아이들이 휠체어 뒤에 올라탔다가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했지만 아이는 싫어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성격 탓도 있겠지만 형은 손 하나 맘대로 못 움직이는 반면 동생은 손을 움직일 수 있으니 전동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준비운동으로 운동장을 돌고 나서 본격적인 체육 활동에 들어가도 아이는 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나름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과 활동을 했는데, 그건 조별로 돌아다니면서 잘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하고 참견하는 일이었다. 반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은지 자기 조에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귀찮을 만도 하겠지만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고, 어떤 철없는 아이가,
"넌 좋겠다. 손으로 편하게 조종하고 다닐 수 있어서."
라고 얘기해도 화내지 않고,
"그럼 나랑 바꿀래?"
하고 웃어 넘겼다.
며칠 후 어느 볕 좋은 봄 날 방과 후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하교하는 아이를 만났다.
몸이 불편해 내가 아는 척 하는 것을 동정으로 느껴 싫어하면 어쩌나 하다가 형이 다녔던 학교에서 왔고 아버지도 안다고 나를 소개 하며 형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아이는 전혀 싫어하거나 망설이는 내색 없이 밝게 형의 얘기를 했다. 숭실대학교의 국제통상학부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자기는 형보다 더 열심히 공부할 거란다. 그래서 장애인 최초의 젊은 외교관이 될 거란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건 알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한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얘기는 누가 해 준 것일까? 본인의 병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았을까?
순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중학교 1학년 아이보다, 꺼려하면 어쩌나 걱정 했던 내가 더 작게 느껴졌다. 인사를 한 후 친구를 뒤에 태우고 웃음 지으며 가는 그 아이가 너무나 커다랗게 느껴졌다.
휠체어 뒤에 올라탄 아이에게 내려오라고 소리치려다가 그만 목이 메었다. 온 몸에서 손가락 밖에 못 움직이는 저 아이도 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나. 서른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을 절실히 살아가는구나. 교직생활 7년 만에 매너리즘에 빠지고, 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평, 불만만 가득했던 나인데…….
게다가 우린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얼마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가? 하물며 키가 작다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정상인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 비관하고, 불평하며 살아가는가?
어른이고, 배웠다는 교사이지만 때론 어린 아이들에게 배운다. 내가 가진 지극히 평범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갖지 못한 아이한테 배운다. 해가 내려가 길게 드리워진 아이의 그림자만큼이나 나에게 그 아이는 커다랗게 보였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났을까? 9년쯤 지난 작년 겨울의 일이다. 볼 일이 있어 안양의 부림중학교에 방문을 했다. 내가 신규 발령을 받아 하안중학교에 근무할 때 나를 예뻐해 주고 많이 도와주셨던 옆 반 담임 선생님이 그 학교 교감으로 계시기에 간 김에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다. 크게 반색을 하시며 타주시는 차를 마시면서 그동안 지내왔던 얘기들을 나눴다. 한 시간 가량 반갑게 대화를 하고 이제 그만 일어서려고 하는데 나에게 물으신다.
"소식 들었어요? 규혁이 얘기?"
규혁이는 내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형제 중에서 형이다.
순간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변심한 연인의 마음을 알면서 이별을 통보 받는 느낌이랄까?
가만히 그 아이의 나이를 따져 보았다. 그 때 중3이었고, 그로부터 16년이 지났으니 서른이 좀 넘었겠구나.
"죽었대요……. "
말 안해도 알 것 같은데 굳이 얘기를 해 주셨다. 연락이 와서 장례식장에 다녀왔는데 마지막 1년은 휠체어도 못타고 누워만 있다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고 했다.
17년 전 휠체어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던 모습이 아닌 눈감고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과 동생의 터울이 네 살이었던가, 다섯 살이었던가? 동생의 소식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 십년쯤 지날 때까지 이 교감선생님을 만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만나면 동생의 소식도 듣게 될 것이기에.
나에게 동생은 어느 볕 좋은 봄 날 휠체어 뒤에 친구를 태우고 밝게 웃으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 교감 선생님을 다시 만나 동생의 소식을 듣는다면 형처럼 눈감고 누워있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수소문을 해서 목숨이 다하기 전에 찾아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동생은 형과 달리 지금도 직접 전동 휠체어를 조종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거야.
난 동생의 소식을 묻지 않을 것이며, 누가 얘기 해준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체육시간에 휠체어를 타고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던 모습만 기억할 것이다.
첫댓글 잘 하셨어요.
카페의 모든 회원이 '문학의봄'을 구독하는 건 아니어서 처음 보는 분들도 많을 것 같네요.
예. 그런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퇴근길 전철 안에서 읽었는데 참 여운을 많이 남기는 작품이군요..
두 형제와 그 위대한 아버지 어머니~~
글을 통해 제 인생도 겸허하게 반추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아직도 제 모자란 글을 '작품'이라고 하시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교정할 때 읽어보고 다시 한 번 읽으니 감동이 새롭네요^^^ 늦었지만 11주년 기념 때 반가웠다는 인사 다시 한 번 드립니다^^
소주 한잔 하면 좋았을텐데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문봄때 괜히 반가웠는데 먼저 가셨더러구요. 우리식구 저만빼고 주씨이거든요. 그리고 우리애들이 부안중학교를 졸업했어요. 부림옆동네 ㅋㅋ 반갑습니다. 자주 봬어요
반갑습니다. 안양이시군요. 저역시 안양의 모 중학교에서 근무했었습니다. ^^
시간 날때 정독하겠습니다 읽지도 않고 댓글이라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