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종 때에 북방의 6진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계유정난 이후 함길도에서 수양대군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수하 장수들에게 살해되었다.
- 출생-사망 ? ~ 1453
- 본관 양산(梁山)
- 호 원봉(圓峰)
- 별칭 대금황제
본관은 양산(梁山)이며, 호는 원봉(圓峰)이다. 중추원지사를 지낸 이전생(李全生)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이징석(李澄石)과 동생인 이징규(李澄珪)도 경상도와 평안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 등을 지내 3형제가 모두 무장(武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벽진 이씨(碧珍李氏)와 결혼해 이자원(李滋源), 이윤원(李潤源), 이연원(李淵源) 등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이징옥(李澄玉)은 어려서부터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무용(武勇)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왕을 호위하는 시위군(侍衛軍)인 갑사(甲士)가 되어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1416년(태종 16) 무과 친시(親試)에 제1등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이 되었다. 그리고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추천으로 경원(慶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된 뒤 1431년(세종 13) 세종이 특별히 귀향(歸鄕)의 명을 내릴 때까지 9년 동안 함길도(咸吉道)에 계속 머무르며 변경의 방어에 공을 세웠다. 1424년(세종 6)에는 아산(阿山)을 침공해 온 여진족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무리를 물리쳐 이듬해 경원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다. 그리고 1427년(세종 9)에는 벼슬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31년(세종 13) 세종의 특별한 명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징옥은 그해에 가정접반사(加定接伴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 장동아(張童兒)의 접대를 맡았고, 1432년(세종 14)에는 병조 좌참판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조선에 해동청(海東靑) 등의 사냥매를 잡아 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1432년에는 장동아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함길도 지역에 머무르며 매를 사냥하기도 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과 병사들을 접대하느라 함길도 백성들의 부담이 컸는데, 접반사였던 이징옥은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경성(鏡城) 사람이 잡아온 해동청을 놓아주었다. 사냥매의 공급을 어렵게 해서 명나라가 그런 요구를 해 오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한때 세종도 신상(申商)의 건의로 함길도의 관리들에게 이러한 명을 내렸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이징옥은 이 일로 문책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에야 다시 복직되었다.
이징옥은 1433년(세종 15)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임명되어 다시 함길도로 파견되었으며, 1438년(세종 20)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 함길도에 머무르며 6진의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1434년(세종 16)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使)가 된 이징옥은 이듬해에는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었다. 그리고 김종서(金宗瑞)가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되어 오자 다시 판회령도호부사가 되어 최전선에서 여진족과 대치하였다.
1437년(세종 19) 경원 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에는 모친상을 당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상중임에도 100일 뒤에 그를 다시 경원 절제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 동안은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가 경원까지 겸해서 다스리도록 했는데, 이징옥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으면 형편에 따라 방어에만 전념하라는 명이 특별히 내려졌던 것을 보면 당시 북방의 방어에서 이징옥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은 그가 상중이고 늙은 부친이 있다는 것을 배려해 1439년(세종 21) 경상도(慶尙道)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해 고향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게 했다. 이징옥은 경상도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왜적(倭賊)을 방어하기 위한 비변책(備邊策)을 마련해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1442년(세종 24) 이징옥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겸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지역의 방어체계를 정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겸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당시 이징옥은 늙은 부친을 봉양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1444년(세종 26)부터 1449년(세종 31)까지는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 등 내직이나 경상도 지역에서 근무했다.
1450년(세종 32) 부친상을 당한 이징옥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그해 새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상중인 그를 도절제사로 삼아 다시 함길도로 파견했다. 그리고 1452년(문종 2) 그에게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주었다. 1453년(단종 1)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도 명을 내려 이징옥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유임시켰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장수이자 김종서와도 가까운 관계였던 이징옥은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 제7대 세조) 일파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해 음력 5월 한명회(韓明澮)와 홍달손(洪達孫)은 수양대군에게 이징옥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공모해 경성(鏡城)의 병기들을 한양으로 옮겼다며 그의 문책을 주장했고,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뒤에는 곧바로 함길도에 주둔하던 이징옥을 불러들여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징옥은 박호문(朴好問)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함길도로 오자 그에게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길주(吉州)에 있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죽고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그의 아들 박평손(朴平孫)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도진무(都鎭撫) 이행검(李行儉)과 함께 도절제사영에 주둔하던 병력을 이끌고 종성절제사(種城節制使) 정종(鄭種)이 지키고 있던 종성(鍾城)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진의 여러 부족에 군사를 요청하고, 각지에 군사를 일으키라는 통문을 보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당시 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금나라를 계승한 대금(大金)의 황제(皇帝)임을 자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토벌군이 출정하기도 전에 종성에 주둔하던 이징옥은 이행검과 정종의 계책에 넘어가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징옥의 시신은 거열(車裂)로 찢겨졌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다. 1908년(순종 2)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의 건의로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