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 6일 1박2일간의 청기와회 모임을 남한산성과 수원화성 답사를 하면서 진행한다
첫날인 6월 5일 남한산성과 수원 팔달산을 오르고
다음날은 수원화성을 빙 둘러 답사를 한다
남한산성은 동문에서 출발을 하여 북문-서문을 거쳐 산성로타리로 하산을 하는데
시간제약상 남문은 이번 답사지에서 제외를 하였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12:24 동문(東門) 출발
망월사 갈림길에서 왼쪽의 망월사를 먼저 답사한다
망월사(望月寺)
남한산성에 있는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남한산성 축조 이전부터 있던 절이다
망월사를 내려와 산성 성벽을 따라 진행하면 .....
12:52 장경사(長慶寺)가 나온다
장경사(長慶寺)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僧軍)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승려가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을 세웠는데
이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제2암문(暗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암문으로 다른 암문에 비해서 큐모가 큰 편이다
군포지(軍舖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인 군포가 있던 자리다
남한산성 여장(女墻)
여장(女墻)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동장대터(東將臺址)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봉암성 암문(蜂巖城 暗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구로 쓰인 이 암문은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규모 또한 폭 2.36m, 높이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에는 총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봉암성(蜂巖城)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이 봉암성을 쌓게 하였다
봉암성 성벽은 남한산성에 비하면 제대로 복원이 되지 않은채로 있다
벌봉 갈림길에서 봉암성 성벽을 따라 남한산 정상으로 간다
13:19 정상석이 서 있는 남한산 서봉(西峰)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실제 정상인 남한산 동봉(東峰)이 나오지만 아무런 시그널은 없다
남한산 동봉에서 북쪽으로 전개되는 산그리메
경기도 하남시 쪽의 산들인데 지도를 살펴보니 금암산, 객산인 모양이고
내가 가보고 싶어하는 검단산은 이 보다 더 동쪽에 있으니 검단산은 아닌 것 같다
서봉으로 돌아와 기념사진을 남긴다
남한산(南漢山) 서봉 정상
옥정사지 암문(玉井寺址 暗門)
저기 멀리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淸凉山) 정상이 보인다
내려다 보이는 하남시 미사지구
저기 북문이 보인다
남한산성 북문(南漢山城 北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고도 부르던 북문은
병자 호란 당시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 사용하던 문이다
하지만 북문도 쓰라린 패전의 경험이 있는데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과 맞붙었으나
적의 계략에 넘어가 전멸하고 말았다
'법화골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병자 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다
이후 문의 이름을 패전의 경험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북장대터(北將臺址)
북장대터를 지나 조금 내려서면 저기 서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14:09 서문(西門)
남한산성 서문(南漢山城 西門)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고
이 서문은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이제 청량산(淸凉山)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수어장대로 향한다
청량당(淸凉堂)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회 장군과 그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수령 400년 된 향나무 보호수
14:20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는 청량산(淸凉山) 정상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은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西將臺)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달았다
무망루(無忘樓)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무망루 편액 원본은 수어장대 2층 내부에 걸려 있고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무망루 편액 복사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매바위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죄가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참수형에 처하게 된 이회 장군이 죽기 직전에 하늘을 쳐다보며 한 말이다
이회 장군이 죽자 부인 송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완벽을 기하다 보니 그만 공사 기일을 넘기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까지 부족하게 되자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결국 이회 장군은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예언대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어디선가 매 한마리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아 구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매가 앉았던 이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그리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였다고 한다
옛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었던 흔적인듯한 시멘트로 만든 좌대
매탄처(埋炭處)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전략물자인 숯을 묻어 놓은 장소인데
남한산성에는 이런 매탄처가 몇군데나 더 있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대부분이 이런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걷기에 편하다
취성암(醉醒岩)
술에 취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술이 깬다는 전설이 있다는 바위를 말하는데
이 바위가 취성암(醉醒岩)이다~
영월정(迎月亭)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이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던 시기는 병자호란 때였다
병자호란 때 원래 강화도로 피난을 시도하려던 인조가 강화도 피난이 좌절되면서 결국 남한산성으로 옮겨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며 항전하였던 것이다.
좌전(左殿)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강화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수원화성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17대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시와 근접하여서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등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과 한남루
한남루(漢南樓)
남한산성 행궁으로 들어가는 2층 누문(樓門)이다
천흥사 동종(天興寺 銅鐘)
원래는 충남 천안의 천흥사에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에 있는 이 종은 2012년에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타종할 때 울림이 좋게하기 위해 약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한 것이다
15:03 산성로타리에 도착하면서 오늘의 남한산성 답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