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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한국 땅에 얽힌 사연. 낙서장
2008. 12. 20. 0:58
http://blog.naver.com/hobuttie/90039152639
시간도, 계절도 한국과는 정반대인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
그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1978년 정부의 남미 농업이민자 모집 공고를 보고 머나먼 땅 아르헨티나까지 떠나온 김인석 씨. 그의 가슴속에는 오랜 세월 굳어져 온 응어리가 있다. 농업이민의 실패는 평생의 한이 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이민을 보낸 한국 정부에도, 이민자들이 말이 안 통하고 현지 사정에 어둡다는 점을 악용한 교민 브로커들에게도, 서로 돕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된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그는 할 말이 많았다. 노인대학이 소유한 라 플라타 지역에서 소일거리로 야채농장을 경영하며 노인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김씨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5월28일 농업이민으로 아르헨티나에 와서 실패한 후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민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다. 농사의 꿈을 펼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미의 광활한 땅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내고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의 이스크자쿠 농장에 도착한 김씨.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옥한 농토 대신 기온이 한낮에는 40~50도씩 올라가고, 강수량이 170㎜에 불과한 메마른 사막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가운데에서도 밤낮을 일해 6개월 만에 콩을 재배하는 데는 성공했다. ha당 1.6~1.7t의 콩을 수확한 것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 입장에서는 고무적인 일로, 당시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밤낮을 무더위와 싸워가며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콩 재배 성공 사례는 청와대에까지 보고돼 대통령 특별하사금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는 17가구의 농업이주민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도시로 나와 봉제업을 하기 시작했다. 인근에 대규모의 땅을 구입해 한국인 집단농장과 코리아타운을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그 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랴흐타마우카(llajta-mauca) 땅이다. 300가구의 농업이민자 입주를 목표로 시범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구입한 2만ha의 이 땅. 하지만 결국 단 한 가구의 이민도 받지 못한 채 27년 동안 ‘숨겨진 한국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이 땅은 면적이 2만894ha(208.94㎢), 여의도 면적(2.9㎢)의 약 70배 만한 크기로 1978년 8월 외무부가 매입했다. 당시 총 211만5,067달러(1ha당 미화 101달러)가 들어갔다. 벼 한 포기, 채소 한 단 자라지 않은 채 선인장과 야생의 터전이 돼 있었다. 이 땅은 왜 27년간 이 지경으로 방치됐을까? 대부분 실패했고, 불법 이민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자 정부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를 규제하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주도적으로 농업이민을 추진하기로 한다. 301일 동안 연인원 31명을 남미 지역에 파견했다. 현지 조사를 통해 농업이민 적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파라과이 등 6곳에 땅을 구입했다. 동시에 보건사회부와 상공부는 농업이민 지원자들을 모집했고, 이민자들은 전 재산을 투자금으로 예치해 이민을 떠났다. 있지만, 정부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나섰다 낯선 땅에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갖가지 난관과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과정에서부터 드러나 있던 하자에 눈을 감은 탓이었다. 정부 파견 조사단이나 현지 공관 관계자들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사하고, 심한 경우 땅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구입한 경우도 있었다.
칠레 테노 농장(1980년 구입)의 경우는 보사부가 땅을 구입한 후에야 칠레 정부가 농업이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이없는 사례다. 농업이민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현지인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과정에서 법적 문제가 발생해 결국 브라질 정부에 기증해야 했다. 파라과이 산페드로 농장(1968년 구입)은 1977년까지 19가구 전원이 농장을 떠났다. 파라과이를 떠난 이민자들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재차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 교민들의 요청으로 랴흐타마우카 땅 또는 야산으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측의 요청에 따라 랴흐타마우카 국유지로 지칭한다). 특히 이 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은퇴 후 가서 살겠다며 당시 주 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남철 대사를 특명대사로 임명할 정도로 애정을 쏟으며 지시해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작부터 어긋났다. 외무부가 농업진흥공사와 용역 계약을 체결해 영농시험을 실시한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30ha를 개간해 강낭콩·수수·면화 등을 재배해 봤으나 염분이 많고, 강우량이 부족한데다 기온이 지나치게 높아 작물의 결실 상태가 나빠 농사 부적격 결론이 내려진 것. 게다가 농장 개발비용으로 최대 2,870만 달러의 추가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제3자에게 매도됨에 따라 남철 당시 주 아르헨티나 대사는 미주 공관장회의에서 대체 토지로 순초 푸호와 로베르시 등 2개 후보지를 제시했고, 최종 합의 결과 1만1,500ha 의 순초 푸호가 선정됐다. 1978년 3월 이희일 당시 청와대 경제 제1수석비서관 등은 순초 푸호 농장에 대한 현지답사를 마친 후 170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는다. 연결고리가 되는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고, 따라서 아르헨티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씨가 땅 구입에 참여하게 된 경위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가 가계약을 위해서는 이승일 씨를 내세우라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교민들은 주장한다. 땅을 구입해야 하니 알아봐 달라’고 해서 본국에서 파견된 김성호 박사와 함께 20여 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정한 땅이 랴흐타마우카”라면서 “김 박사와 남 대사에게 물어보면 잘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와 남 대사는 모두 “교민으로부터 소개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승일이라는 사람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산초 푸호에서 랴흐타마우카로 변경해 구입한 경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답변은 각각 달랐다. 이씨는 “산초 푸호 땅은 당시 토지대장이 없어서 랴흐타마우카로 급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땅에 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남 전 대사는 “구입과 관련해 관여한 바도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벌인 ‘대정부 사기극’이라고 현지 교민들은 주장한다. 독일계 농장 주인이었던 패드로 에르마노스가 농사에 실패해 헐값에 처분하려고 내놓은 땅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중개인들에게 속아 쓸모없는 땅을 비싼 값에 샀다는 것이다. “지금도 시세가 ha당 20~30달러밖에 안 하는 땅을 당시에 100달러에 샀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브로커들의 사기에 놀아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환율을 고려하면 페소로 샀어야 했는데 달러로 사서 손해 본 것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농업이민 1세대로 현재 호텔업을 하는 권혁태 사장도 “20~30달러라는 시가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얘기지, 사실상 시가가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민들은 농사는커녕 사람도 살기 힘든 불모지라고 주장하는 반면, 땅을 구입했던 당사자들은 좋은 땅인데 정치적 이유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승일 씨는 “랴흐타마우카는 태어날 때부터 사생아였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 표현까지 들먹이는 것일까? 이씨의 말을 들어보자.
은퇴 후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노 전 대사와는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씨는 “그 땅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1995년 한국 정부에 500만 달러를 투자해 목축지로 만들겠다는 5개년사업 계획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설명. “그러나 외무부와 아르헨티나 대사관 측이 회의를 하더니 임대도, 매각도 못하겠다고 했다. 만일 내가 성공하면 역대 대사들이 다 다치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홍보담당자 헤르만 무니치는 “지금 당장 소를 넣고 키울 수도 있다”면서 “곳곳에 염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땅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남미식 목축은 “넓은 땅에 소를 풀어놓고 알아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현장에도 직접 가봤는데 밀을 재배하기 좋은 땅이었다”면서 “경험이 없고, 아르헨티나를 통해 미국에 입국하려는 사람들만 선발해 보내 실패한 것”이라며 이민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성호 박사는 “1년을 오가며 조사하고 이희일 청와대 경제비서관도 직접 보고 구입한 땅”이라면서 “당시 박 대통령이 저격당하면서 농업이민이 흐지부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초 푸호로 결정됐던 것이 아니라 농업전문가들이 더 싸고 넓은 땅이 있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그 땅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비서관 말대로라면 산초 푸호 땅에서 랴흐타마흐카 땅으로 변경 구입하는 과정에는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고, 정부 파견 조사단과 현지 교민에 의해 결정된 후 이들의 말만 믿고 사후 재가를 해 준 것이 된다.
이들은 동시에 외무부에도 책임을 돌렸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외무부에서 타부처 관계자들이 파견돼 농업이민을 추진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전 비서관은 “그 땅이 나쁜 땅이라고 누가 그러더냐”면서 “외무부에서 관리 않하고 내팽개쳐 황무지가 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땅의 경제적 가치 여부를 떠나 이승일 씨의 말대로 외무부 측에서 고의로 방치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반문했다. 한 교민은 “토지 브로커와 현지 해외개발공사 직원의 말만 듣고 남 전 대사, 김 박사 등이 비행기로 한번 휙 둘러보고 구입했다”며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지방 특유의 식물군)와 선인장뿐”이라면서 “먹을 풀과 물이 없는데 소가 어떻게 자라느냐”고 반문했다. 권혁태 씨는 제아무리 부지런한 독일인이 와도 척박하고 숨막히게 무더운 산티아고 땅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의 ‘산티아게(산티아고주 주민)의 오랜 농담’을 소개하기도 했다. 전문가이기도 한 최양부 아르헨티나 대사는 2003년 12월 다시 한번 조사팀을 꾸려 지난해 ‘랴흐타마우카 농장 활용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번에는 정치적 논란을 없애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농대의 축산·식물 전공 교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대학 임업·산림관리 전공 교수와 농장 개발 전문가 등 7명의 현지인과 공관 직원으로만 조사팀을 구성했다. 아르헨티나 국립 농축산기술연구원(INTA)의 기후 및 물 연구소의 자문도 구했다. 우선 자연환경적 특성으로는 동계에는 일교차가 커 서리가 많으며, 하계는 온도가 45~50도까지 상승했다. 강우량은 연평균 500~600㎜ 내외로 부족한데다 하계(11월~3월)에 집중 강우하고 나머지 기간은 건기로 강우량이 170㎜ 정도여서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됐다. 게다가 “농장을 끼고 흐르는 살라도 강은 염기와 광물질이 함유돼 있고, 수원이 적어 관정 개발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익보다 생존 수단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사 참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물이 양적·질적으로 부족하고 반건조지역이므로 농작물 재배는 곤란하며 염분이 지면으로 올라와 농장 전체가 염분화될 우려가 있어 농업활동을 위한 벌목은 불가능하고, 삼림업과 목축업을 병행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보내 살찌우는 방식)만이 가능하다. 땅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발비용이 더 들어가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는 결론이다. 이 같은 땅을 수차례에 걸쳐 조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유지하기 위한 세금(연간 1만2,000달러)과 관리 비만 27년간 낭비해 온 셈이다. 마침 농림부·농촌진흥청·농업기반공사·한국농촌경제연구원으로 구성된 정부 농업조사단이 파견나와 있었다. 랴흐타마우카 땅의 조사를 담당했던 농업기반공사의 김동인 과장은 “예전에는 차가 진입할 도로조차 없을 정도로 사회간접자본이 전무했지만, 최근 폭 4m의 흙길이 30m로 확장됐고, 전신주가 세워져 일부에서는 전기도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보니 황무지로 여겨지던 북서부 지역을 개간해 알팔파 같은 목초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랴흐타마우카 인근에 생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땅의 지가가 대폭 상승하거나 개발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대사가 파견되고, 수차례의 조사를 했음에도 랴흐타마우카 땅이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돼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지 교민들은 이를 두고 “‘누가 역적이 되느냐’ 하는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랴흐타마우카 땅을 구입할 때 비해 턱없이 낮은 가격에 매각처분하거나 섣불리 막대한 비용이 드는 개발을 시도했다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역적’이 되는 위험 부담이 있어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내가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내 재임 기간에는 안 된다” 고 했다고 한다. 이 사례가 교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랴흐타마우카 땅은 ‘누가 역적이 되느냐’ 게임으로 불렸다. 지금도 현지 교민들 사이에서 이 땅은 ‘대사들에게는 골칫거리, 교민들에게는 웃음거리’로 통한다. 그는 “랴흐타마우카 땅이 경제성이 없다는 사실부터 빨리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경 취약 지구인 이 지역에 생태림을 조성해 ‘한국·아르헨티나 우호의 숲’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랴흐타마우카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될지는 최 대사와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출처] 머나먼 南美 황무지 우리 땅] “27年 골칫거리, 아직 웃음거리”|작성자 블루문 |
[출처] 아르헨티나의 한국 땅에 얽힌 사연.|작성자 잔다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