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2016년 7월 7일(목), 맑음, 한때 소나기, 시흥시 관곡지
시흥 관곡지의 연꽃이 유명하다기에 벼르고 벼르다 찾아갔다.
전철 타고 버스 타고 2시간 40분이나 걸렸다. 소낙비는 오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연꽃이 만개하기에는 약간 이른 감이 있었다. 관곡지 너른 연못에는 전문 사진작가 몇 분만
서성일 뿐이었다. 소낙비가 쏟아지자 연잎에는 사리가 구르고 연꽃들은 고개를 수그렸다.
무궁화, 강희맹의 사위 권만형(權曼衡) 종중 소유 관곡지 입구에서
관곡지 옆의 은휴정(恩休亭) 정자
관곡지 옆에서 관곡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다.
은휴정(恩休亭) 현판
월천 권경상(月泉 權卿相)의 글씨다.
정자에 휴(休)자를 쓰는 데는 사연이 깊다.
만족을 아는 삶은 지향한 문인들은 쉰다는 뜻의 휴(休) 자를 당호로 즐겨 사용했다.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는 재주를 헤아려 보아 부족하면 물러나야 하고, 분수를 헤아려 보아 넘
치면 물러나야 하고, 늙어서 정신이 혼미해지면 물러나야 한다며 삼휴정(三休亭)을 짓고 은
거했다.
황정견의 사휴정시서(四休亭詩序)는
“맛없는 차와 거친 밥을 먹고 배부르면 쉬고, 찢어진 옷으로 한기를 막아 따뜻하면 쉬고,
먹고사는 것이 편안하고 하는 일이 적당하면 쉬고, 탐내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면서 늘그막이
되면 쉰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있었다.
손순효(孫舜孝)의 칠휴정(七休亭), 윤관(尹寬)의 삼휴정이 그러한 예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1485~1541) 역시 자신의 정자
를 은휴정(恩休亭)이라 일컬었다. 임금의 은혜로 휴식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묵공옹 정언황(默拱翁 丁彦璜, 1597~1672)도 말년에는 원주에 내려가 은휴정
(恩休亭)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안대회, 이종묵, 정민, 『매일 읽는 우리 옛글』)
관곡지(官谷池),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이다
관곡지 안내판 내용이다.
관곡지는 조선 전기의 명신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강희맹
은 중앙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음에도 농업의 발전과 농민들의 삶에 깊이 관심을 갖고 연구
하였는데, 세조 9년(1463)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
아오는 길에 남경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 들러 당시까지 국내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연
꽃씨를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사위였던 권만형(權曼衡)의 가문에서 오늘날까지 소유․관리해오고 있는
데, 이는 조선 전기에는 재산에 대한 자녀의 균분 상속이 이루어졌고, 관곡지 일원의 토지가
강희맹의 딸에게 분재되어 사위 가문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희맹의 사위 권만형의 가문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는 가옥(일부)
담장 넘어 집 기둥에 붙여 놓은 주련을 살펴보았다.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尙夏, 1641∼1721)의 「반계정의 운에 차하다(次攀桂韻)」라는
시다.
閉戶深山送晩年 깊은 산에 문 닫고 만년을 보내면서
沈潛墳典意犂然 전적 속에 빠져 들어 뜻이 확고하다네
眞經業已硏精蘊 과거에 이미 진경의 묘리를 연구하였고
朱訓行當了大全 장차 주자의 가르침 대전을 마치려 하네
察己工夫幾處密 몸을 살피는 공부는 미세한 데 치밀하고
治心節度靜時先 마음 다스린 절도는 고요한 때 우선하네
期君日造高明域 바라건대 그대 날로 고명의 경지 나아가
千聖相傳庶不愆 전해 오는 성인의 도 어김없이 이어받소
강희맹이 가져온 연꽃을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의 작은 연못(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
에 처음 심었는데, 연꽃이 차츰 인근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3년 뒤인 세조 12
년(1466)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蓮城), 즉 ‘연꽃의 고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 옆의 논에 연을 심었다.
농민들이 해마다 이맘때면 연꽃축제를 벌이며 연꽃 농사를 짓는다.
‘관곡지’라고 하면 대개 여기를 말한다.
그런데 다 비슷비슷하여 어느 연꽃이 전당홍인 줄을 잘 모르겠다.
땅 모양은 일만 송이 연꽃 담은 소반 같고 地勢盤如萬朶蓮
게라도 전당강과 비교하지 않는다오 尋常魚蟹不論錢
살기는 안산이 가장 좋다 말하는데 生居最說安山好
더구나 다시 큰 풍년까지 들었음에랴 况復穰穰大有年
정조의 「밤에 안산(安山)의 아헌(衙軒)에 임어하다(夜御安山衙軒)」라는 시다. 조선시대
안산은 연성(蓮城)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1463년 강희맹(姜希孟)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
다가 연꽃 ‘전당홍(錢塘紅)’을 가지고 온 데서 비롯하였다.
관곡지 집 기둥에 붙여 놓은 주련이다.
권상하의 「강가에서 중을 만나 산길을 물어보다(江上逢僧問山路)」라는 시다.
日暮漁舟繫古藤 해 저물어 고깃배를 묵은 등나무에 매어두고
碧山歸路問孤僧 푸른 산 돌아갈 길을 외론 중에게 물었네
淸溪百道桃花浪 맑은 시내 수많은 복사꽃 물결 가운데
何處仙源是武陵 선원이라 어느 곳이 무릉 가는 길인지요
강희맹이 채취해 온 연꽃은 전당홍(錢塘紅)이라는 품종으로,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꽃의 끝부분은 담홍색을 띠는 아름다운 연꽃이었다.
수련 파비올라(Fabiola)
파비올라 수련 이름이 이 파비올라일까?
파비올라(Fabiola)는 4~5세기에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거해서 구호활동에 활약한 부인으로
서 성서의 라틴어 번역사업에 공헌한 제롬(340~420)이 남긴 서적에 남겨져 있는 3인의 여
성중의 한사람, 로마 부호의 여성으로 결혼에 실패해서 고행을 하며, 교회에 복종해서 속세
를 버렸다. 390년에 자택내에 의료원을 세워서 스스로 병자의 간호에 임했다.
성 제롬은 그녀는 부유한 로마인이 항상 이용하고 있던 간호 처치를 알고 있으며, 환자를 위
해서는 가능한 한 위안을 아낌없이 제공한 점과 그녀의 환자에 대한 상냥한 동정과 가장 기
피하는 병에 괴로워 하고 있는 자에 베푼 돌봄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교도가 세운 최초의 병원으로 되어 있다. 절세의 미녀라고 칭송받은 그녀의 면영은 헨넬에
의해서 그려진 초상화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기념우표 등에도 거론되고 있다.
(간호학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