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 납릉심문(納陵心門)ㅡ쌍어문양
2012년 7월 여름 답사 시작
답사코스: ㅡ주포 ㅡ망산도(유주비각)- 흥국사--장유사 -
해은사 ㅡ은하사ㅡ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구지봉ㅡ밀양 만어사 ㅡ지리산 칠불사
흥국사가 언제 창건됐는지 전해지는 역사는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706년
복원할 때 ' 무너진 담장 아래서 건강원년 (144년) 3월 이라고 새겨진 기와장이
발견되었는데, 건강원년은 수로왕 103년(144)이 되며 서역불교가 장유화상에 의해서 일찍이
이 땅에 전래된 것을 입증한다고 한다.하지만, 현재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수로왕은 명월사 인근에 행궁을 차리고 허황옥 일행을 기다린다.그리고 마침내,둘은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그 명월사가 오늘의 흥국사다 수로왕은 이후에 허황후와 첫날밤을 보낸 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망월산이라고 이름을 짓고 서기 144년에 자신을 위해 흥국사를, 왕후를
위해서는 진국사를, 세자를 위한 신국사등 세 원당으로 이루어진 명월사(明月寺)를 세웠으나
흥국사를 제외한 두 절은 지금은 기록에만 남아 있고 옛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인도 출신의 여인이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첫날 만나서 결혼했다
수로왕은 허황옥 일행이 도착하는 날짜를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 환영 사절단을 보내어 배에서 내리는 것을 안내한다
이것은 이미 약속된 결혼이었다
흥국사
.명월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광해군(1618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흥국사는 1942년에 중건한 것이다
대웅전
흥국사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명월산'이다
가야불교를 믿는 이들은 지명 연구, 언어학적 접근, 민속사 등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하려고 한다
극락전
극락전의 코브라 모양이 새겨진 돌조각
명월사 석탑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단 면석이 남아 있다.
사찰측은 이 시왕석이 가야의 유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펴낸
‘명월사지(현 흥국사) 현장조사 보고서’는 “석탑 기단 면석에 조각된 보살상 옆으로
천의(天衣)자락이 위로 날고 있는 모습으로 미뤄볼 때 9세기 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고 있다.이는 인도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이라는 사찰측의 주장을 부정하는 결과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명월사가 실재했다는 근거로도 인식된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00년 경주 숭복사지 사진작업 당시 찍은 숭복사 3층석탑이다
팔부신중
좌측 흰두교에 근원을 둔 뱀나라의 왕 머후라상
흥국사 시왕석도 경주 숭복사 삼층석탑처럼 면석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면 9세기 대라면 통일신라말로 이 시기 석탑의 특징은
불교가 점차 나약해지면서 외부치장으로 화려하게 꾸미려는 보상심리로
경주원원사지 동서탑이나 ㅡ구례 화엄사 서오층탑 ㅡ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등
탑 주위에 십이지신상과 사찬왕상 팔부신중등이 조각되는데 ...시왕석의 부처상 양옆에 코브라
모양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면 팔부신중 중 흰두교에 근원을 둔 뱀나라의 왕 머후라상으로 주로
머리에 뱀 모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나고, 조각상일 경우에는 한손에 뱀을 잡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
허왕후와 함께 도래해 불법을 전했다는 장유화상은 1706년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문'에 처음
나타난다.명월사 사적비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명월사는 가락국 건국 초기에
건립되었으며,우리나라 불교의 기원이 가락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 후대의 설화로, 이른 시기의 가야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짓기는 어렵다
명월사 사적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가야의 불교가 해양을 통해 전래됐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통일신라 후기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김유신 집안(김해김씨)이 가계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전승설화와 기록에서 사실을 다소 과장해 허왕후의 도래와 불교 전래를 강조했을 개연성이
높다"는게 일부 학계의 주장이다
명월사 사적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수로왕 신화의 초기 단계를 거쳐 이것이 가야 왕실 가계의 기록으로
정착되는 가락국의 어느 왕 시기를 또 다시 거쳐서 신라 말 ㅡ고려 초 옛 가야세력의 부흥기에
김해의 호족이었던 김인광, 소율희 등에 의한 수로왕 신화의 확대발전 단계에서 ㅡ 고려 25대
충렬왕대의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 편집해 넣은 시기까지 무려 천여 년간의 기간이
흘렀으며 그 간의 기록자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성격에 따라 각각 관점의 차이를 갖고
이 설화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
1956년 명월사 터에 가락국의 고찰 흥국사를 중건하면서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왕후를 맞이한 유서 깊은 곳임을 알리기 위하여 세웠다.
1956년 흥국사가 중건되면서 김해 김씨 녹산종친회에서 발기하여 비를 세웠다.
김해 김씨 종친회 숭선전 참봉 김재익이 시주를 맡아서 건립하였다
명월사 사적비
이 사적비는 숙종(1708년) 승려 증원이 세운 것이다
명월사 사적비에 가락국의 수로왕과 왕비인 허황후의 만남을 기록한 비이다.
장유화상의 활자 기록은 18세기에 등장한다. 이 비에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을 가지고 오자
왕이 불도를 중히 여기고 부처를 받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후략)"
1983년 1월에는 금동여래입상 1구가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현재 흥국사 경내를 제외한 주변 지역은 모두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지표에는
초석으로 생각되는 많은 돌들이 그대로 방치되는 등 계속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기는 글>
실제로 남방 불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옛 가야 지역에는 명월사 외에도
신어산 은하사·ㅡ불모산 장유암·ㅡ삼랑진 만어사·ㅡ하동 칠불암 등 여러 사찰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후대의 설화로,이른 시기의 가야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짓기는 어렵다
따라서 김해 명월사 사적비의 기록과 출토 유물을 근거로 남방 불교의 전래와 가락국과
인도 아유타국의 문화 교류를 연결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자료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코스 장유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