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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③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눅 4;18-19. / 강문호 목사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을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의 첫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가난 복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복음은 포로된 자에게 포로 복음을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가난 복음, 포로 복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눈먼자에게 보게 하는 복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300만명 시각장애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시각 장애인은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 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인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지 못 하는 영적 시각 장애인이 득실거리는 세상입니다. 성막 쎄미나 256번 하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성막 쎄미나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나라 육해공군 군목 전체 쎄미나가 인상깊었습니다. 쏘련어로 내 성막 책을 다 번역 출간한 기념 쎄미나도 잊을 수 없습니다. 5천명이 4일 간 모인 열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남아 선교사님들이 다 모여 인도네시아 말랑에서 가졌던 쎄미나도 특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쎄미나도 잊을 수 없는 쎄미나였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목사들이 56명이었습니다. 돌보아 줄 분들이 있어야 하기에 보호자 한 명씩 붙어 있었습니다. 회장 김택수 목사님이 설교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을 때에는 불편하여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니 자존심상하여서 힘들어요.” 이들은 눈은 멀었지만 그 동안 성막쎄미나를 열면서 가장 성실한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과서를 볼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이 점자책을 만들었습니다. 46배판 교과서 400 페이지를 모두 점자로 찍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교과서 한 권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그 책을 다 읽고 쎄미나에 참석하였습니다. 내가 강의할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에 토론만 하여도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눈은 멀었지만 눈뜬 분들 보다 더 밝게 알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마지막 번개”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동안 내가 출판한 책중에 가장 두꺼운 책입니다. 46배판 460페이지입니다. 5번 교정을 보고 출판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이 그리고 그렇게 자세히 보았습니다. 사실 교정은 한 페이지 교정이 5천원입니다. 틀린 글자 찾아 주는 비용이 200만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판하고 보닌 이 지환 집사님이 75 군데 틀린 곳을 찾아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또 찾아 주어 지금까지 100 곳 이상에 틀린 글자가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뜨고 있으니 보지 못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온통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것같습니다. 1. 그늘진 이들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늘진 곳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아주 가난한 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먹지 못 하고 입지 못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엉망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홑바지를 입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옆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아이들이 야단이었습니다. “엄마! 우리도 고기 먹고 싶다.”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래. 엄마가 베 한 필을 짜서 팔아서 고기 사줄 께.” 그리고 아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고기 한번 먹게 하여 주려고 기를 쓰고 베를 짰습니다. 며칠 걸렸습니다. 죽을 힘을 다 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파서 시장에 팔러 갈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팔아서 고기를 사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꿈에 부풀어 기다렸습니다. 고기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안을 들락날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졌는 데도 남편은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 손을 붙들고 시장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남편이 장터에 앉아서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온 종일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시각장애인입니다.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를 보며 배울 것을 배워 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이었습니다. 높고 부자였습니다. 그늘진 곳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리브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동안 율법을 어기고 토색한 것을 스스로 말했습니다.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갑자기 삭개오는 그늘진 곳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안 보이는 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하여 눈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이나 여리고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는 데 동안 율법을 어기 긁어 모은 재산의 반을 율법에 준하여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주님에게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나는 눈이 멀지 않았다고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눈뜬 시각장애인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입니다. 최원만 시인이 쓴 <가난한 마음>이라는 시입니다. 출렁이는 바다보다 잔잔한 호수이고 싶다. 넘치는 강물보다 내 마음 골짜기 샘물이고 싶다. 요란스러운 나팔소리보다 세미한 풀벌레 소리이고 싶다. 궁궐안 조화보다 초토에 피어나는 들꽃이고 싶다. 높디 높은 바벨탑이기보다 냇물 흐르는 언덕위 초가 집이고 싶다. 조용히 사랑하며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린 시입니다. 그늘진 곳을 보지 못 하는 시각장애인 삭개오의 눈을 예수님은 뜨게 하여 주셨습니다. 2. 복음이 안 보이는 시각 장애인 눈을 뜨고 있는 데 복음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모든 인간의 죄의 노예입니다. 그래서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보여야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 최고의 복음의 사람 바울도 처음에는 복음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복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안 보이니까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마서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오의 빛보다 강한 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바울은 놀라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은 눈에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복음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영적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복음이 보이지 않던 여인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고 계셨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가실 때 목이 마르셨습니다. 마침 수가성에 우물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몰을 길어 올릴 두레박이 없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우물가에서 물 이야기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던 예수님은 남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인들에게 최고 관심사는 남편이었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 여인의 눈이 떠졌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물을 길러 왔던 육적인 여인이 영적 여인으로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인이 고백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드디어 이 여인은 복음을 보고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8-29) 예수님은 이 땅에 눈먼자의 눈을 열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영적인 눈입니다. 복을 보는 눈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났습니다. 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한 명이 생겼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기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까?” 이 말을 들은 토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엽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벌레 한 마리를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시뻘겋게 불타고 있을 때 그 토인은 벌레를 꺼내 살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지옥불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마다 복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인가요? 복음의 눈을 열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오히려 복음이 보이지 않도록 사탄은 자꾸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는 복음이 아닌 사상으로 염색되어 있습니다. 홀린세이는 <악령의 세계>라는 책을 썼습니다. 복음을 파괴하는 6가지 사상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를 <사상 폭탄>이라고 말했습니다. 1. 칸트의 철학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고 정반합의 과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2. 헤겔의 사상입니다. 헤겔의 철학은 칼맑스에게 영향을 주어 공산주의를 만들어냈습니다. 3. 킬케콜의 실존주의입니다. 칸트와 헤겔을 신학에 섞어 버린 비복음적인 사상입니다. 4. 칼맑스의 유토피아 사상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입니다. 5. 찰스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근본적으로 배격하는 사상입니다. 철저히 비성서적인 이론입니다. 6.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입니다. 인간을 성에서 시작하여 성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철저히 성적인 학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걷어내야 복음의 눈이 열립니다. 영적 싸움이 치열한 세상입니다.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3. 하늘 나라가 안 보이는 부자. 눈은 떴으나 이 땅만 보이고 하늘 나라가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이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시각장애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소출이 많고 곡식이 풍부하였습니다. 미처 쌓아 둘 곳이 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 중얼거림을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늘 나라가 보이지 않는 영적 시각장애인이 지구상에서는 즐비합니다.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하는 이들이기에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구원시켜야 합니다. 1961년 쏘련은 지구 역사상 첫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였습니다. 그 우주선에 탄 첫 우주인은 가가린이었습니다. 그는 첫 번 우주에 올라가 지구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지구가 잘 보인다. 아름답다. 기분이 좋다. 지구는 푸른 색이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첫 번 보고 한 이 말때문에는 가가린은 지구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주 역사상 첫 우주인을 뽑는 시험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19명이 남았습니다. 19명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였습니다. 한 명만 필요하였습니다. 누구도 19명중에 누구를 뽑을지 몰랐습니다. 마지막 시험은 우주선에 탑승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모두 신을 신고 우주선에 올랐습니다. 그 때 가가린 하나만 신을 벗고 우주선에 올랐습니다. 이것에 심사 위원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작은 차이 하나로 가가린이 뽑힌 것입니다. 그가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 왔을 때 당시 쏘련 대통령 후리시쵸프가 환영하며 물었습니다. “우주에서 하나님을 보았는가?” 가가린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줄 알았습니다. 맛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먹어 보며 혀로 보아야 압니다. 차고 뜨거운 것은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보아야 합니다. 음악이 좋은 지 나쁜지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입니다. 먹어 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만져 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들어 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느껴 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보이지 않는 영적 시각장애인이 많습니다. 어느 평범한 여인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서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며 팔다가 너무 힘들어서 길거리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공하였습니다. 다 장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살았습니다. 자식들이 졸랐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아파트로 이사 가시지요. 아니면 단독 주택으로 옮겨 가시게 해 드릴게요.”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나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라. 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을 반드시 유리로 깔고, 기둥도 멋지게 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 밑바닥은 반드시 보석을 박아야 한다. 그런데 그 보석의 색깔이 다 달라야 한다. 그리고 문은 12개 만들어야 한다.” 자식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농담하지 마세요.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만 둬라. 나는 그런 집을 하늘 나라에 갖고 있다.” 그리고 소박한 삶을 불편하게 살면서 아직도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교회를 받들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사는 여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하늘 나라가 보이지 않는 것도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보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눈먼자를 뜨게 하셨습니다. 4. 할 일에 눈 먼자 그런데 눈을 떴으나 시각장애인이 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필요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나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여기에 오늘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 수입니다. 눈은 떴으나 시각장애인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그 때 아니고 지금 태어나게 하셨을 까? 하나님이 왜 나를 그 곳이 아니고 이 곳에서 살게 하실까? 하나님이 왜 수많은 교회중에 갈보리 교회로 부르셨을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직분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왜 나를 목사로 만드셨을까?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신 것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니느웨를 회개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사명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사명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풍랑으로 고래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고래도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고래는 요나를 니느웨에 토하여 놓았습니다. 요나는 그 곳에서 자기 사명을 보았습니다. 억지로 하루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니느웨 전채가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요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가 살았습니다. 1960년 인도의 빈민굴 칼타코에 마더 테레사가 들어 갈 때 그는 빈 손으로 들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처참한 지옥을 그대로 떼어다 놓은 것같았습니다. 굶어 뼈가 나온 채 쓰러지고, 병들어 죽어가고, 도둑과 강도가 백주에 난무하며, 창녀가 거리거리 득실거리는 혼돈과 무질서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그 곳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곳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혁하리라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 수녀는 죽을 둥 살 둥 일하였습니다. 문맹자를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7,500명을 가르쳤습니다. 진료소를 세워서 96만명의 환자를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54개의 나병 치료소를 만들어서 47,000명의 문둥병자를 돌보았습니다. 20개의 고아원을 세워 1,600명의 고아를 길렀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3,400명을 23개의 숙소를 지어서 돌보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30년간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이 일에 필요한 돈은 그 때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신문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수십명의 남자들도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나는 하루에 4시간 기도하며 성령께 의지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한 일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으로 보내신 뜻을 보는 이가 시각장애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명에 눈먼자의 눈을 열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사명의 눈을 떴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갈릴리에서 근근히 고기 잡아 먹던 어부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는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 자기의 존재 목적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아가야 파트리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아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할 일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그리고 재산의 반은 토색한 자에게 보상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사명의 눈을 떴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값진 생명,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생명을 낭비하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은 남다른 길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중앙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매우 호전적이고 사나운 원주민들에 둘러 쌓여서 아프리카 선교 16년중 가장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오늘 밤 어두울 때에 이 곳을 빠져 나가야 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요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그 날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나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럽다. 나는 이 넓은 지역에 대하여, 그리고 내일이면 나의 목숨을 빼앗을 지도 모를 저 많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그 분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 그 분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땅끝까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능력있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 분이 나를 이 곳에 보내셨을 때에는 분명히 무슨 목적이 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오늘 밤 이 곳을 빠져나가 살려던 계획을 포기한다. 나와 같은 상황에 빠진 사람은 모두 도망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로 나는 오늘 밤 하늘의 달과 별을 관찰하며 여기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설령 이것이 마지막 밤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평온하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서 전도하였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눈을 뜨게 하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나요? 예수님은 스스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은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시 보게 됩니다. 성도여러분도 영적인 눈을 뜨시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