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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 참된 신심이란
“참된 신심은 사랑과 애덕에서 피어나는 불꽃”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 젊은이가 찾아왔어요. 주위에서 한 신심 단체를 소개받고 들어갔는데, 선배들의 가르침이 의무와 책임처럼 느껴져 힘들었답니다. 지금은 ‘신심’이란 말만 들어도 답답하고 거부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그 젊은이가 성인께서 말씀하신 ‘신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는 않아도 거부감만이라도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성인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면서 반갑고 기쁘면서도 솔직히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오히려 더 거리를 두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신심은 어떤 행위 자체가 아닌 사랑으로 드러나는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깐 신심의 어떤 행위도 일상에서의 가정이나 이웃에게 평화를 깨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착한 그리스도인과 좋은 사람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거겠죠. 그런데요.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실 때론 잘 살지 못하지만, 기도라도 열심히 하면 나 자신에게 만족스럽고 위로가 돼요. 반면에 기도는 잘 못해도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면 은근히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자부심도 생기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신심’은 그 어떤 기도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는 건데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애덕의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도 자주 일상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참된 신심을 사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 아닌가요? 저를 찾아온 젊은이나 수도자인 저 역시 신심을 제대로 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관적인가요? 성인의 답이 벌써 궁금해집니다. 오늘도 굿바이 미소를 보내드리며 다음 편지 손꼽아 기다릴게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사랑하는 김 수녀 올림
사랑하는 김 수녀에게
김 수녀의 진심이 담긴 솔직한 편지 고마워요. 완벽한 사람만이 참된 신심을 살 수 있냐고요? 신심은 사랑과 애덕에서 피어나는 불꽃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적인 불이고, 신심은 여기에서 타오르는 불꽃이기에 그 어떤 것도 분리할 수는 없어요. 당연히 완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완벽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데요. 안심하세요. 다행히도 우린 이승에서 사랑을 시작하지만 결국 저세상에 가서야 그 사랑이 완성되지요. 우린 그저 시작하기만 하면 돼요. 새벽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지 않듯 시간이 필요해요. 무언가 잘 안 되는 거 같고, 신앙인으로서 수도자로서 잘살지 못하는 것 같아도 서서히 날은 밝아옵니다. 가다가 넘어지고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용기를 내고 절대 포기하지는 말아요.
사람들이 날 온유의 성인, 혹은 친절한 신사라고 말해요.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상황에 그런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느냐’며 따지기도 해요. 그런데 난 본래부터 부드럽고 온유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괴팍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이 거친 성격을 다듬고 극복하는 데 20여 년이 걸렸어요.
벌이 한 숟가락의 꿀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움직여야 하는지 아세요? 꿀벌 한 마리가 하루에 찾아가는 꽃은 최대 3000개, 꿀주머니 가득 채우려면 보통 1000개 이상 방문해야 한다고 해요. 상상이 되나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모은 꿀을 우린 한순간 홀딱 먹어치우잖아요. 마찬가지로 20여 년간 나의 완고하고 괴팍한 성격을 엄청난 노력으로 친절과 온유로 변화해 왔는데, 한순간에 화난다고 인내하지 못하면 얼마나 허망하겠어요.
물론 왜 유혹이 없었겠어요? 고백하자면 나의 이 괴팍한 성격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기도 했어요. 젊은 사제였을 때 샤블레 지방의 칼뱅파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에 열정적으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때 잠시 공권력을 이용하는 데 동참해서 선교한 적이 있어요. 전 그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며 결심했어요. 절대로 강요나 힘이 아닌 사랑과 온유함으로(all by love, nothing by force) 듣고 말하겠노라고.
마지막으로 ‘신심’ 하면 답답하다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도 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석을 꿀에 담그면 보석의 특성에 따라 광채가 더 밝게 빛난다고 했어요. 우리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존재이지요. 그런 우리를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 신심이란 것,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는 복음 선포자입니다
신앙 감각
우리는 가끔 복음 선포의 사명은 성직자와 수도자와 소수의 열정적인 신앙인들만 수행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 따라서 복음화 계획은 전문가들이나 수행하는 것이고 나머지 신자들은 그저 수동적인 수용자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모든 신앙인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자이고 또 복음 선포자여야 합니다. 신앙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합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은 모두가 복음 선포자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작용하여 복음화를 재촉합니다”(‘복음의 기쁨’, 119항).
신앙인은 세례 안에서 일종의 초자연적 영적 본능을 받게 됩니다. 이 영적 본능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적 본능은 신앙인들이 예언자적 소명을 수행하고 완수하도록 해 줍니다. 이 초자연적 영적 본능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라 불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자들 전체에게 신앙의 본능, 곧 신앙 감각을 심어 주시어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 주십니다”(119항). 이 신앙 감각은 신앙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며 선포할 수 있는 능동적인 능력입니다(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45항).
물론 신앙 감각은 교도권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교도권과의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세례 안에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 본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신앙인 모두에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또한 동시에 신앙인의 복음화 사명 수행에 대한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복음화 활동을 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분명히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대중 신심
신앙인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고백하고 증거합니다. 신앙인들의 신앙 수행 방식은 다양하고 다채롭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각 부분은 하느님의 은사를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풍요롭게 합니다”(‘복음의 기쁨’, 122항). 솔직히 말하면,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신학의 관점에서 일반 신자들의 신앙 수행 방식은 ‘대중 신심’이라는 이름으로 살짝 폄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대중 신심의 건강한 측면과 기능을 강조합니다.
“대중 신심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인 선교 활동의 참다운 표현입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 실재와 관련되고 성령께서 그 주역이십니다”(‘복음의 기쁨’, 122항). “대중 신심은 그 내용을 두서없는 추론보다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대중 신심은 신앙 활동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credere Deum)보다 하느님을 믿는 것(credere in Deum)에 더 역점을 둡니다”(124항). 즉, 대중 신심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믿음의 행위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앙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대중 신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경 구절은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의 눈길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거룩한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위들을 거룩한 것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인 추구의 표현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을 향한 삶의 표현입니다”(125항).
인격을 통한 복음 선포
삶의 모든 자리가 복음화의 현장입니다. 일상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는 “거리나 광장에서, 일할 때나 여행할 때와 같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127항).
복음 선포는 인격적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복음 선포의 내용은 단순히 교리적 명제와 신학적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인격적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즉, 복음 선포의 핵심 메시지는 “곧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고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당신의 구원과 우정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입니다”(128항). 복음화의 내용은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이며, 복음화의 방식은 인격적 대화와 태도로 이루어집니다. 복음화는 강요와 억압의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대화와 초대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 메시지가 정해진 일정한 양식을 따르거나, 절대 불변의 내용을 표현하는 특정한 말을 통하여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달은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모든 방법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129항). 복음 선포는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몸짓과 표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앙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해외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포할 수 있는 초자연적 본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교회와의 일치 안에서,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또 선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사람들과 대화하며 인격적 방식으로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은 말로서 전달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전수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여야 합니다.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죄인처럼
미사도 매일 참례하시고 봉사도 열심히 하시는데 늘 자기는 죄인이라고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이 겸손해 보이고 성인이란 말을 들을 자격을 가진 분이 아닌가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감정이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열심히 하면서도 죄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소위 부정적 자기개념을 가진 분들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고 저평가하는 것을 부정적 자기개념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가진 분들은 얼핏 겸손해보이나 사실은 심리적으로 우울하고 불안한 분들이라서 선뜻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본성을 과소평가해온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단세포 생물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서슴지 않고 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들이라고 교리에서 가르칩니다. 심지어 어떤 성가에서는 벌레만도 못한 운운하면서 자신을 극도로 비하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란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더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벗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반대하는 소리들은 선에서 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건강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꼰대유머 하나 전합니다. 열심한 수도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고 일 년 열두 달 늘 고행하는 자세로 사는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강론 때마다 신자들에게 세상에 살면서 죄 짓고 사는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야단을 치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라고 고함을 쳐서 신자들은 그 앞에만 가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수도자는 본척만척하시고 어디론가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급한 수도자가 외쳤습니다. “주님 저를 안 보시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수도자를 보시곤 “너로구나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 아버지’를 외쳐대고 일 년 내내 거지같이 입고 다녀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잔정머리 없는 계부로 만든 놈이 너로구나!” 하시고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두들겨 패셨다는 이야기.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3. 성인처럼 온유의 덕을 살려면
“온유의 덕, 온유함 실천으로 배우고 쌓기를”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성인의 시대와 달리, 요즘 저희 세상은 짧고 빠른 문자 메시지에 익숙해서인지 아직은 편지글이 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편지로 독자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세 번째 펜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 이곳은 여름 불볕더위로 마음의 습도도 높아지고, 저의 감정도 꿉꿉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온유와 애덕의 박사님이신 성인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마음 관리를 하셨을까요? 지난 편지에서 성인의 성격은 본래 괴팍하셨다고 하셨지요. 그런데요. 도대체 어떤 노력을 하셨기에 주변 사람들은 성인께서 화를 내시거나 불친절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할까요?
게다가 성인을 이르길 온유함으로 옷을 입고 사시는 분이라고 했어요.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친절하셨다고요. 크고 작은 일에서나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늘 부드럽고 온화하게 사람들을 대하셨다고 했지요.
성인께서는 20여 년간 노력을 해오셨다고 했는데요. 저 역시 수도 생활 30년이 넘어가도록 수없이 성찰하고 결심하면서 노력했지만, 여전히 저는 화가 나면 저의 얼굴과 말투에 다 드러나서 부끄럽고 속상할 때가 있답니다. 저와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성인처럼 온유의 덕을 살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벌써 성인의 다음 편지가 기다려집니다. 오늘도 미소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성인의 온유함을 닮고 싶은 김 수녀 드림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더운 날씨에 다들 고생이 많겠군요. 덥고 습하면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예민해지지요. 그렇다고 작은 짜증이라도 내면 주변까지 소란스럽게 번져가겠지요. 마치 뱀이 작은 구멍에 머리만 들이밀면 온몸이 빠져나가듯 우리의 분노도 그렇지 않나요? 분노는 몸 안에서 뱀의 독만큼 강한 독성을 만들어내기도 하잖아요. 이럴 때 마음속 감정을 신속하게 안정시켰으면 해요.
어떻게 하냐고요? 구체적인 방법이요? 글쎄요. 노여움을 온화함으로 이기라는 말이 있는데요. 한마디로 온유함으로 온유함을 배울 수 있어요. 방법이 너무 간단하다고요? 설마 마법의 공식을 묻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깐 순간 기억나는 친구가 있네요. 장 피에르 카뮈(Jean-Pierre Camus 작가, 주교)가 나에게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요. 그때 난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했지요. 그 친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더라고요. “내가 물은 것은 완전함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닌 방법을 묻고 있어요.”
그때 난 또 뭐라고 했을까요? 사랑만이 완전함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지요. 그는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느냐고요?” 나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라고요.
그리고 난 카뮈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당신은 말을 어떻게 배웠습니까? 말을 하면서 배우지 않았나요? 달리기는요? 달리기하면서 배웠겠지요.”
김 수녀에게도 물을게요. 운전을 어떻게 배웠어요? 운전하면서 배우지 않았나요? 공부는요? 공부하면서 습득했겠지요. 온유함도 온유함으로 배웁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나에게 온유라는 덕을 실천하기 위해 매일 하는 결심이 있어요. “난 어떤 사람을 만나도 결코 그들이 무시당하거나 모멸감을 느끼지 않게 할 것입니다. 나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오만하든 냉정하든 사납고 교묘하든 그 누구도 절대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비웃거나 빈정대는 마음을 가지지도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들을 존중하며 잘 듣고 적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심으로 매일 기도해요. 아주 간절하게요. 신심은 사랑의 행위이며, 이 사랑은 온유함으로 드러나요. 수많은 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덕행이며 사랑의 꽃은 단연코 온유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 여러분! 온유함으로 온유함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다음 편지 기다릴게요.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선배 신앙인들은 믿음은 한 치의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경우를 들곤 합니다.
물론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는 분란으로 인해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기에는 심리적으로 하자가 많습니다. 즉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심리적 구조를 가진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토마스 사도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질책을 하신 것인가? 토마스 사도는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을 목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상 불신감이 강해서 교정해 주시고자 야단을 치신 것이지 온전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가 갖는 의심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께서는 “신앙인은 의심을 가지고 믿는 자와 의심으로 인해 믿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인간의 한계성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또 마더 데레사 성녀도 당신의 일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심의 반복이었다”라고 고백하신바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의심은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종교인은 “의심은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이다”라고 말해서 의심에 시달리는 신자들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심이 의심 자체로 끝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이란 물음을 의미하고 물음은 더 공부할 것을 촉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즉 의심은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촉진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없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심 없이 믿기만 한다면 유아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며 자아가 성장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구도자들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에 늘 주님께 물음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 사회는 흐르는 물처럼 되어갑니다.
그러나 물음 없이 복종하고 맹목적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공동체는 고인물처럼 되어버려서 경직된 도덕관으로 인해 융통성 없는 조직으로 변질되고 퇴행해버리고 맙니다. 더욱이 그 개인은 내사(內事)라는 심리적 독성이 생겨서 평생을 심리적인 노예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의심과 물음은 내적성장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는 것이니 믿음이 약하다고 의심을 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수난 중에 아버지를 부르면서 어찌하여 당신을 버리시느냐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4. 두 개의 마음
‘내로남불’ 두 마음 어떻게 화해하며 살 수 있나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내로남불’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참 듣기도 거북한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저 역시 나에겐 관대하게 타인에겐 엄격하게 두 개의 잣대가 작동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과속을 하면 ‘성질 급하구먼’ 하고, 제가 과속을 하면 ‘너무 바빠서’라고 합니다. 누군가 화를 내면 ‘그것도 못 참나’ 하는데 제가 화를 내면 ‘오죽하면’이라고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는 못해도 이웃의 처지에서 이해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인께서는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타인에게 정말로 관대하게 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나요? 그렇기에 나에게는 친절하고 타인에게는 완고한 두 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나 봅니다. 어떻게 하면 저의 이 두 개의 마음이 서로 화해하면서 성인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은 김 수녀 드림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무더위에 잘 지내시나요? 내로남불, 한마디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그런 뜻일까요? 한국에만 있는 말 같은데요.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가 자신에게 너그러운 그런 인간의 두 마음을 의미하겠지요. 어쩌면 그저 인간의 본성이려니 하겠지만, 자칫 악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기에 마음 돌봄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멈춰 생각해볼까요?
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끼리 실랑이가 벌어졌어요. 왜 그럴까요? 파는 사람은 비싸게, 사는 사람은 싸게 사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둘의 처지가 바뀌었어요. 그러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때의 처지를 잊고 팔던 사람이 사려고 할 때 싸게 사려고 하고, 사던 사람이 팔려고 할 때는 비싸게 팔려고 하겠지요. 같은 사람이지만 처지에 따라 잣대가 달라진 것인데요. 이때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평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의 작은 결점이 아주 크게 보여 비난하게 돼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나의 잘못은 작게 보고 변명하기에 급급하고요. 다른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원칙을 들이대고 따지면서 자신에게는 자비와 동정을 베풀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겠지요. 나라면 이 상황에 어떠했을까요?
또 이런 사람도 있어요. 다른 사람의 거친 발언에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자신의 과격한 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해해주길 바라요. 다른 사람이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불쾌한 내색을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 요구하면 귀찮아하면서 화까지 낼 때도 있고요. 때론 나와 친한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너그럽게 넘어가다가 평소 못마땅한 사람의 작은 실수에는 책망하기도 해요. 나라면 정말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요?
또한, 자신의 권리는 강하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양보해주길 바라요. 자신은 오만하게 행동하면서 겸손하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남에게는 쉽게 불만을 터뜨리지만, 자신은 어떤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해준 일은 대단한 것처럼 여기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호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야박하고 그를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해요. 자기 자신에게는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과연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두 마음이라는 것은 받을 때는 무게가 많이 나가게 하는 저울추를, 그리고 줄 때는 무게가 적게 나가게 하는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을 우리 하느님께서는 매우 싫어하십니다.
김 수녀와 독자 여러분, 공평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물건을 살 때는 파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고, 팔 때는 사는 사람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푼 적이 있는지 자주 성찰하세요.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의 마음에 한 분이신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사시길(Live Jesus!)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3) 인간 창조(하느님 사랑의 결정체)
■ 성경 구절 : 창세 1,24-31 천지창조 엿샛날
■ 청할 은총 :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기도 요점 :
1.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라고 하십니다. 왜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에는 인간만을 보시고는 좋았다는 말씀을 안 하시고 ‘모든 것이 좋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로서 지속적인 창조 과정에 있으며,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존재임이 아닐까요?
2. 하느님께서 무엇을 위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지 숙고해 보면서, 특히 ‘나’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에 머뭅니다. 나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창조된 사실을 더욱 깊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찰해봅니다. 외적인 모습의 닮음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닮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3.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데 무엇을 닮은 존재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닮은 존재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의 사랑을 하면서 닮아가고 있는가를 숙고해봅니다. 사랑의 수준에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내 방법대로 사랑하는 수준’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은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와 사랑을 해 줄 수밖에 없는 사랑의 수준’도 있습니다. 이 사랑을 넘어서면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수준’이 있는데 우리는 어느 수준의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고찰해봅니다.
4.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도록’(영신수련 23번) 하셨는데 나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공경과 봉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반성해보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찰해 봅니다.
5. 창조의 은혜를 창조물이라는 선물을 주신 그 선물의 은혜만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이 창조의 은혜임을 숙고해봅니다. 창조물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느님 마음(사랑)’이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을 찾아야 함을 의미하며, 이 내면적인 창조의 은혜를 숙고해봅니다.
6. 우주의 나이를 138억 년이라고 하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창조하고 계신 하느님은 ‘나’를 귀중한 존재로서 여기시고, 계속해서 ‘이 귀중한 존재(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봅니다.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4)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 성경 구절: 루카 11, 9-13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 청할 은총: 내가 원하는 것을 넘어 원해야 할 것을 원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 기도 요점:
1. 예수님께서는 왜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청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문을 두드리지도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나 중심적이었는지 아니면 타인 중심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이었는지를 살펴봅니다.
2. 나 중심적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었다면 그것을 하느님 중심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은 원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원의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하느님 중심적인 것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일까?’를 숙고해봅니다.
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일까요? 하느님 안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고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은 우리 생각임을 알게 되고 그분께서는 이미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원의를 다 알고 계셔서(마태 6,8)주시고 계셨고 두드리기도 전에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음을 알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하여 고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4.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성령께서 우리의 원의를 알고 들어주시는데, ‘우리는 왜 청하려고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무언가를 가짐으로써 내 마음대로 부리고 싶은 내 중심적인 생각이 너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성찰해봅니다. 결국, 우리가 가지려는 건강, 부귀, 장수, 명예 등도 그것을 가짐으로써 나 중심적인 생각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숙고해봅니다.
5. 가진 것으로 ‘내 마음대로 하려는 자유’가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맡겨드림의 자유’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맡긴다면, ‘하느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나는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얻었음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내가 문을 두드릴 때 ‘닫혀 있기’ 때문에 열려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이미 열려져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두드리고 있는가를 숙고해봅니다.
7.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11절)는 말씀 속에 ‘원하고 있는 좋은 것’을 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의 말씀 속에는 ‘원해야 할 것’까지도 알아서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