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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불교의 ‘卽今’ 담론은 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가― 선어록의 수사학, 깨달음의 인정욕망, 그리고 지행합일의 문제
요즘 한국불교의 선법문을 읽다 보면 자주 만나는 말들이 있다.
“바로 지금, 무엇이 부족한가.”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하다.”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생각을 막지 말고, 사라진 생각을 좇지도 말라.”
“찾지 말라.”
“얻으려 하지 말라.”
"이것 밖에 없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부분 선종의 오래된 언어에서 유래한다. 당송시대 선사들의 법문을 연상시키는 압축된 문장과 역설, 한문투의 리듬에 현대적인 한글을 결합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아름답다. 짧고 명료하며, 선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 있다.
최근 일진선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卽今 바로 지금」이라는 법문도 그러하다.
“莫添一物 卽今是.”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바로 지금, 이것이면 된다.”
“念起不遮 念滅不追.”
“생각이 일어나면 막지 않고, 생각이 사라지면 좇지 않는다.”
“無所求處 道自現.”
“구하는 바가 없는 곳에 길은 저절로 드러난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끝난다.
“卽今 此足矣.”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러한 문장은 분명 선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과연 오늘날의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
1. 선어록의 문체를 재현한다고 선의 생명력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당송시대 선어록은 매우 독특한 수사학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
“모른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다.”
때로는 방망이가 날아오고, 할이 터지고, 침묵이 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것들이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실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조주가 제자에게 무를 말하고, 임제가 학인을 후려치고, 덕산이 방망이를 들었던 것은 ‘선어록풍의 멋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말과 행동에는 수행자의 삶 전체가 걸려 있었다.
따라서 당송의 선어록에서 문체만 떼어내어 오늘날 한글로 다시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 당송 선의 생명력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선의 본질은 문체가 아니라 사건성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블로그에서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라고 쓰는 것과, 실제로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과 명예욕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2. ‘卽今’은 현대인의 언어가 되었지만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현대 명상문화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 현재.
여기와 지금. 있는 그대로.
놓아라. 내려놓아라.
생각을 흘려보내라.
이제 이러한 표현들은 불교적 언어라기보다 하나의 명상문화의 상투어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라는 말은 선 수행자에게는 익숙하고 아름답지만, 불교에 별 관심이 없는 현대인에게는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가 묻는다.
“저는 취업이 안 되어 불안한데요?”
다시 말한다.
“생각을 막지 마십시오.”
그가 묻는다.
“그런데 계속 불안합니다.”
다시 말한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결국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현대인의 삶을 관통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현재에 머물라’는 추상적인 명제로 환원해버리는 순간,
불교는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힘을 잃는다.
3. 현대인은 ‘현재를 살지 못해서’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청년은 왜 취업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왜 친구보다 연봉이 낮으면 자존심이 상하는가?
왜 SNS에서 타인의 화려한 삶을 보면 자신의 삶이 초라해지는가?
왜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축하하기보다 질투하는가?
왜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가?
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휴식조차 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하는가?
왜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불교가 깊이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이다.
애착, 갈애, 취착, 아상, 비교, 무명, 모방욕망.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말 하나로 덮어버리면 불교는 지나치게 가벼워진다.
현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문제를 명상적인 언어로 희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4. 여기에서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라르의 통찰은 현대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데도 상당히 유용하다.
인간은 단순히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사실 나는 그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것이 중요해진다.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이것이 극단적으로 발전한다.
명품을 사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직장을 얻고, 유명해지고,
팔로워를 늘리고, 인정받고, 자기 자신을 브랜드화한다.
그런데 종교인이라고 이 구조에서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세계에서도 새로운 모방욕망이 발생한다.
“깨달은 사람”이 욕망의 모델이 된다.
어떤 선사가 유명해지면 다른 수행자들이 그를 모방한다.
그의 말투를 모방하고, 그의 수행법을 모방하고,
그의 법문 형식을 모방하고, 그의 이미지와 복장과 행동양식을 모방한다.
그러면서 서로 경쟁한다.
누가 더 깨달은 사람처럼 보이는가?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깨달음은 본래 ‘나’를 약화시키는 것인데,
깨달음의 사회적 유통 과정에서는 오히려
‘깨달은 나’라는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질 수 있다.
5. ‘깨달은 자’라는 이미지도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
SNS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법상에 올라가 법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님도 하나의 미디어가 된다.
블로그, 유튜브,페이스북, 짧은 명상문,
법문 영상, 짧고 인상적인 문구.
“오늘의 한마디.”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포교를 위해서는 필요한 수단이다.
문제는 수단이 목적을 대체할 때 발생한다.
법을 전달하기 위해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과, 미디어 속에서 법을 연출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라면 포교다. 후자라면 자기 이미지의 생산이다.
그리고 둘은 매우 미세하게 뒤섞인다.
“대중에게 잘 전달하고 싶다.”
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다.”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로 변한다.
이것은 불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아상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다.
6. 그렇다면 대중에게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매우 중요하다.
붓다도 근기에 따라 설법했다.
불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언어를 번역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문에서 한글로,
그리고 이제 디지털 언어로.
따라서 한문 법어를 현대어로 번역하고, 젊은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언어의 현대화와 내용의 현대화를 혼동하는 것이다.
한문을 한글로 바꾸었다고 현대적인 법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卽今”을 “바로 지금”으로 바꾸었다고 현대인의 실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현대화란 옛 문장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옛 선사들이 당시 인간에게 던졌던 충격을 오늘날의 인간에게 다시 던지는 것이다.
7. 그렇다면 오늘날의 선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오늘날의 선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왜 남보다 뒤처지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가?”
“왜 아무도 당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당신의 삶이 무가치해지는가?”
“왜 SNS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당신도 욕망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이 성공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돈 때문인가, 자유 때문인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기 때문인가?”
“당신은 왜 실패한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는가?”
“당신이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미 불교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삶에 들어가는 선이다.
선의 현대화는 새로운 수사법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집착을 발견하는 일이다.
8. 더 근본적으로는 ‘깨달음 이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 돈오돈수 문제가 등장한다.
“본래 부처다.”
“본래 청정하다.”
“깨달으면 더 닦을 것이 없다.”
“무수무증이다.”
이러한 명제는 선종의 매우 중요한 사상적 유산이다.
그러나 이것을 존재론적 명제로만 받아들이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깨달음과 인격적 변화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본래 부처다.” 그렇다면 화를 내도 되는가?
“생각을 일으켜도 본래 청정하다.” 그렇다면 욕망에 끌려가도 되는가?
“닦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수행 이후의 자기 성찰은 불필요한가?
여기서 선종 내부의 오래된 긴장이 생긴다.
돈오와 점수, 돈오돈수와 보임.
깨달음의 순간과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은 동일한가?
9. ‘깨달았다’는 것과 ‘깨달음에 맞게 사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나는 이 구별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과 욕심이 줄어드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무아를 이해하는 것과 자존심이 없어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무분별을 이해하는 것과 타인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무소득을 말하는 것과 명예욕이 없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나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따라서 깨달음에는 최소한 두 차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통찰의 차원과 구현의 차원. 통찰은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통찰이 인격과 행동과 관계 속에 스며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을 무시하면 깨달음은 너무 쉽게 자기 인증(self-certification)이 된다.
10. 결국 깨달음의 진위는 법어보다 삶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대중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그들은 스님이 무슨 한문을 사용하는지보다,
그 스님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본다.
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명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보다 유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 추종자가 줄어들었을 때도 평온한가.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수행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가?
현대인은 여기에서 종교인의 진정성을 판단한다.
11. 그래서 오늘날에는 ‘법어’보다 ‘법행’이 더 강력할 수 있다
과거에는 법문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말이 너무 많다.
철학자도 좋은 말을 한다. 심리학자도 좋은 말을 한다.
자기계발 강사도 좋은 말을 한다. 유튜버도 좋은 말을 한다.
AI도 좋은 말을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말이 특별해지려면 그 말을 하는 인간의 삶이 함께 증명되어야 한다.
“욕망을 내려놓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욕망이 없다는 것이 보여야 한다.
“명예에 집착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명예를 좇지 않아야 한다.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이름과 명성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존재를 자비롭게 대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불리한 사람에게도 자비로워야 한다.
그때 법문은 말이 아니라 증언(testimony)이 된다.
12. 대중이 원하는 것은 ‘말 잘하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이 점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스님들은 말을 잘 못해서 대중에게 인기가 없다.”
“한문투라서 젊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좀 더 세련되게 말해야 한다.”
“SNS를 잘 활용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핵심 원인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를 잘못 진단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중은 이미 말을 잘하는 종교인과 지식인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희소한 것은 무엇인가?
말과 삶이 일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오히려 현대에는 ‘성인성(sainthood)’ 자체가 가장 강력한 포교가 될 수 있다.
13. 역설적으로 말하면,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역설이 있다.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중의 인정이 필요해지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가?”
“내 법문을 많이 보는가?”
“내 말에 공감하는가?”
“나를 훌륭한 스님으로 생각하는가?”
이 질문이 수행자의 내면에 들어오는 순간,
수행자는 이미 대중을 자신의 거울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자기의 깨달음이 대중의 반응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자유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역설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지 않고도 법을 설할 수 있는가?
좋아요가 없어도 법문을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는가?
비난받아도 자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이름이 사라져도 법을 위해 일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수행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14. ‘卽今’의 진정한 현대화는 오히려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卽今”이라는 말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살려내느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생각을 막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이 그 생각을 없애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무엇도 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이토록 애쓰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없다.”라고 말하는 대신,
“누군가 당신을 무시했을 때 화가 난다면, 그때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나’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이 현대적 선이다.
선어록의 문장을 현대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선의 칼날을 현대인의 삶에 갖다 대는 것.
15. 선의 현대화는 ‘표현의 현대화’가 아니라 ‘인간 이해의 현대화’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스님들이 젊은이들처럼 말할 수 있을까?”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리고 “불교는 그 괴로움을 정말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청년의 고통을 취업 문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그 밑에는 비교가 있고, 인정욕망이 있고, 모방욕망이 있고,
자기 가치에 대한 불안이 있고, 끝없는 자기 연출이 있고, 실패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것은 모두 불교가 오래전부터 탐구해온 인간의 구조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불교가 현대적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젊은이들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욕망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16. 결국 ‘卽今’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이 한 문장은 강력하다.
반대로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과 추종자를 필요로 한다면, 아무리 세련된 한글과 아름다운 수사학으로 포장해도 그 문장은 힘을 잃는다.
법어는 法行(法다운 행동)에 의해 완성된다.
그리고 법행은 다시 삶 전체에 의해 증명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깨달음의 문체’보다 새로운 ‘깨달음의 인간상’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잘하는 스님보다 침묵할 줄 아는 스님.
자기를 선전하는 스님보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스님.
대중의 박수를 받는 스님보다 박수가 없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스님.
깨달음을 주장하는 스님보다 깨달음에 맞게 사는 스님.
그런 사람이 법상에 앉아 있다면 굳이 현대적인 말을 쓰지 않아도 젊은이는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반대로 그런 삶이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한글 법문을 써도 그것은 결국 ‘깨달음에 관한 문학’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맺음말 ―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는가
“卽今 此足矣.”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 앞에 하나의 질문을 더 붙이고 싶다.
“정말로 충분한가?” 명예가 없어도 충분한가?
추종자가 없어도 충분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충분한가?
비난받아도 충분한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도 충분한가?
자기의 이름이 사라져도 충분한가? 아무도 자기의 깨달음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충분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충분한 사람이라면 굳이 ‘충분하다’고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가?
여기서 ‘卽今’은 단순한 명상문구를 넘어 수행자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지금.
이것이면 정말 충분한가?
아니면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내가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가?
어쩌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선법문이 다시 시작되어야 할 곳은 바로 그 질문인지도 모른다.
“卽今.”
바로 지금.
그러나 그 ‘지금’을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