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22: 20-27
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
요한복음 12장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불과 며칠 전, 예수님 일행이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시자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한창 잔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마리아가 아주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가롯 유다가 마리아에게 책망하듯 나무랐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으련만,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 향유는 팔면 최소한 300데나리온 이상은 받을 수 있을 만큼 아주 비싼 것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3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노동자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약 3천만 원어치는 됩니다.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자 가롯 유다는 그게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훨씬 더 값지게 사용할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고 나무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천만 원어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여러분이 보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저는 가롯 유다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3천만 원이 어디 적은 돈입니까? 그 돈으로 가난으로 굶주린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마리아를 책망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셨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3천만 원어치를 허비한 마리아의 행동을 보시면서 책망하지 않고 칭찬하셨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왜 그런 엄청난 돈을 허비한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그것을 구제하는데 써야 한다는 가롯 유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가롯 유다는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구제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가롯 유다가 그렇게 마리아를 책망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돈궤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돈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다면 자신에게 얼마 정도 떨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롯 유다의 말을 그대로 인정해서 구제하는 데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으로 이해해 준다면 가롯 유다는 구제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데도 책망하신 대신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시면서, 마리아를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1:8)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고, 그 복음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1차적인 사명은 선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복음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하는 것만으로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19-2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부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아름답게 잘 감당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자는 세상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교회는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우리의 것을 나누며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세상에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지를 보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한 율법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글자 그대로 읽어도 조금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 탈출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탈출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그들은 시내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싶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는지 보았지 않느냐? 이제 너희가 나와 언약을 맺으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내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 말씀을 가지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율법을 주십니다. 그 첫 번째 율법이 바로 출애굽기 20:1절 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을 것들을 율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20-23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들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 백성들이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만을 잘 믿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렇게 이렇게 살아보고 난 다음 내 마음에 들면 내 백성으로 인정해 주마.’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 백성이다.’ 그렇게 선언하신 후에 ‘이제는 내 백성이 되었으니 내 백성답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어떤 선결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어떤 조건을 걸어놓고 ‘이대로 하면 내가 너를 구원하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내 사랑을 받은 자답게 구원을 얻은 자답게 이렇게 살아다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답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먼저 말씀하신 것이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단순한 여행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외국인근로자들, 국제결혼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함께 사는 외국인 결혼이민자들,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같은 혈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차별을 받기 쉽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혈통주의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단일민족이라는 의식 때문에 외국인들을 쉽게 품어주지 못합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우리나라가 많이 개방되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가 없으면 흔히 3D라고 말하는 힘든 노동력이 필요한 공장이나 산업현장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이고, 농어촌에서는 외국인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혼하지 못하는 노총각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고, 그들에 대해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나라보다 더 외국인에 대해서 폐쇄적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더구나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아주 개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외국인에 대해서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했을 때 순수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출애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2:38절의 기록에 의하면 출애굽할 때 ‘수많은 잡족’이 함께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수많은 잡족”이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다른 민족들(외국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12:48절에 의하면, 그들과 함께 했던 그 외국인들도 할례를 행함으로 유월절을 함께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왕따를 시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개방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안에는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오늘 본문 다음 장인 출애굽기 23:9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나그네의 설움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 설움을 당했습니다. 그 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출애굽기 2:23-25) 그런 설움을 알기 때문에, 그런 설움을 겪었기 때문에 너희는 외국인(나그네)들에게 설움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가 55만 명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모두 120만 명쯤 되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근로자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불법체류를 하면서 일하고 있는 사람까지 하면 훨씬 더 많은 외국인 근로자가 우리나라에서 우리 사회를 돕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결혼이민자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라북도에만 결혼이주 여성이 5천 명이 넘습니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거나 부당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그들의 아픔과 설움과 외로움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설움을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 그 다음에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과부나 고아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남편이나 아버지의 울타리를 잃어버린 과부나 고아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 고아와 과부입니다. 스스로 자기들을 방어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이 고아와 과부입니다.
그렇게 힘없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울타리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68:5절에 보면,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힘이 없는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억울하게 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의 힘이 사실과 정의를 바꾸어버리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서버립니다. 때론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더 많이 베풀며 사는 것이 바른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을 가졌다고 그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 - 그게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육체의 힘이든 - 그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복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부유한 자는 농사를 지은 후 추수할 때에 밭의 모퉁이는 남겨두어야 합니다. 또 추수하다가 떨어진 이삭을 주인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밭의 모퉁이와 이삭은 고아나 과부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힘없는 자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것 가운데 일부를 힘없는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즐거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오늘 본문 25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고 존재합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 보니까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의 빈민율이 14.3%라고 합니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지난해를 기준으로 발표한 것인데, 미국사람 7명 가운데 한 사람은 빈곤선(貧困線)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빈곤선’이라는 것은 최저 한도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입 수준을 말하는데, ‘빈곤선 아래’라는 것은 최저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만큼 벌지 못해서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빈곤선 아래에 살고 있는 미국사람이 전체 4,36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어느 사회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
기 15:11) 가난한 자는 항상 있는데, 그렇다고 가난한 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었을 때에는 채권자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돈을 꾸어갔을 때, 빨리 갚으라고 독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없어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돈을 빌려갔는데, 그런 가난한 사람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정도면 자신은 먹고 살만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부자들입니다. 그런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성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고,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원치 않으십니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고,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존경하는 사회, 그래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를 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물건을 서로 나눠 쓰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사도행전 4:34-35)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아름다운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루어가야 할 사회가 바로 이런 사회입니다.
그리고 옷을 저당 잡았을 때에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낮과 저녁의 일교차가 굉장히 심합니다. 낮에는 아주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더라도 저녁이 되는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가난한 사회였던 당시에는 겉옷이 낮에는 몸을 두르는 옷으로, 저녁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덮고 자는 이불로 쓰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중동의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겉옷을 저당 잡히고 먹을 것을 구했다면, 그는 굶주림에서는 벗어나겠지만 저녁의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옷을 저당 잡았을 때에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저녁이 되었는데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가 추위에 떨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고, 그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왜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오히려 먹을 것을 나눠주어야 합니까? 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옷을 저당 잡았을 때에 자비를 베풀어주어야 합니까? 그건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그 자비로우신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 은혜를 받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하나님을 닮아 우리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복음에 합당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로마서 8: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그렇습니다. 먼저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우리는 그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셔서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들은 복음을 전함으로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내가 받은 사랑을 조금씩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어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그 모든 것에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온전히는 따라 살지 못할지라도 그 자비로우심을 조금씩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십니다. 왜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말씀을 이어서 하고 있을까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것,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 가난한 자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 그것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계명만큼이나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그 사랑을 얼마나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지금도 내 주변에는 그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선 외국에 와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근로자들, 삶의 울타리를 잃어버리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고아와 과부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 하루도 배곯지 않고 무언가를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지금도 우리의 사랑과 관심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만큼의 풍요를 주신 것은, 내게 이만큼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내가 받은 그것을 나눔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