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문예 24겨울호
신인상 시 당선작
졸음
이경화
가장 순수한 초록색 바탕에
슬쩍 끼워 넣은 흙색
연두색과 하늘색을 대충 섞은 뒤엉킨 넝쿨
어둠은 한 색으로 성글게 칠해주고
찬란한 태양빛을 얹어서
실눈을 뜨고 바라본다
아득히 먼 산
뜨거운 여름
이글거리는 열차는
회색도시를 도망치듯
산을 품고 달린다.
초록으로 물든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다 내려온 눈꺼풀
암흙 속에 갇혀버린
아득히 먼 산
[심사평]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이경화의 <졸음> 외 2편을 당선작으로 선한다. 그 까닭은 당선작 <졸음>은 현대시가 요구하는 표현기교 내지는 기법으로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곧 존재나 사물 자체이자 존재나 사물의 창조인 셈이다. 나타내려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로 가시화한 까닭으로 입체적이고도 조형적 형상화를 성립시켰다. 구체적인 시어는 그 매체의 역할을 잘 담당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발상 차원에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신인으로서의 자세를 잘 견지하고 있다. 현대시가 본 것을 본 그대로, 생각한 것을 생각한 그대로 쓰는 것이라면 굳이 애시당초 강렬한 제작성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선시는 본 대로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정서의 언어로, 나아가서는 사물의 그림으로 그려내느냐, 그리하여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창조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산고와 같은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시는 보이는 것의 기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감추어진 것, 숨어있는 비의까지를 그려내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좋은 시가 되려면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냈을 때, 비로소 그 생각은 새로운 생각이 된다. 남이 다 하는 항용의 생각, 보편적인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시가 될 수 없다. 느낌도 마찬가지다. 꽃이 아름답다는 보편적 느낌은 시적 정서를 환기하지 못한다. 시적 화자는 시에 구체성을 주기 위해눈이 감겨 실눈이 되는 상황을 ‘아득히 먼 산’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날 시적 화자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초록으로 물든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졸게 된다. 그 상황을 ‘암흙 속에 갇혀버린 아득히 먼 산’으로 표현하는 데서 눈꺼풀이 내려와 눈동자를 덮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아득히 먼 산의 거리감은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뜨거운 성하의 계절, 달리는 기차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초록 풍경은 회색으로, 흙색으로, 다시 암흑색으로 전개되면서 ‘아득히 먼 산’으로 구체화된다. 시인은 구상에서 구상으로 시각적 언어를 이동시키며 은유적 사유를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물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을 형상화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진다.
원관념인 '졸음'을 형상화하기 위해 언어여행을 떠나는 시적 화자를 보는 재미가 왜 쏠쏠할까. '초록색', '연두색', '하늘색'은 자연의 풍경을, '슬쩍', '뒤엉킨', '성글게', '아득히'는 생물학적인 의식의 변화를, '내려온', '갇혀버린', '아득히 먼'은 졸음의 상황을 나타낸다. 그녀는 여름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몰려오는 잠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반복된 ‘아득히 먼 산’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현대 시작법의 대표적 기법인 중층묘사로 사물과 관념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시인 자신이 갖고 싶은 세계를 잘 변용시켜 형이상학의 시학을 완성한 것이다. 시창작은 한마디로, 상상력으로 새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관습적 이미지를 탈피하여, 시인은 제재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시는 '시는 이미지다'라는 명제와 ‘시는 현실과의 미적거리에서 창조된다’는 시학 원리에 딱 부합한다. 왜냐하면 ‘먼 산’과 시인의 거리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졸음에 대한 관념이나 정서를 아득히 먼 산으로 양식화함으로써, 즉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함으로써 시의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