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납시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합리화에 빠져 살 때가 많습니다. 자기합리화는 자기연민, 자기사랑, 자기이해, 자신감, 자존감과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개념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은 전체적인 경험이 아닌,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경험이든 자신이 경험한 것은 자신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최고의 경험으로 여깁니다. 나 역시도 가장 위험한 부정적 신념을 간직하며 살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불행한 삶을 경험하면서 내 스스로 잘못 믿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많이 속으면서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없어, 언젠가는 나에게 상처를 줄 거야"하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세상을 살다보니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내가 상대방을 조금만 이해하면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이러한 부정적 자기합리화에 빠지게 되면 쉽사리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합리화가 형성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 수많은 경험, 체험, 자기 확신 등이 내 마음에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자기에게 긍정적 체험이나 교훈이 되었다면 상관이 없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신념이나 자기합리화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치 찌들어 버린 냄비의 찌든 때를 벗기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번 문지르고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찌든 때를 벗길 때까지 계속해서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합니다. 젓가락질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젓가락을 잡고 밥상에 앉은 것처럼 어색하고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고, 수고로울 수 있습니다. 그냥 그동안 살아왔던 부정적인 신념과 자기합리화에 파묻혀 살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인내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교훈을 주기도 하고, 뼈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자기합리화는 스스로 놓아버리거나 반성하지 않는 한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지속될 뿐입니다. 예전에는 믿지 못했는데 '세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거나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깊이 다가옵니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번 굳어버리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갈고 닦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계속하며 덕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합리화는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성질이 있는 반면, 자기사랑은 그러한 답답함 속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와 성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변화와 성장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더 넓게, 더 높고, 더 새롭게, 더 다양하게, 더 다각적으로, 더 합리적으로, 더 이성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더 좁게 나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자기합리화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나의 경험에 의해서 부정적인 신념에 빠져서 ‘하느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더 나아지는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고 신앙의 고립에 빠져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문제(우울증, 강박증, 발표불안, 대인공포증 등)가 있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속에 갇혀서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우울증 : 나는 무가치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강박증 : 저는 자꾸 쫓기는 듯 불안한 이 생각과 행동을 멈출 수가 없어요. 대인공포 :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자신감이 없어지네요. 발표불안 : 사람들 앞에만 서면 심장이 터질듯 너무 두렵습니다.
과연 이러한 문제들을 자기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자기합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자기긍정과 수용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갖는 자기긍정과 수용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두려움이라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완고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이라는 울타리에 숨어서 자기합리화로 죄라는 두려움에서 숨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숨어버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본질의 자유로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인양 착각하면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합리화의 일종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원칙으로 하느님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합리화는 죄로부터 도피이며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세상 속의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관계 안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제 긍정적인 관계정립을 위해서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신념을 떨쳐버리고 자신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품 안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