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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을 야기한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만주군과 합동하여 우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시켰다. 이때 만주방면에는 반만항일(反滿抗日)의 기치를 든 수많은 중국군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고 있었다. 돈화(敦化)지방에는 왕덕림(王德林) 풍점해(馮占海)부대가, 흑룡강(黑龍江)지방에는 마점산(馬占山)부대가, 하얼빈에는 중국 호로군(護路軍)사령관 정초(丁超)가 인솔하는 부대와 호로군 여단장 고봉림(考鳳林)부대가 있어 일·만군과 싸우고 있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중국군을 우리 독립운동자가 볼 때 한중연합군의 성립이 박두하였음을 직감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중앙회의를 긴급 개최하고 한중합작을 실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곧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특사를 중국 호로군 사령관에게 파견하여 한중연합을 협의하게 되었다. 중국군도 자기들과 같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싸워온 한국독립군의 제안에 즉각 찬동을 표하고 다음과 같이 양군 대표에 의하여 한중연합군의 성립에 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1. 한중양군은 최악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장기 항전을 맹세한다.
2. 중동철도를 경계선으로 하여 서쪽은 중국군이, 동쪽은 독립군이 담 당한다.
3. 전시의 후방교련은 한국인 장교가 담당하고 독립군에 소요되는 모든 물자를 중국군이 공급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성립된 한중연합군의 작전은 즉각 실천을 보게 되었다. 1932년 2월 13일 일본군이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중동철도 연안을 침공하자 한중 연합군은 이를 맞아 최선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나 식량과 탄약이 보급되지 못하고 더욱이 공군의 엄호를 받고 있는 일·만군의 공격으로 부득이 후퇴를 하게 되었다. 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동빈현(同賓縣)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루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통화현(通化縣)으로 퇴각하였으며 대대장 오광선(吳光鮮)장군은 중국의 고봉림부대와 공동작전을 벌여 3월 30일 아성(阿城)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제3중대장 차철(車徹), 제4중대장 심상기(沈相奇), 제5중대장 전북빈(全北賓)부대는 중국자위군 및 호로군의 연합부대와 공동작전을 1개월 가량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탄약의 부족으로 일면파(一面坡) 이북 진지로 후퇴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의 한중연합군은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각지에 분산되어 버렸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쌍성현 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군에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독립당의 수습책은 성공하여 1개월 미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였으며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 대리로 임명하고는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개시하였다. 즉 독립군 3천명과 중국군 2만 5천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은 쌍성보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쌍성보는 합장선(哈長線)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의 중요 물산의 집산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었다.
9월 3일 총사령 이청천 장군이 흑룡강지방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오자 진영을 다시 편성하고 김창환이 부사령이 되었다. 그리고는 진군 도중 만주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간에 3백여리를 진격하여 쌍성보 남쪽 5리 지점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군 고봉림(考鳳林)부대와 합세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으로 공격하기를 결정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군 3개여단이 완강히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로로 남겨두었던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매복시켜둔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만의 병력이 3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나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연합군의 주력을 쌍성보 5리밖에 있는 우가둔(牛家屯)으로 옮기고 쌍성보에는 소수의 부대만을 잔류시켰다. 잠시 후 예상하였던 대로 대부대가 쌍성보를 공격하여 왔다. 연합군은 이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불행히도 우군인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를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쌍성보의 격전으로 일시 흩어졌던 연합군은 다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1월 7일 재차 쌍성보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과 중국군은 부대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쌍성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독립군은 2백 명을 단위로 부대를 15개로 편성한 후 선봉에 서서 진격하였으며 중국군은 탄환과 식량을 담당하였다. 오후 6시 총공격을 개시한 독립군의 1개 부대는 정면으로, 1개 부대는 왼쪽으로, 1개 부대는 뒤쪽으로, 기관총대는 중앙으로 각각 돌격하였다. 적은 수류탄과 박격포로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수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성안으로 돌입한 독립군은 적진을 교란시켰으며 쌍성보 뒷산을 점령한 독립군 포병대가 시가의 주요 건물에 포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을 본 만주군들이 전원 항복하였으며 성문을 열어 연합군을 환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전멸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를 내었다.두 번째로 쌍성보를 탈환한 연합군은 입성 즉시 전리품을 정리하고 정돈한 후 주민들을 안심하도록 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어김없이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하얼빈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의 대병력은 비행기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전병력을 7대로 나누어 각 요충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반격을 맞았다. 1주야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피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성 내외에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시체가 누적되었다. 21일 밤 적의 비행기와 대포공격으로 인하여 마침내 방어선이 적에게 돌파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 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중국군의 사기가 점차 떨어져 부득이 성을 적에게 내주고 5백여 리를 후퇴하여 오상현 충하진(五常縣沖河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도 막대하였을 뿐 아니라 패전에 낙담한 고봉림부대가 적군과 단독으로 휴전회담을 개최하는 사태를 자아냈다. 이에 독립군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본래 신념이 약하고 형세에 끌리기 쉬운 중국인 집단인지라 고봉림부대는 이익을 좇아 이념과 의리를 버리고 휴전협의를 계속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동월 27일 패전의 상처와 동지에게 배반당한 쓰라림과 분노를 되씹으며 결연히 고봉림 부대와 결별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의 연길·왕청·동녕·훈춘·영안현으로 정함.
2. 중국구국군 수뇌와 합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관으로 선정.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하여 한국독립군은 두 번째로 중국구국군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12월 25일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경박호(鏡迫湖)에서 만주군 2천명과 격전을 벌여 이를 격멸시켰다. 이 날 전투는 연합군을 추격하여 오는 만주군을 경박호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만주군이 호수 입구에 들어서는 것을 기회로 양쪽에서 협공하여 섬멸시켰던 것이다. 1933년 3월까지 독립군은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면서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와 같은 정보를 접수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주군과 연합하여 공격을 취하였다. 4월 14일 일·만군 대부대가 공격하여 온다는 것을 안 독립군은 중국군과 같이 적을 포위 섬멸하기로 하고 전부대를 4개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을 유인케 하고, 제2·제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뒤에 있는 분수령과 사도하(四道河)의 좌우 계곡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으며 제4로군은 이도하(二道河)입구에 매복하였다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의 수송차량을 빼앗도록 하였다. 15일 새벽 적은 약 1개사단의 병력으로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에 진격하여 왔다. 이것은 적이 아군의 작전에 빠져 들어온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급습하니 적군은 미쳐 응전하지도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의 패잔병들은 어둠을 뚫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이 부지기수였다. 16일 저녁 아군은 부대를 정돈하는 동시에 전리품을 수습하여 당당히 본대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5월 2일에 아군은 유격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일·만군을 기습 공격하였는데 대소 20여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던 것이다. 한중연합군은 승세를 몰아 이번에는 영안성(寧安城)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부대를 3개대로 편성하여 시행되었는데 제1로군은 기병대로 편성하고 동목단강(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하여 적의 후원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로군은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과 동경성의 중간지점에 배치하여 먼저 교량과 전선을 끊어서 적의 후원병을 저지하게 하였으며 제3로군은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6월 3일 밤 작전계획대로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북문으로 도주하다가 우군의 복병에게 전멸되었으며 만주군은 여단장 곽세재(藿世才)만이 호위병 몇 명만 데리고 도주하였을 뿐 전부대가 항복하였다. 이때 영안성에 있던 일본군은 두려워 감히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공포만을 쏘아댈 뿐이었다. 승전한 한중 연합군은 성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선무하여 안심시키는 한편 전리품을 수습하였는데 사도하자 전투 때 보다 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렇다고 일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영안성을 당장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주력부대를 왕청과 동녕 사이의 산간지대로 이동하여 주둔시켰다. 이와 같이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래 동안 확보할 실력이 없어 곤란한 경우에 놓여져 있었다. 이 해 6월 28일 한중연합군 전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하였는데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행동은 연합군에게 즉각 탐지되었다. 연합군은 곧 일본군을 맞아 섬멸시키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 지점에 있는 노모저하(老母楮河)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7월 3일 대전자령(大甸子嶺)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Z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약 2십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이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독립군이 2천5백 명 중국군이 6천명인데 독립군 전원과 중국군 2천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해 있는 지점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것도 모르는 채 자연을 즐기며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이 꽃을 꺾어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적의 자동차에도 마차에도 한아름의 꽃 뭉치였다. 어떤 병정들은 전투모를 벗어 없애고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고개를 올라오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처 응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지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쓰러져 갔다. 4시간의 격전으로 일본군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멸 당하였다. 이 대전자전투에서의 승리는 한국독립군의 전무한 승리였으며 항일전투사상 특이할 만한 대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어냈는바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군복 3,000벌, 담요 3,000장 군량 문서 군용품 2백여 마차 박격포 5문 소총 1천5백정 평사포 3문 이와 같은 전리품은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였는데 이 분배과정에서 양군사이에 감정을 해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략을 정비 보강한 독립군은 9월 1일 동빈현(東賓縣)에 있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원래 중국군이 곧 후속부대를 파견하여 주기로 약속된 전투였다. 약 3일에 걸쳐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립군의 피해는 심하여 갔으며 끝내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중국군이 후속부대를 파견하여 주지 않아 패전을 하게 된 한국독립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와 같이 중국구국군이 후속부대를 보내 주지 않은 이유는 첫째 중국구국군 1사장 오의성(吳義城)이 부대내에 공산주의자를 침투시켜 한중연합군을 이간시켰으며, 둘째로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과정에서 양군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동빈현 전투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가 심각하여졌으며 끝내는 독립군의 총사령 이하 수십 명의 간부를 중국군이 체포 구금하였으며 독립군의 무기를 압수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후에 양군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구속 간부가 석방되었으나 한중연합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 에서는 조선혁명당 소속 조선혁명군이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32년 2월 관전현에 주둔 중 일본군과 만주군의 기습 협공을 받아 양기하(梁基瑕) 이하 수십 명의 장병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이에 실망하지 않고 양세봉(梁世奉)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정예의 군대로 훈련을 쌓아왔다. 그리고는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李春潤)과 교섭하여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약 2만의 병력을 갖고 있는 이춘윤부대는 일찍이 안봉철도(安奉鐵道)연선인 봉황성(鳳凰城)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예리한 공격을 피하여 봉천성 흥경(興京)으로 오게 된 것이다. 본부를 흥경에 두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중국의용군 이춘윤부대의 입성을 환영하고 한·중양군의 대표인 양세봉과 이춘윤이 굳은 악수를 나누니 이로써 만주탈환과 한국광복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힘찬 협동전선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이 날 흥경성문에는 태극기와 중국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나부꼈으며 곳곳에는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엄중한 경계망이 쳐졌던 것이다. 한·중 양군대표는 공동명의로 한·중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와 당면한 양국의 이해관계를 상세히 해설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각 부대와 행정기관에 지시하여 한·중 양 국민에게 납득시키도록 하였다. 그럼으로써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남아있던 좋지 못한 감정대립이 없어졌다. 이와 같이 한·중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편성되자 각지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자신을 잃고 있던 중국의 무장부대들이 차츰 용기를 갖고 전격적으로 항일투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만주에서의 항일세력을 일거에 토벌하기로 하고 만주군과 연합하여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흥경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군사계략을 탐지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부대를 인솔하여 신빈(新賓)남쪽고지에 도착하여 병력을 배치한 후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신빈현성(新賓縣城)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하여 왔다. 박격포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은 상당히 치열하였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의 전력을 얕잡아 보고 무리한 전법으로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지리에 능숙한 혁명군은 이를 유인하여 1시간 동안 집중포화를 퍼부어 격퇴시켰다. 혁명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에 돌격전을 감행하여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도주하는 일본군을 30여리를 추격하여 영릉가(永陵街)와 상협하(上夾河)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승리한 것보다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양 민족이 공동운명체라고 의식을 높여 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하여 졌다는 점이다. 그 달 하순 일본군 1개 대대가 만주군과 합세하여 비행기의 엄호하에 흥경성으로 들어왔으며 곧 이어 영릉가 전투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준비를 서둘렀다.
이 급보를 접한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중국의용군 1만 명과 합세하여 흥경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혁명군이 동문을 쳐부수면서 성내로 돌입하였으며 뒤따라 중국군이 북문으로부터 밀려들어가니 우수한 장비와 많은 병력을 갖고 대항하던 일본군도 견디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서남문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한·중연합작전은 언제나 우리 혁명군이 선봉이 되어 승전의 기틀을 잡았는데 이 전투에서도 혁명군이 큰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 조선혁명군의 승전소식에 접한 사람들이 혁명군으로 입대하자 혁명군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총사령부를 환인(桓仁)·흥경(興京)·집안(輯安)·통화(通化)지방의 교차지점에 두고 총사령부 아래에 5개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총 사 령 관 : 양세봉(梁世奉)
참 모 장 : 김학규(金學奎)
제1로사령관 : 박대호(朴大豪)
제2로사령관 : 최현추(崔鉉秋)
제3로사령관 : 조화선(趙化善)
제4로사령관 : 최윤구(崔允龜)
제5로사령관 : 정광배(鄭光培)
그리고 제1로군과 제5로군은 압록강 연안을 담당하여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들어가서 일본 군경의 시설 파괴하도록 하였으며 제3로군과 제4로군은 봉해선(奉海線) 및 길해선(吉海線)의 철도를 중심으로 파괴 공작 활동을 하도록 하였고 제2로군은 총사령부의 경호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혁명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통화현에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세워 군의 간부를 양성하였다. 이 학교 교장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이 담당하였으며 교육장은 윤동훈, 그리고 교관은 장신국·홍익선·임필순 등이 짧은 기간에 2천 여명의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2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5백 여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격하여 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환인·유하·휘남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부족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격전 수일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 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청원 등지로 공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혁명군 1천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병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을 당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남산성으로 후퇴하고야 말았다.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점, 소총 80여 점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제4로군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을 얻어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적은 8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나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더욱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어갔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왔다. 즉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梁世奉) 총사령관과 친면이 있고 혁명군에 대하여 간접으로 후원하여 오고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자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최창해(崔倉海)·김추상(金湫霜) 등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대납자구(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수수밭에서 변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나는 지난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에 양세봉(梁世奉)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다. 어떠한 위협으로도 양세봉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이때가 1932년 8월 12일 밤이었다.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 왔던 양세봉 총사령관은 이렇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김호석은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조선혁명군정부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이 군사정부는 법무·민사·재무·외교·교양·특무·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10개 군구(軍區)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호석이 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 예하의 부대편성은 다음과 같다. 이때의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제1사 사령관 한검추는 중국 자위군 사령관 왕봉각(王鳳閣)과 집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 중국의 동지들이 일치 단결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같이 싸우자는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가,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王鳳閣)이, 군대 총사령관에는 한검추(韓儉秋)가 임명되었다. 이 조선혁명군은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항일전투를 계속하였는데 이해 9월 6일 총사령관 김호석이 일본군에 투항한 후 중국 남경지방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