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언어습관③>
기적을 일으키는 말 / 이하준 목사
(잠 16:22-26, 잠 25:11-12)
이하준 목사
잠언의 지혜
세계 어느 나라에나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지혜로운 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국에는 고사성어가 있고 우리나라나 서양 여러 나라에도 속담이나 격언이 있습니다. 그 지혜로운 말들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속에는 아주 깊은 인생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그 고사성어나 속담을 들여다보면 우리 조상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처세술과 인간관계에 관한 온갖 지혜를 그 속에 담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와 처세술은 어디서 왔을까요? 대개 그 나라 조상들의 경험에서 온 것들입니다. “내가 살아봤더니 고생도 할 만큼 하면 좋은 일도 생기더라.” 이런 똑같은 경험을 후손들에게 남기면서 중국사람 조상들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를 남겼고 우리나라 조상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을 남겼고 서양 사람들 조상은 “After pain comes joy”(고통 뒤에 기쁨 온다)라는 속담을 남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경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속담이나 격언도 동서양이 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담이나 격언에 담긴 지혜는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그 격언과 속담을 인용하며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되돌아해 보곤 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런 인생의 지혜를 담은 격언과 속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의 ‘잠언’(Proverbs)이라는 책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동서양의 지혜로운 격언이나 속담과 상당히 비슷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잠언을 열심히 읽은 것은 고3때 친구들과 함께 대입시험을 준비하면서 매일 잠언을 한 장씩 읽어나갈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성경을 잘 알지 못했는데도 이 잠언이 아주 마음에 와 닿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당연하지요. 잠언을 성경의 한 책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 안에 아주 많은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꼭 무슨 옛날이야기 책이나 성현들의 글을 읽는 것처럼 친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제가 고3때 읽으면서 제일 은혜 받았던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잠언만의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지혜와 속담이 다양한 인생의 경험을 담고 지혜로운 말들을 담은 것으로 끝나지만 잠언을 기록한 지혜자들은 자기 인생의 경험을 통해 보았더니 결국 지혜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고 반대로 어리석은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는 삶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로운 말
그러므로 잠언을 읽을 때는 옛날이야기책 중 하나처럼, 또는 무슨 속담집이나 격언집처럼 읽으면 안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읽어야만 바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이를테면 술 문제, 분노의 문제, 말의 문제, 부와 가난에 관한 문제, 죽음에 관한 문제, 가족에 관한 문제 등 아주 다양합니다. 로널드 세일러(Ronald M. Sailler)라는 분은 이 잠언이라는 책에서 마흔 두 가지 이상의 주제를 뽑아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잠언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지혜, 윤리적인 문제들을 아주 실제적으로 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십 가지의 주제 중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말, 언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진 사람,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잘 사용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 지금까지 두 주에 걸쳐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 같이 말의 그 큰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혜로운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
먼저 오늘의 첫 번째 본문인 잠언 16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22절은 지혜로운 사람의 말과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씀합니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말)이 징계가 되느니라.” 명철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말은 생명의 샘이 되지만 미련한 사람이 하는 말은 징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47장에서 거룩한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 된 것처럼 지혜로운 말 한 마디는 ‘생명의 샘,’ 즉 다른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련한 말 한마디는 징계, 즉 남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큰 고통과 아픔을 주고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한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의 주제와 같습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의 말이 어떻게 남에게 생명을 주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가? 23절과 24절에 설명합니다. 먼저 23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여기서 ‘슬기롭게 하고’는 원어 상 ‘신중하게 하다,’ ‘숙고한다’는 뜻이므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할 때 신중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실수가 적고 또 그 말을 때와 장소에 맞도록 시의적절하게 구사해서 남에게 덕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 한 마디를 하기 전에 “내가 이 말을 꼭 해야 하나?” “혹시 필요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아닐까?” “이 말이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일까?”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두 주 전 우리가 말하기 전에 딱 0.1초만 생각하라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처럼 깊이 생각해서 말을 하다 보면 언제나 때와 장소에 맞는 아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한 번 말 하면 분위기가 아주 좋아지고 화기애애해집니다. 왜 그런 사람 있지요? 말을 함부로 해서 분위기 좋다가도 이 사람 와서 한 마디 툭 던지면 갑자기 싸늘해지고 살벌해지고 말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상황에 안 맞는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자리에서 한참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를 하는데 심각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꺼낸다든지, 또 장례식 같은 데서 경건하고 엄숙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이상한 농담이나 던지는 사람 말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사람을 분위기 깨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깬다’고 줄여 부르더군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런 사람이 나타나면 여러 사람 모여서 재미있게 이야기 하다가도 다들 슬슬 피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다들 우울한데 그 사람만 나타나면 아주 화기애애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이 사람의 농담 한 마디에 모두 분위기가 따뜻해집니다.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그 사람 말 한 마디면 힘을 내고 잘못된 길로 가던 사람도 이 사람의 충고 한 마디면 그 길에서 돌아오곤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이 사람이 깊이 숙고하여 상황에 꼭 맞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이런 사람의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24절에서 이런 사람의 말을 ‘선한 말’이라고 부르는데 이 ‘선한 말’이란 영어성경에 ‘유쾌한 말’ ‘즐거운 말’로 나옵니다.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 유익을 주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꿀송이처럼 달고 상대방을 아주 즐겁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곧 이 선한 말, 지혜로운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과 뼈 곧 영적, 육적인 면 모두에 좋은 약처럼 건강과 원기를 북돋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즐거운 말은 이처럼 다른 사람의 육신과 영혼에 힘과 생기를 주게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육신과 영혼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정말 귀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
계속해서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인 잠언 25장은 ‘경우에 합당한 말’에 관해 말씀합니다.
앞서 잠언 16장 말씀에 나온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가려 할 줄 알고 아주 깊이 생각하면서 말을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깊이 생각하면 아주 시의적절 한, 경우에 꼭 맞는 말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5장은 이런 ‘경우에 합당한 말,’ ‘적절한 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말씀합니다. 11절을 보세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생각해 보세요. 금사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 금사과 하나만으로도 귀한데 더욱이 그 금사과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은쟁반 위에 올려져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우리가 뭐라고 부릅니까? ‘금상첨화!’ “비단 위에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올려져 있다.” 아주 좋은 것 위에 더 좋은 것이 더해진다는 뜻인데 성경과 아주 비슷하지 않습니까? 상황에 딱 맞고 상황에 적절한 말은 아주 귀한 은쟁반에 올려진 금사과 같다, 즉 말을 한 마디 잘 하는 것이 정말 귀하지만 더군다나 상황에 딱 맞는 적절한 말은 한 마디 말 이상의 더 귀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불평을 이기고 화평을 가져오는 말
그러면 도대체 어떤 말이 경우에 합당한 말인가? 경우에 합당한 말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면 끝이 없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주는 칭찬과 격려의 말 한 마디,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에게 주는 책망의 말 한 마디(잠 25:12에 나오는 ‘슬기로운 책망’의 힘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정말 적절하고도 경우에 합당한 말들입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던지는 적절한 농담이나 밝은 말 한마디는 분위기를 따뜻하고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얼마나 적절하고도 경우에 합당한 말의 힘입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경우에 합당한 말로 큰 화를 면한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사사기 8:1~3을 살펴보면 사사 기드온과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나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비를 겁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왜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안 데려가서 우리가 공로를 세울 기회를 빼앗아 갔느냐고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내내 하나님과 주의 종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한 사람들로 주특기가 불평인데 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도 가장 불평불만이 많았던 지파가 바로 이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자기들이 기업으로 받은 영토가 다른 지파에 비해 좁다고 불평했습니다. 또한 사사 입다에게도 오늘 기드온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불평을 하며 다투었던 적이 있습니다(12:1). 이러한 고질적인 불평불만 병에 걸린 에브라임 지파는 결국 훗날 이스라엘 왕국을 남북으로 분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분열의 주역인 여로보암이 바로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만 해도 보십시오. 미디안족속과의 전쟁에 빠진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뿐 아니라 여러 지파들이 있었습니다(6:35). 더군다나 7:24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 말기에서나마 참전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파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유독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만 불평하고 시비를 거는 것은 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놓친 것이 아쉬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 에브라임 지파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중요한 일 할 때, 땀 흘려 열심히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일 다 끝난 후에 나타나 “나는 왜 안 껴주었느냐?” “왜 나는 일 안 시켰느냐”며 생떼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이권만 챙기고 자기 이름만 내세우려는 얌체족들입니다. 항상 불평불만에 가득 차 다른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데 딴죽 거는 사람들입니다. “저 사람 뭐야? 왜 저렇게 나서?” “저 사람 우리 교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날뛰나?” “뭐야? 목사님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나?” 하면서 자기는 일 안 할망정 남 열심히 일 하는 것마저 시비를 걸고 방해하는 참 못된 사람들입니다. 항상 불평만 늘어놓고 분열만 조장하는 걸림돌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에 분열을 일으킵니다. 정말 말로 남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보면 정말 때려주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 이런 시비에 걸려든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성질 같아서는 한 대 때려줄 수도 있고 아예 확 진멸 시켜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의 터무니없이 우기는 말을 듣고 화가 나는 것을 꾹 참고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2절과 3절에 그 대답이 나오는데 제가 풀어서 말씀드리지요. “맞습니다. 여러분을 안 데려간 것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큰일을 했다한들 어찌 당신들이 하신 일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습니까?(에브라임의 포도 찌꺼기가 아비에셀의 수확한 포도보다 낫지 않습니까? =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기드온 집안사람들인 아비에셀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공로보다 전쟁의 막바지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의 공로가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에브라임 지파는 노여움이 풀려서 신나가지고 휘파람 불며 돌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을 한 번 따져봅시다. 물론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 막바지에 참여해서 미디안 두 방백을 죽이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등 큰 공로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공로가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을 주도했던 기드온과 그의 가문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일 기드온이 이 사실을 따지며 에브라임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싸우자고 들었다면 틀림없이 큰 싸움이 일어나 동족이 서로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기드온의 겸손한 말, 적절한 지혜로운 말 한 마디가 전쟁을 막고 동족 간에 평화와 화해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말은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이 여인의 간구에 예수님은 의외로 냉담하게 반응하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는데 여인은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주여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저에게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하고 대답합니다. 이 지혜롭고 겸손한 대답에 우리 주님은 즉시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이런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적절한 말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악한 말에 대해 똑같이 악한 말로 대응하면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고 교회와 성도는 분열됩니다. “저 사람이 먼저 시비 걸었는데요.” 이건 핑계가 안 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악한 말로 나와도 나는 지혜롭고 적절한 말로 분열을 피하고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말이 성화된 말이며 참으로 지혜로운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이제 경우에 합당한 말,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말 한 마디만 잘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말 한 마디에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을 감동감화 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꽤 오래 전 미국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중년부인이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지만 돈이 없어서 고아원 아이들에게 선물은커녕 성탄절 저녁밥 한 끼 먹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이 부인은 어느 날 저녁 용기를 내서 술집으로 갔습니다. 술을 마시러 간 것이 아니라 거기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고아들을 위한 기부금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고아들만한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단돈 몇 푼이라도 좋으니 이 불쌍한 고아들에게 성탄절 식사를 줄 수 있도록 기부금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한 사내가 술맛 떨어지게 별 짓을 다 한다며 먹던 술잔을 던져 부인의 이마가 찢어졌고 피가 흘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때 뭐라고 하셨을까요? 상상에 맡깁니다. 저 같으면 깨진 술잔을 확 집어던지겠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침착하게 깨진 술잔을 집어 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술잔은 당신이 나를 위해 주신 선물로 알고 받겠습니다. 그러면 고아들을 위해서는 뭘 주시겠습니까?” 순간 술집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잠시 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앞 다투어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르며 한 푼 두 푼씩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술잔을 던진 사내가 있던 자리를 보니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지갑만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이렇게 쓰인 쪽지가 하나 남아있었고요. “불쌍한 고아들에게...”
이 부인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깨진 술잔을 되던지는 대신 그에게 돌려준 말 한 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한 완악한 남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적절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맺는 말 : 기적을 일으키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세 주에 걸쳐 말의 힘과 그 사용방법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적인 이야기, 이론적인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우리가 말실수 한 번 없이 완전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잘 제어해서 실수를 줄여나가고 그 말의 놀라운 힘을 잘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지혜자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교회와 가정과 우리 성도들의 삶도 힘과 능력이 넘쳐나고 사랑이 가득 넘치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말로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별 것입니까? 도저히 할 수 없어 보이는 일을 해내면 그것이 곧 기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혀를 제어하고 그 혀를 하나님께 쓰임 받는 혀로 훈련시킬 수만 있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되고 우리 가정과 교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남에게 말 많다, 말 함부로 한다고 탓하기 이전에 우리의 말과 혀를 잘 제어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입술로 사용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통해, 우리의 성화된 언어를 통해 주변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의 기적을 믿고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