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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장1-20절 택하심의 실제
우리는 앞글에서 교회를 떠나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교인들이 거짓 목사를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도 저들의 신앙에 문제 때문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어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지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요13장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을 받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5-6절을 보면,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하며, 또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교회 교인이 된 우리가 예수님이 발을 씻겨 줄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한 지체가 되고 함께 상속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택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먼저 예수의 제자로의 부름, 곧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청함을 받았다면, 이제는 청함을 받은 자로 예수의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었기에 자녀로 택함을 입어야 하는데, 그 ‘택함이 바로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접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교인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상속자로 택하시는 택함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네가 발 씻김에 대하여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문제가 이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접, 곧 택함을 입기 전 상황도 살펴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 3년 반 동안 함께 동거동락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저들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까? 본문 10절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발 씻음을 당하기 전에 이미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 깨끗게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미 깨끗한 사람의 발을 씻기시는 이유는 또 뭡니까?
과거에 이미 깨끗함을 받았음에도 발을 또 씻어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3절을 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러면 여기서 깨끗함을 받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벧전 1:23절 이후에, 항상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가 거듭났다 라고 했죠? 바로 이것은 죄의 문제를 통과하여 거듭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거듭났으면 됬지 무엇이 더 필요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며 시키는 대로 잘 순종만 하면 천국 가고 상 받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중생을 강조하고 거듭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확신을 가졌다고 여기며 생활해 왔는데,......
본문의 주님의 제자 발 씻는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제시되다니 말입니다.
한번 정리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원죄가 깨끗함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옥토 같은 마음)에 말씀(그리스도)을 심는 것으로 깨끗해집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됐다는 것은 육체의 죄의 문제와 영의 구원에 대한 거듭나는 문제도 모두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으로, 즉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 안에 심겨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그다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다음엔 자라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라나야 한다면, 먹어야 한다는 말이며, 이는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난 후에 부모로부터 양육 받음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의 진액을 받아 계속 자라나고, 장성한 자의 삶에 열매를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말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또는 종교로 사는 것을 말함이 아님)
그렇다면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합니까?
그것은 주님이 나를 영접해(발 씻겨 주심)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를 영접하시는 것이 바로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네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알리라 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발 씻는 것으로 [영접의 문제]를 비유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가장 잘 알려진 풍습으로 설명하시려는 주님의 의도입니다.
이 풍습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친절과 영접의 관습인데 (창18:4) 부유한 가정에서는 안주인이 오신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을 했습니다.
눅7:36~47절에 보면,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 집에 주님이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바리새인과 어느 죄인 여자의 영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접이란 자기가 주님을 영접하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또 딤전5:10절을 보면,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하시면서, 영접을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발을 씻기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사랑하여 영접한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영접(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는 문제를 택함 받는 것으로 비유했다면, 택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택하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의해서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1:13~24에 보면, 나무에 접붙임에 대한 말씀이 주님이 우리를 받아들이는 영접의 원리요, 택함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에 그들의 풍습에 의해서 “영접은 바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고, 로마서 11장의 원리에서 보면, 가지가 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뿌리에 진액을 공급해서 그들로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이 영접의 원리인 것입니다.
본문 요 13:10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진 자들) 발밖에 씻을(주님이 우리를 영접하여)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런데 여기서 깨끗지 않은 자에 대하여도 알려줍니다.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지 않았다는 암시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영접해 주기만) 되지만, 그러나 깨끗지 않은 자는 주님이 책임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1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알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도 청함을 받은 자 중에서 택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에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드디어 택함을 입은 사람도 주님을 따라 섬김과 사랑의 도리로 살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그들을 영접하는 사랑은 바로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마음으로 상대를 영접하지 않으면 사랑과 섬김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문제와 영접하는 문제가, 상급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마10:40~42)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즉, 하늘나라에서 큰 자는 어떤 자가 큰 자입니까?
섬기는 자 곧 발을 씻기는 자(영접하는 자)가 큰 자입니다.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영접의 역사입니다.
자기가 자라나서 커진 만큼, 작은 자들을 영접하여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마25:45)
큰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이 글을 대하시는 분 중에 여러분들도 지금은 배우고 있지마는 여러분들보다도 더 작은 분은 여러분들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온 세계만방에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과 자비인 것입니다.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하노라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영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디로? 무엇 안으로 영접합니까? 말씀 안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작은 소자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다른 사람(이방인)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닌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발씻기는 영접의 행동) 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에서 자기보다 작은 자 (거듭은 났으나 어린 신자, 원수, 소자)를 영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영접해 주신 분이 누굽니까? 그분이시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하신 주님이 바로 포도나무라는 얘깁니다.
그분은 나무고 우리는 그 가지가 되어서 그로 붙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그분이 나를 영접하실 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13:2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내가) 보낸 자(파송된 자들)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보낸 자(말씀을 가진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주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종(사도), 제자. 요한복음 13:20절은 결국 발씻기심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가룟 유다에 관한 이야기, 즉 발을 씻김 받지 못한 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영접받지 못한 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내가 보낸 자는 무엇을 가지고 갑니까?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갑니다.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자가 어느 사람을 영접을 하면, 생명의 말씀을 안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 안으로 영접하는 그 영접은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접은 바로 누구의 영접입니까? 하나님(말씀)을 영접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체적인 영접의 역사는 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까? 내 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과 거짓 종의 구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은 그 열매(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진 것이 생명 나무의 열매인가? 선악(지식)의 열매인가?
롬10:8~10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13-1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런데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부름에 대하여 오해 요소는, 마치 아무 상관 없는 어린아이에게 이름을 알려주면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해서 아이가 아버지 하며 부르는 그 부름은 본문의 부름과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전혀 다른 것으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접을 받지 못하고서도 마치 가롯 유다가 주님을따르면서 주님 주님 하고 부렀던 것과 같이 불러 대는 것을 말합니다.
마7장에서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들을 향해 도무지 모르느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종교 열심을 가지고 아버지와 주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일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택함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주의 이름을 부릅니까? 주님 안에 거하면서 함께 말씀과 동행 하면 산 제자, 곧 말씀을 생명으로 믿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광야에서 전파를 합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이 전파를 함으로써 듣습니다. 들음으로써 믿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렇게 함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부터 시작입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가 전파하고, 그 전파하는 그 소리를 듣고, 믿음으로 주의 이름(말씀)을 부르고(호소하고 상소하다), 부름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0:17절....“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믿으며, 믿으니 주의 이름을(말씀을) 부르(호소하는)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에 대하여입니다.
우리는(제자 목사 사역자)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기고, 그 말씀에 담긴 생명적인 것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깨닫기 시작하면, 이후부터는 보내심을 받은 자(소개자)는 더이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는 계속해서 바울이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듣고서 믿으면, 그다음에 말씀이(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 성장하게 하시는 것이니까요.
요한복음 15:3-4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이 공급하는 생명의 진액을 받고 자라감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 이 말씀을 잘못 오해를 하면 집을 달라하면 집을 주고, 돈을 달라하면 돈을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말씀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계속 공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것에 대한 계약의 책이 성경인데, 계약조항은 너희가 내 안에 있어서 말씀에 합당한 열매 맺히면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계약의 책입니다.
그리고 계약서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열매를 맺히는 사람이 되면, 당신의 계약을 취소할 수도 없고, 구원을 취소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약서를 기록해 놓은 책으로서 보증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도장 싸인) 세운 계약의 책입니까? 피로써 세운 계약의 책입니다.
왜 피의 계약입니까? 그 계약을 어기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시대 고대 구약시대에는 계약을 체결할 때 새나 짐승의 배를 갈라놓고 두 사람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 행동은 인감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이 계약을 어길 때에는 계약을 어긴 사람을 두 쪽으로 쫙 가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피의 계약을 합니다. 이것이 맹세로 보증하는 것입니다. 피로 맹세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이 계약을 체결한 대로 이행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반쪽 쫙 갈라지는 것입니다. 즉,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열매입니다.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안다고 그랬습니다.
생명의 열매냐? 아니면 선악과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요3:31~36)
(요3:31-34)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 혼탁함은 청함은 받았으나 아직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혹시 혼탁한 무리중에 내가 아닌지 나를 돌아 보십시다.
나는 주님에게 (말씀 안에 잠긴 나인지), 발 씻김을 받은 나인지 꼭 확인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