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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새벽의 7인> ]
이 영화는 앨런 버제스의 실화 소설 <새벽의 7인>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007 영화를 3편 만든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이 영화는 특별히 긴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전쟁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태양은 가득히>,<시실리안>,<암흑가의 세 사람> 등을 촬영한 세계적인 촬영감독인 프랑스의 앙리 데카에가 잡아낸 체코 프라하의 적막해 보이는 광장과 건물 등이 이 영화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조국이란 그 이름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이들의 눈물과 회한이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원래 영화 제목은 <Operation Daybreak>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76년 추석, 단성사에서 원작의 제목과 같은 <새벽의 7인>이란 타이틀로 개봉되었습니다. 개봉 당시엔 세인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습니다. 이는 수입사가 홍보를 거의 안한 데다 출연하는 배우들의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되고 관람객들의 입소문에 따라 가히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약 40만의 관객몰이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쓸쓸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프라하 거리, 묵직하고 장중한 음악, 격렬한 총격전과 주인공들의 비극적 최후 등이 잘 녹아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42년 체코에서 체코 망명 정부군들에 의해 결행된 나치의 체코 점령군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당시로서는 처음 선보이는 전자음의 일레트릭 사운드의 음산한 배경음악이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영화 시작과 함께 “This is True Story(이 영화는 실화다)”라는 소개와 함께 나치에 의해 점령된 조국 체코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눈밭에 낙하하는 3명의 외로운 암살대원들의 비장함이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전의 전쟁 영화라 하면 일련의 특공대원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임무를 완수한 후 장렬히 전사하거나 무사 귀환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이 영화는 임무는 뜻하지 않게 수월하게 완수하였지만 대원중 한명이 제 처자식만을 위해 조국과 동지들을 배신합니다.
이에 따라 대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는 사실적 묘사가 이전의 전쟁영화 패턴에 익숙해져왔던 관객들로 하여금 색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압권이었습니다. 모든 탈출구가 막힌 상태에서 후발대로 합류한 5명의 대원들이 차례로 숨지고 친구 사이인 두 명의 대원(얀 쿠비쉬, 요셉 카치크)만 남습니다. 물로 가득 찬 성당 지하실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상대의 머리에 비장하게 총을 겨누는 모습은 정말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총알 남았냐?”
“알맞게 남았어.”
두 사람은 권총을 다시 장전하고…… 곧이어 두 발의 총소리가 들립니다. 멜로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물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이 두 암살대원들의 애처로운 모습에 마지막 5분은 관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 성당의 기념판, 당시 총탄의 흔적
[ 간략한 영화 줄거리 ]
1938년 나치의 강압으로 독일과 체코의 합병이 이루어졌습니다. 게르만족의 독일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여 체코로부터 독일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히틀러는 언어와 인종이 전혀 다른 슬라브족의 나라 체코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강제 합병한 것입니다.
이 후 히틀러는 평소 그가 가장 아끼는 국가보안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1941년 체코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파견합니다. 하이드리히는 부임하자마자 잔인한 본보기로 1개월 동안 300명의 무고한 체코인을 사형시켜버립니다.
나치가 자랑하는 명석한 두뇌와 훤칠한 마스크, 그리고 큰 키에다 금발이 날리는 머리칼은 전형적인 게르만족의 대표적인 모습이어서 히틀러는 항상 충성스러운 하이드리히를 자기의 후계자로 꼽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태인들을 격리시키고 재산몰수와 독가스를 이용한 가스실 대량살상도 그의 사악한 두뇌의 산물이었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아이히만을 시켜 독일 및 유럽 각지의 유태인들을 강제로 붙잡아다가 대규모로 살육을 자행한 인종범죄의 주범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은 일찌감치 이 명민하고 위험한 하이드리히의 존재를 알아보았고 제거 대상의 첫 번째로 꼽히는 요주의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보부는 체코출신의 영국특공대를 그들의 고국에 침투시켜 하이드리히 암살을 계획합니다. 영국정보부는 체코 출신 특공대 3명을 차출하여 훈련시킨 뒤 캄캄한 새벽 시간에 낙하산으로 체코로 침투시킵니다.
얀과 요셉, 츄다, 3사람의 영국 특공대원은 현지 레지스탕스의 도움으로 임살 장소를 물색하여 하이드리히가 있는 프라하로 이동합니다. 이들은 히틀러가 방문 시 프라하의 기차역 교차로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감시초소를 암살 장소로 선정합니다.
암살의 날, 얀 대원이 암살용 라이플을 조준하려는 찰라, 반대편 열차로에서 갑자기 나타난 화물차가 겨누던 하이드리히의 열차를 막아버리고 지나가버립니다. 그래서 1차 하이드리히 저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후 이들은 하이드리히 암살을 다시 계획합니다. 그리하여 하이드리히가 거주하는 집에서 그가 근무하는 프라하 시내로 출근하는 시간대와 그의 동선을 확인하며 암살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합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프라하시내로 향하는 도로의 입구와 전철도로가 꺾어지는 교차로 건너편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하이드리히의 전용 벤츠가 길모퉁이를 꺾을 때 한 대원이 취객처럼 다가가 접근하여 속도를 떨어트리면 다른 대원이 재빨리 접근하여 차에 탄 하이드리히를 기관단총으로 사살한다는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거사 실행의 날, 다행히 하이드리히의 승용차는 항상 앞에서 호위하는 속도가 느린 독일군 무장 장갑차를 따돌리고 일찍 출근을 하기위해 호위를 받지 않고 장갑차를 따돌리고 단독으로 달립니다. 무장장갑차는 승용차보다 속력이 느려 하이드리히의 벤츠를 정상적으로 호위할 수 없게 돼버리고 맙니다.
거사 지점의 모퉁이 건너편 벤치에서 기다리던 한 대원이 일어서서 담뱃불을 던지는 신호로 30분 일찍 하이드리히가 나타났음을 동료 대원들에게 알립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요셉 대원은 모퉁이로 차가 돌며 속력을 떨어뜨린 순간 중절모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차로 접근하여 앞에서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네모진 가죽가방 안에서 꺼낸 영국제 스탠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러나 스탠 기관단총은 송탄 불능이 되어 발사가 되지 않습니다. 화들짝 놀란 하이드리히와 부관은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기관총이 고장이 나서 발사되지 않는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하이드리히는 권총을 뽑아듭니다.
이를 반대편에서 보고 있던 또 다른 얀 대원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깨닫고 급히 달려와 안전핀을 뽑아 수류탄을 하이드리히 차로 향해 던졌습니다. 수류탄은 폭발하고 권총으로 응사하던 하이드리히는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집니다.
수류탄이 차량 뒷부분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하이드리히는 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류탄의 파편에 의해 벤츠 승용차 가죽시트 내부의 말총성분에 있던 세균이 파편과 함께 하이드리히의 신장과 비장에 퍼져 며칠 내에 사망하고 맙니다.
(영화에서는 수류탄을 던져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총알이 차량의 연료통을 관통해서 폭파하는 바람에 그 파편이 그를 사망케 합니다)
이 사건을 접한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날대로 난 히틀러는 친위대 대장 히믈러를 직접 프라하로 보내어 국장으로 하이드리히의 장례를 치르고 암살의 배후를 캐기 위해 대대적으로 범인을 색출하도록 지시합니다. 히믈러는 1주일 기한 내에 암살범들에게 도움을 준 비호세력의 자수를 권유하고 만약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대량의 체코인 보복 살해를 감행할 것을 선포합니다.
자수자가 나타나지 않자 독일군은 암살대원들이 머물렀던 리디치라는 체코의 한 마을을 지도에서 아예 없애기로 작정합니다. 독일군은 무차별 포격을 통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을 주민들 중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 배신자 츄다
3명의 특공대원 중 추다는 어리석게도 자기 가족에 대한 체포의 두려움으로 동료들을 배신하고 자수를 합니다. 이로써 하이드리히 암살 배후가 속속 드러나 버려 관계된 민간인 레지스탕스는 거의 다 체포됩니다. 다음날로 체코를 탈출을 하려고 시내의 성당으로 피신해있던 7인의 특공대(5명은 나중에 합류)는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독일군에 은신처가 완전 포위되어 버립니다.
* 영화에서 하이드리히
독일군은 1개 중대를 성당으로 투입하여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응수하는 영국 특공대를 상대로 처절한 사투를 벌입니다. 특공대 대원들은 성당 안으로 계속 증원되어 들어오는 독일군들을 상대로 결사적인 분전으로 독일군 1개 중대 병력을 거의 전멸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독일군들의 총격과 수류탄 세례에 결국 얀과 요셉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됩니다.
얀 대원과 요셉 두 대원은 성당 지하실에 숨어서 계속 항전합니다. 그들은 성당 바깥쪽 지하실 통풍구로 독일군의 투입한 청산가스 호스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그러나 소방호스를 통한 지하실 내로 물을 채우는 독일군의 공격이 진행되자 두 명의 대원은 탈출의 희망이 없어짐을 느낍니다.
독일군은 이들 2명의 대원을 생포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결코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지하실 내부로 물은 금방 차서 그들이 서있던 목 부분까지 수위가 올라갑니다. 물에 떠다니는 나무궤짝 위에서 촛불이 꺼질 듯 말 듯한 순간 그들은 지하실에 갇힌 채 차가운 물에 몸을 떨며 서로의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대고 자살을 선택합니다.
* 최후의 사투 장소 칼 보르보이스 성당
[ 프라하의 백정,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 및 SS(친위대) 보안방첩부의 수장을 지냈고, 제국보안부장 및 체코슬로바키아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1942년 6월 4일,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슬로바키아 특공대원들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생전에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으로 불리웠습니다. 또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주요 계획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방안(집단 학살)"을 모색한 1942년 반제 회의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 초기 생애 >
독일 라이프치히 근처에서 태어난 하이드리히는 아버지가 음악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바이올린의 명수이기도 했고 제국보안본부장이 되어서도 일과를 마치고서는 음악으로 피로를 풀곤 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할 수 없었던 하이드리히는 192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26년에 해군소위로 임관한 하이드리히는 발트해 해군기지에서 통신장교로 근무하다가 1928년에 중위로 승진했습니다. 1930년에는 리나 폰 오스텐과 결혼한 하이드리히는 4명의 자식들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1931년 5월에 해군중령의 딸과 비밀리에 교제하다가 들통 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를 당했습니다. 그 중령의 딸은 에리히 뢰더 제독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었기에 하이드리히는 친위대 고관으로 승진한 후에도 해군 총사령관이 된 뢰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군에서 나온 하이드리히는 한동안은 실직자로 거리를 헤매던 중 나치당 행사장 경비를 맡았던 사람들과 어울렸고 평소 견지하던 정치 신념과 유사한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나치당에서는 하이드리히의 경력과 경험을 평가했고 곧 하인리히 히믈러의 눈에 띄어 1931년 가을, SS(친위대) 소령으로 임명됩니다.
1932년 7월, 히믈러는 SS보안방첩대를 조직하고 하이드리히를 대령으로 승진시키면서 방첩대장으로 앉혔습니다. 이때부터 하이드리히가 본격적으로 제3제국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 나치 친위대 장관 히믈러
< SS보안방첩대(SD)와 하이드리히 >
비록 하이드리히는 당의 다른 고참 투사들과 달리 신입에 불과했으나 해군에서 익힌 전문 지식과 기술, 능력을 히믈러가 높이 평가하여 방첩대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각 SS연대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던 SD요원들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이드리히는 방첩부대장으로 임명된 이래, 아마추어적이고 초보 수준이던 친위대의 정보업무를 해군 복무 시절에 배웠던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방첩부대를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업무도 해군 정보기관에서 익혔던 내용을 전수하여 조직을 강화,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비전문인력이라도 확고한 이념과 당에 대한 봉사정신만 있다면 누구라도 받아들여 훈련시키면서 방대하고도 막대한 양의 정보수집에 성공합니다. 폴란드 침공시에도 폴란드 쪽에 전쟁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방첩대의 정보조작 및 사건 조작이 큰 기여를 합니다.
히믈러는 그의 성과에 대만족했고 1934년,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인수한 게슈타포를 맡깁니다. 하이드리히는 이제 게슈타포와 방첩대 모두를 지휘하게 된 것입니다.
게슈타포가 괴링의 사설 경찰 같은 조직에서 방첩대와 융합하여 비밀경찰로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하이드리히가 조직을 맡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후에 방첩대와 게슈타포는 통합되어 국가보안본부(RSHA)로 명명되며 하이드리히가 초대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 하이드리히, 앞에 키큰 넘
국가보안본부는 제국 내 수 많은 기밀,반체제 인사 정보, 유력인사들의 부정행위 등을 수집하고 있었고 이는 정치인, 유력 당원을 넘어 국방군,친위대의 장군들의 정보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수장에 대한 암살 작전에 대해서는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여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이 발생, 그들의 수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하이드리히 암살사건 >
당시 체코의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수상 처칠은 은밀히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체코 군인 출신인 요셉 가브첵 상사와 얀 크비스 중사등 10명의 체코군인이 선발되어 영국군 특수공작부로부터 암살에 필요한 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았습니다.
* 요셉
* 얀
* 배반자 츄다
암살단은 영국공군기로 체코영내에 낙하해 프라하로 잠입했습니다. 1942년 5월 27일 이른 아침, 암살단은 트로야 다리 앞의 홀레쇼비체 거리로 향하는 커브길에서 프라하 성으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의 승용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반 경에 하이드리히의 벤츠 오픈카가 도달했는데 호위차량은 없었고 운전수만 권총을 휴대한 상태였습니다.
차량이 커브 길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자 요셉이 차량 앞으로 뛰어들면서 숨겨둔 자동소총을 꺼내 쏘았습니다. 하지만 탄환이 약실에 걸려 발사되지 않았는데 놀란 하이드리히는 운전병에게 차를 멈추라고 명령했습니다. 요셉이 달아나자 운전병이 그 뒤를 쫓았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자가 된 하이드리히에게 얀이 라이플을 꺼내 그를 쏘았습니다.
* 영화에서...
하지만 탄환은 빗나가 하이드리히는 차 밖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 때 연료통에 박힌 탄환이 차를 폭파시키면서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얀도 하이드리히가 운전병의 권총으로 난사해오자 곧장 달아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이드리히는 무사한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차량이 화재로 폭발시 튄 파편이 그의 복부와 견갑골에 박혔습니다.
* 영화에서...
하이드리히는 현장을 지나던 프라하 시민에 의해 바로 브로프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병원측은 다른 환자들을 모두 내쫓고 하이드리히 전용 응급체제를 갖추고는 현지의 외과의사들에 의해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이드리히 피격의 보고를 받은 베를린의 히믈러는 우수한 친위대 의사들을 대동하고 프라하로 달려왔습니다.
* 불타버린 하이드리히 승용차
하지만 히믈러가 데려 온 의사들에게 보이기도 전에 하이드리히는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6월 4일 오전 4시 30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향년 38세로 그는 습격당한지 일주일 후에 사망했습니다. 하이드리히의 대두를 두려워 해 히믈러가 죽였다는 암살설도 나왔지만 밝혀진 진상은 없습니다.
* 영화에서 하이드리히 장례식(프라하)
하이드리히의 유해는 관속에 넣어져 베를린으로 보내졌는데 6월 9일에 히틀러가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관 위엔 나치당의 십자기가 덮혀져 친위대원들에 의해 운송되었는데 히틀러는 장례식 당시 그를 ‘강철의 사나이’라 불렀습니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친위대원들에 의해 거창한 행진형식으로 운구되어 총통관저와 국가보안본부를 거쳐 인발리덴 묘지에 묻혔습니다.
* 장례식, 뒷모습은 히믈러
한편 체코에선 하이드리히의 부관을 지냈던 친위대 대장 헤르만 프랑크가 하이드리히가 저격당한 날로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조사와 보복이 진행되었습니다. 얀과 요셉의 암살단원들은 체코 정교회의 성 칼 보르모이스 성당에 숨어있었는데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그 외에도 13,000명의 체코인들이 체포되어 그 중 60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또 암살단원들이 머물렀던 프라하 근교의 리디체 마을과 레자키 마을은 모든 남자들이 총살당한 후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부는 히믈러가 겸직했으며 체코 지구의 책임자로는 친위대 상급대장인 크루트 다류게가 이어받았습니다.
* 리디치 마을 학살 현장
* 파괴되는 리디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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