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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제1독서 : 티토 1,1-9
복 음 : 루카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교정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형제의 죄는 꾸짖어 바로잡아야 하고, 그가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혼자 용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회개하지 못한 채, 죄에 물들게 됩니다.
혼자서 용서하고 마는 것은, 그를 꾸짖을 때 예상되는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고, 불편함의 회피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에게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와 불편해지는 결과까지도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형제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죄를 저지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곧바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큰 죄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늘 더 큽니다.
또 되풀이되어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죄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처음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지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형제가 어떠한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큰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50대 중반을 살면서, 지금까지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기회가 있기는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친구와 말다툼했고,
방과 후에 학교 근처 공터에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저의 힘에 밀려 넘어져서 제 몸 아래에 깔렸지요.
이제 주먹만 뻗으면 되는데, 차마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덤비지 마.”라고 말하고는 풀어줬습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때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맞을까요? 4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그 친구의 기억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의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1년이 지나면
중요한 세부 사항을 잊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억의 정확도가 시간이 지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이 어제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확한 기억들이
왜곡되어 뇌 깊이 새겨질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워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새로운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부정적 마음으로는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긍정적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머릿속을 채워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입니다.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심지어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길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작은 믿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길,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면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씨' 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으니,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꼭 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용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지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과 한국의 집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옵니다.
현관에는 신발장이 있고, 우산 거치대가 있고, 구둣주걱이 있습니다.
현관은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관을 지나면서 모두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수(聖水)’입니다. 달라스 성당에는 성전 입구에 세례대가 있습니다.
세례대에는 늘 일정량의 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성수를 찍거나, 세례대에 손을 적시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겁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연옥’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옥은 일종의 현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인들의 통공과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하면
연옥 영혼들은 정화될 겁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초대받을 겁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계단에 ‘난관(欄干)이 있습니다.
난간은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실내와 실외,
안전과 위험, 자유와 제한 사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간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계 설정 욕구를 반영합니다.
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넘어서거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구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난간은 보호자나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안전을 찾을 때 '난간'과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난간이 있으며,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간은 규칙과 질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범과 법적 ‘난간’을 세워 둡니다.
이러한 난간이 보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현관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난간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원로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세상 속에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의 역할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로와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마음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죄가 죄를 낳지 않도록 조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복음은 죄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인데
솔직히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이고,
특히 죄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싫고 여러분도 싫으시겠지만
가능하면 밝게 죄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아니, 더 불행해지지 않고 불행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
죄를 왜 짓지 말아야 하냐면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짓기를 그만두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니 죄 얘기를 우리가 그만둘 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죄가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선 죄가 내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죄가 죄를 낳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죄 때문에 자포자기해 더 죄를 짓지 않고,
죄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것 등입니다.
남의 죄로 인해 또한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지은 죄로 그를 미워하지 않음은 물론
나와 상관없는 죄로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말 것입니다.
다음은 내 죄가 남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오늘 주님은 꼬드겨서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꼬드기지 않았어도 곧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짓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심코 한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행위가
그에게 상처가 되고 죄짓게 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공인일수록 또 대통령처럼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많고 더 많은 사람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처지나 상태를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아 죄짓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자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자녀의 기색을 늘 살피는 엄마조차도 자녀를 죄짓게 하니
공인이나 높은 이들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무심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더욱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불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죄의 생리를,
죄가 죄를 낳는 죄의 생리를 알고 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 실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옛 어른의 말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내 안의 고통은 억지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다산>
죽음도 고통도 참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아니 자주 원인을 캐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화해함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마르티노 주교의 수도 생활에 있어서
각별한 인연 때문에 기념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컫는 성 베네딕도보다
거의 백년 전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준 성 마르티노 주교 수도승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후렴도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복된 마르티노는 임금이신 예수를 한껏 사랑하고,
지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목자 주교 성 마르티노였습니다.
성인의 생애도 참 파란만장합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 휘하의 한나라였고
성인의 평생 체험 영역이 참 넓고 깊었습니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이태리에서 성장 과정과
15세부터 25년간 군복무기간을 지낸 후 전역하는데
전투를 거부함으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 셈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전역 후 프랑스에서 성 힐라리오의 제자가 되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371년 시민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투르의 주교로 서임 되고,
수도생활도 병행하면서 주교직도 충실히 수행합니다.
오늘날 프랑스의 대표적 성인인 마르티노의 투르 성당은 대표적인 순례지로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많은 이들이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특히 본당 사목에 열정을 다했고
397년 81세로 선종했으니,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특히 성인에 관한 “성 마르티노의 외투”라는 유명한 전설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가 군문에 있으면서 18세에 세례를 받게 된 동기가 되었고
수도 성소의 계기도 된 생생한 체험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걸인을 만났고 측은한 마음에 외투 절반을 잘라 줍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걸인에게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라고
천사들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보게 되었고
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이 전설적 일화에 근거한
오늘 복음의 최후 심판에 관한 마태복음 25장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장엄한 서술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각자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의 선행을 베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였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합니다.
바로 곤궁에 처한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이들을 도와줌이
바로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참으로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는 놀랍고 놀라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곤궁 중인 이들을 내 형제라 칭하며
이들을 도와줌이 바로 자기를 도와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전례가, 기도가, 공부가.
계명 준수가 아닌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종 구원의 심판 잣대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자비를 행한 이들에게 천국행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잣대에 의한 심판은
오늘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연장선상위에 있음을 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사랑의 구원 활동에, 해방 활동에 종사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주위의 곤궁 중에 이들을 도와줌이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며 구원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구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곤궁 중에 있는 형제들과 더불어
고해 인생이 아닌 기쁨의 축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구원의 축제 옷을 입혀주시어
찬미와 감사,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1).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