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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티토 2,1-8.11-14
복 음 : 루카 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토머스 힐 그린 신부는 계약적인 주종관계와 사랑의 가족 관계를 비교합니다.
주종관계는 책임과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하지만,
사랑의 가족 관계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는 환자와 간병하는 사람의 비유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계약적인 주종관계는 환자와 직업간병인의 관계와 같습니다.
간병인이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남남이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간병인은 환자를 돌보는 대가로 돈을 받기에 생각한 만큼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간병인은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환자를 두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삶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병인은 자기에게 더 급한 일이 있다면 임종을 지키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낄 책임도 없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범위가 분명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보는 이가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내는 출퇴근 없이 밤낮으로 그를 돌봅니다.
이 돌봄에 보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만일 환자가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면, 아내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머스 힐 그린,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63-71면 참조)
오늘 복음의 종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의 그 이상을 하며 주종관계를 뛰어 넘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는 주종관계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마침내 사랑의 가족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저 몇 가지 계명과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계약 관계에 머무르지 말고,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이 되는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잘 적응되는 곳이 소셜 미디어 공간입니다.
‘친구’라고 불리는 유사 사촌이 이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멋진 모습만 있지요.
명품 가방을 옆에 두고 커피 마시는 사진, 근사한 호텔이나 풀빌라에서 수영하는 사진,
값비싼 외제 차 앞에 선 사진 등 멋진 모습이 가득합니다.
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배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페이스북 측은
‘페이스북을 수동적으로 사용하면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남들의 삶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자기만의 삶을 살면 됩니다.
행복이란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보지 않고, 소셜 미디어 공간에는 묵상 글 올릴 때만 사용하니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없습니다.
저의 글에 댓글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이 역시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보지 않으니, 관심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중독성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해야 세상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사용하지 않아야 고립감이나 배제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문명을 이용하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편한 것이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문명에서 멀어져야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이 세상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세상 것이 아닌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마땅히 주인에게 시중들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시중들기 위해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데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자기 기준으로 바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주종의 관계로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만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복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행복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 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잔뜩 해 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드는 일을 하고서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크고 작은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을 때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세상은 참 약삭빠릅니다. 언제나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고 공허한 메아리만 남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앞세우며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전례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복사, 독서자가, 해설자가, 사제가 조금 틀릴 수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더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평일 미사 독서는 홀수 해와 짝수 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가끔 독서자가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홀수 해와 짝수 해가 같지만, 독서는 다릅니다.
복음이 상황이라면 독서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가 많습니다.
독서자가 짝수 해를 읽어야 하는데, 홀수 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서자도 인식하지 못하였고,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전례는 물이 흘러가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기에 자연스럽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강론은 결론을 조금 다르게 했습니다. 진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은 이해와 용서라는 밭에서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연회를 열고 많은 신하와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연회 중에 왕의 애첩이 한 신하의 희롱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없었던 애첩은
신하의 갓끈을 몰래 끊어 왕에게 그 증거를 보여 주기로 했습니다.
애첩은 끊어진 갓끈을 왕에게 가져가며 신하의 무례함을 암시했습니다.
왕은 이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하기 위해
연회장에 불을 끄게 하고, 신하들의 갓끈을 모두 끊어 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특정하지 않고,
동시에 사건을 무마하며 연회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고사는 왕의 냉정한 판단력과 지혜로운 처세를 보여 주며,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모두의 체면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솔로몬왕도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아이의 생모와 아이의 계모가 서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왕은 그럼 아이를 갈라서 둘로 나누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계모는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아이의 생모는 아이를 계모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아이를 주겠다고 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주도록 했습니다.
아이의 죽음보다는 아이를 살리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판단으로 죽어야 할 여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여인이 부정한 행위를 하다 잡혔습니다.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예수님께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율법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이야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에서도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여름날에 성당에 와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 쌓인 오물을 꺼내는 형제님을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큰 솥에서 육수를 끓이고, 친교실 청소를 하는 자매님도 보았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에 남아있는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즐겁게 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말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인 저는 그분들의 신발 끝을 풀어드리기에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9절) 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동체 생활 안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자아의식은 어떤 것인지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너무 지나친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나도 나를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모습도
정말이지 봐주기 힘든 꼴불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본인만 스스로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자화자찬한다면,
그 얼마나 웃기는 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균형 잡힌 시선이요
한쪽으로 과도하게 지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 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쓸모 있는 종이 '나는 쓸모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진정 쓸모없는 종은
‘저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그리고 잘한 종만이,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은 종만이
저는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겸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불충실로 인해 인정과 사랑을 못 받은 종이
쓸모없는 놈이라고 야단맞으면 불충실하였음에도
제가 왜 쓸모없냐고 되레 반발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쓸모가 있다고 되레 강변하는 법이고,
칭찬과 사랑을 받지 못해 쓸모 있다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쓸모없다고 얘기하면 되레 쓸모가 있다고 강변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종의 주제이고 게다가 ‘쓸모까지 없는 종이야!’라고
수모를 주시는 말씀이거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고,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앞서 주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종을 식탁에 앉히고 주인이 시중드는 비유를 말입니다.
12장에서 이 비유를 드신 다음 17장에서 오늘의 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어쨌거나 사랑받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그러니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참 아름다운 주님의 종의 삶
“겸손, 순종,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시편37,3-4)
오늘 종의 처지 비유가 짧지만 참 심오합니다.
참 아름다운 종의 삶을 보여 줍니다.
참으로 겸손히 섬기는 종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 내용이 소중해 전문을 다시 인용해 나눕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바로 이 종처럼 사는 이가 참 아름다운 성인의 삶입니다.
묵묵히 자기 책무를 마땅히 다하는 순종과 겸손, 섬김의 자세입니다.
이런 복음의 종과 같은 이들이 의인들이며
오늘 화답송 후렴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네.”(시편37,39ㄱ)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아니라 종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해서 하느님께 보상을 계산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이런 심정의 발로입니다.
“실상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게 자랑거리는 못됩니다.
그것은 내게 부과되는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행합니다.”
감히 말하건대 매일 강론을 쓰는 제 심정도 이러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기에 전혀 자랑할 일이 못 됩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무한히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갚는다 해도 극히 미미한 일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영적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오래전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란 시가 생각납니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기쁨이요 축복이다
물 주지 않아도 거름 주지 않아도 약 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들 무리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하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그러니 이런 하느님 은혜를 생각한다면
불평이나 불만은, 원망이나 절망, 실망은 꿈에도 상상치 못할 것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책임을, 운명을 온 마음, 온 사랑으로 묵묵히 끝까지 감당할 것입니다.
저절로 겸손히 순종하고 섬기는 자세로 살 수 있을 것이고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다운 자세입니다.
바로 이런 심정을 대변하는 미사 중 ‘연중 평일 감사송 4’입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지
하느님은 전혀 우리에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섬김과 순종의 삶에 항구할 때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시어 겸손히 우리를 섬기시고 순종하십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오늘 복음의 지혜와 일치합니다.
“초연함이란 욕망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다산>
주인과 종의 자세를 확고히 함이 바로 초연함의 비결이자,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아름다운 삶의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이를 일러 수신(修身)이라 하니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대학>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신이란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인이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 관계에 투철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을 사는 이가 참 아름다운 성인입니다.
오늘 11월12일은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다 순교한 성인입니다.
성인은 1580년 우크라이나의 동방교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성인은 1618년 러시아의 비텝스코 주교로 착좌한 후
희랍정교회와 로마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다가
라틴화 되어 가고 있다고 비난하는 아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말 그대로 순교의 죽음이요, 1867년 비오 9세 교황은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니 동방교회에서는 최초로 성인품에 오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묵묵히 섬김과 순종의 삶을 살다가 순교한 겸손한 성 요사팟 주교입니다.
하느님의 종답게 겸손히 섬기고 순종하며 성인다운 삶을 살 때
주님의 미사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제1독서 티토의 고백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2,13).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