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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극복과 미국-1
올해는 6.15공동선언 20주년이며,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혹여 분단극복을 위한 작은 이벤트라도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북한 노동당 김여정 부부장의 돌발발언과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소식은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19일 오후, 남북관계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이임사에서 “최근 남북관계가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실망과 증오의 감정을 주고받는 현재 상황에서 분명하게 말하겠다”며 “결코 증오로는 증오를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 이 시대를 이 땅에서 살아온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보고 느낀 사실들을 그대로 적어 정부에 의해 감춰지고 왜곡한 이 나라 현대사의 일부나마 제대로 알리고자 한다. 한반도 분단의 과정,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 분단의 주역인 미국의 역사와 사회, 오늘의 사태가 오게 된 배경 등을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얘기가 길어 2~3회 정도 시리즈로 발표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시선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 것이므로 독자들의 따뜻한 지적을 기대한다. 본인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쟁을 만나 서울에서 시골로 피난을 갔고, ROTC 2기로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가. 분단의 과정
1. 아시아대륙의 동북부에 위치한 한반도는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과 같이 대국의 패권 다툼의 장소가 된다.
2. 1920년 6월, 소련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전폭 지지하겠다고 밝히고, 독립운동자금으로 금화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하고 그 중 60만 루블을 임정 특사 한형권에게 건네줬다.
1921년 11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우리 임정은 이승만, 김규식 등을 파견하여 일본의 한국합병을 부인하는 활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대표단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반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인사 52명의 임정대표가 참석하여 레닌과 면담하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런 연유로 해방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다.
3. 1945년 5월8일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의 제의에 따라 소련은 서부전선의 군대를 동부로 이동시키고 대일전에 참전한다. 1945년 8월9일 극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개시한 소련군은 8월11일 한반도 상륙작전을 펼쳤다.
오키나와에 발이 묶여있던 미국은 8월13일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의하여 관철시키고, 미군은 9월8일에 인천을 통해 상륙하고 군정을 실시한다.
4. 8월24일 본대를 이끌고 함흥에 들어온 소련군 사령관 치스티아코프는 조선민족함남집행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준다. 이를 계기로 평양에서 평남건준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고 사실상 북한지역의 중앙정권 역할을 한다.
1945년 9월19일, 소련극동전선군제88독립보병연단 소속 김일성은 대위복장을 하고 소련 군함편으로 원산항에 들어와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나타난다.
중국 태항산지역에서 독자적 항일 군사투쟁을 하던 조선독립동맹(연안계)은 국공내전에 불참한 병력이 행군하여 10월 신의주에 도착하였으나, ‘무장부대 귀국을 금지한다’는 미소간이 밀약에 의해 무장을 해제 당하고 중국으로 쫓겨가는 수모를 당하고 12월에서야 간부들을 중심으로 입국이 허용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창당되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국내공산당세력, 국내 민족주의세력(조선민주당),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의 보조 요원으로 발탁된 소련계가 활동한다.
5. 남한에서는 9월6일 조선공산당과 좌파를 중심으로 건준을 개편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자신들의 과거 친일 경력 때문에 활동을 자제하며 건준참여를 거부하던 지주, 자본가 및 보수 우익세력은 9월16일 한민당을 결성하고, 이들은 후에 미군정에 적극 협조한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전용기로 10월16일 귀국하여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한다. 친일파 청산을 뒤로 미루자는 이승만 주변에는 친일반민족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11월23일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정요인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다. 이들은 임정의 법통을 주장하며,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6.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 말고는 불명확했던 전후 한반도 처리 문제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논의 결정되었다. 합의사항은 ① 2주 내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② 공위와 한국인 정당ㆍ사회단체의 협의, ③ 조선임시정부 수립, ④ 공위와 임시정부 협의 하에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5년 이내의 신탁통치 협의 결정.
그러나 이 결정안이 공식 발표되기 하루 전인 1945년12월27일,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던 ‘동아일보’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미국이 즉시 독립’이라는 제목의 가짜뉴스를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이는 핵심내용인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신탁통치 실시만을 크게 부각시키고, 신탁통치를 주장한 나라를 미국에서 소련으로 바꾸어 놓았다.
모스크바 결정안의 핵심이 신탁통치가 아니라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받아들인 북한의 정치세력과 남한의 좌익과 달리, 남한의 한독당, 한민당, 이승만 계열의 우익들은 격렬한 반탁운동에 나섰다. 이로 인해 국민은 분열했고, 친일반민족자들은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를 근거로 ‘반소반공’의 기치를 들고 반공애국지사, 자유민주주의자로 변신했다.
7. 북한에서는 소련 군정의 자치권 허용에 힘입어 각 정당들과 지방인민위원회 등이 바탕이 되어 1946년 2월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 졌다. 이 위원회는 ① 일제잔재 청산, ② 토지개혁 ③ 주요 산업의 국유화, ④ 노동법 제정 등 급진적이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북의 정책과 민주개혁을 반대한 자들이나 친일반민족자들이 대거 남하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에서 강력한 반공세력을 형성하고 분단에 앞장선다. 제주4.3항쟁의 단초가 된 서북청년단의 테러와 학살이 그 실례다.
한국의 실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군정은 국내정치세력에 조력을 구하는 대신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리들을 상당기간 근무하게 했고, 최고 권력기관인 경찰 간부 80% 이상을 식민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게다가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들이 공장의 원료나 값나가는 기계 등을 빼돌리는 부정부패가 횡행하면서 공업생산량이 급속히 줄었다. 더욱이 미곡자유판매제도는 식량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자본가와 지주, 중간모리배를 살찌우는 미군정의 실정에 남한 국민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46년 9월 이후 전국적인 민중항쟁으로 나선다; 대구10월항쟁, 제주4.3봉기, 여수-순천사건 등.
8. 제1차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적극적으로 모색하여 7월에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도 신탁통치문제, 토지와 주요산업의 처리문제, 친일파 처리 시기 등에서 의견이 엇갈려 결렬되자 여운형은 위원회를 탈퇴하고,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9. 1947년 3월, 서유럽부흥을 위한 마샬안 등을 포함한 ‘트루먼 독트린’은 대소 봉쇄정책이었다. 1948년 4월,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가졌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가 참석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남한은 1948년 8월15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정부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은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나. 분단의 심화
1. 출발부터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법에 의해 활발히 활동 중이던 반민족행위특볍조사위원회를 습격하여 무력화시켰다. 또한 국회 내 소장파와 중도파를 ‘북한 프락치’로 몰아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 반 이숭만 진영의 중심 김구 암살 등을 통해 독재체제를 완성한 후 북진통일론을 내세워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했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신생 독립국가 가운데 독립운동자나 민족진영 인사가 배제된 채, 반민족행위 처벌 대상인 세력이 집권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나라가 한국 외에 또 있을까? 한국전쟁 9.28수복 당시 북한군은 철수하면서 상해임정요인을 비롯한 정인보, 안재홍 등은 차로 모시면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나 이광수 등은 오랏줄로 묶어 북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2. 북한이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3월5일 토지개혁법을 전격 공포하고 실시한다. 남한에서도 온 국민의 숙원인 농지개혁법(유상매입유상분배)이 1949년 6월21일 공포하고, 1950년 3~4월에 실시했다.
농지개혁을 주도한 조봉암은 1956년 5월 대선에 출마하여 총투표수의 30%를 얻는 이변을 일으키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인 반공을 위반했다며 정당등록을 취소하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사형시킨다.
3. 북한은 1949년 3월17일 소련과 경제문화협정을 맺어 모든 분야에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중국과도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 약4만 명이 귀국하여 북한 인민군에 합류한다. 그 위에 소련의 잉여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북한군은 모든 면에서 남한군을 압도했다.
참혹했던 3년1개월의 전쟁사를 여기서는 생락한다. 다만 2 가지 즉 전시작전통제권 이양과 민간인 학살을 되돌아본다.
3-1. 6월27일 미국은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통해 북한군의 ‘평화의 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UN군 파견을 이끌어냈다. 7월8일 UN은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7월14일 이승만은 한국군 통수권을 UN군 총사령관에게 넘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군의 군통수권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군사령관이 행사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조선군 통수권을 명의 사령관에게 넘겨준 역사와 같다.
1940년 9월,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중국 땅에서 중국군의 원조로 운영되어 어쩔 수 없이 중국군사위원회에 귀속되었으나, 임정은 끊임없이 9개준승 개정을 요구하여 1945년 4월, ‘원조한국광복군관법’을 체결하여 임정의 군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에 환수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2015년으로 연기하더니, 박근혜 대통령은 무기한 연기한다. 현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환수하기로 잠정합의했으나 미군에 의한 임무수행능력 검증이 통과될지 의문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대 군 장군들의 반대다.
3-2.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었지만, 그 참혹함 가운데 인명피해만 해도 약30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최소 100만 명이 리느느 민간인 학살이다.
4-1. 남한의 군경은 국민보도연맹위, 전국형무소에 기결·미결수, 통비분자 소탕 명분으로 약30만 명을 학살했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1950년 미군과 국군의 점령시기(10월~11월 50일 동안) 북한지역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약172,000 명이란다.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전쟁기간에 폭격이나 학살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282,000명으로 파악된다. 미군은 산업시설과 더불어 농업시설에도 공습을 감행하여 주요 저수지를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3-3. 중국군의 참전으로 미군이 밀려나자 맥아더 사령관은 핵무기 사용을 주장한다 평양과 원산지역 그리고 조만 국경지역에 약 15개의 핵무기를 투하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문제는 이 주장을 이승만 대통령이 적극 지지하였고, 후에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 방문 시 맥아더를 예방하고 지지의사를 나타냈다고 전한다.
전쟁 기간에 북한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6천 톤이었다. 이건은 태평양전쟁 3년8개원 동안 사용한 양과 맞먹으며, 2차 세계대전에 독일에 투하된 폭탄 량보다 훨씬 많다. 민간인 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야만이다.
3-4. 인공치하 서울에서 간신히 살아난 우리 식구는 1951년 1월, 부모님의 고향인 충남 아산군 신창면으로 피난을 갔다. 예전엔 평안했던 마을이 뒤숭숭한데 연유는 1950년 연말 경, 조그만 마을에 온양경찰서 경관과 치안대(우익청년단 등)가 들이닥쳐 인공치하에서 부역한 혐의자 가족 20여 명을 잡아 마을 뒷산 계곡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을 했다는 것이다. 혐의자들은 미리 도망가고 나머지 부녀자나 아이들이 대상이었단다. 야만의 연좌제다.
이는 9.28수복 직후,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로 시행된 ‘비상사태하에서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의한 것이었다. 시행 10여 년 동안 14,000여 명의 처벌되어, 위헌소송이 있었는데, 5.16 군사정변세력은 재심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국가의 거짓에 속아 인공치하에서 고생한 국민들에게 사과 대신 처벌을 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빌미로 정적을 제거했고, 반민특위 혐의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감출 수 있었단다.
적의 가족이거나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앞의 보도연맹사건과 함께 이는 이 나라 토착왜구 발호의 시작이었다.
4. 1963년 12월 14일 대법원은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한다. 북한의 김일성 수상은 남한의 군사정변 지도자 박정희를 만나 모종의 협상을 하기 위해 특사로 황태성을 뽑아서 파견한 것이다.
5. 남북한은 1991년 UN에 동시 가입한다. 이때 한반도 주변 4개국은 남북한을 교차승인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는 남한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었으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6.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서 만들어진 6.15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시작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이 2008년 이명박 정권에 의해 금강산관광이 금지됐고, 2016년 박근혜 정권에 의해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북한 정권은 꾸준히 재개를 원했고, 급기야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요청을 문재인 대통령이 받아들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 분단의 교훈
1. 남북분단이 외세의 개입에 의한 것이기는 해도, 당시 국민의 안위나 국가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앞세운 당시 남북지도자들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여운형, 김구 선생의 암살이 그를 대변한다.
2. 1985년 고르바쵸프 소련 서기장의 개혁개방 선언을 계기로 지구상에 체제경쟁과 이념전쟁은 끝났다. 따라서 한반도 안에서 색깔론도 30여 년 전의 유물이다. 게다가 남-북한은 1991년 UN에 동시 가입한 주권국가이므로 상호존중해가며 평화공존을 해야 한다.
1991년 남북한 동시 UN가입 시 교차승인을 약속하고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지 못하게 한 미국의 세계전략의 속내는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아 중국의 팽창을 막겠다는 것이다.
3. 2008년 이명박 정권은 8.15광복절 행사를 건국절로 승격시켜 치르기로 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요점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와 북한의 존재와 업적을 무시하고 실질적인 건국의 주역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정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각광을 받고 그들이 쓴 ‘반일종족주의’ 책이 베스트셀러 위치에 올랐다.
이에 따라 국립현충원에 모셔저 있는 일본군 장교(빈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 있는) 56명의 묘의 처리에 관하여 국가보훈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극우단체는 욱일기를 들고 나와 위안부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요구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나머지 과제는 다음 회로 미룬다.
2020. 06.25, 맹 행 일
분단극복과 미국-2
지난 회에서는 분단의 과정과 그 결과로 빚어진 힌국전쟁을 돌아보았다. 독일과 달리 전범국 일본 대신 한국이 분단된 지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의 먹구름이 덮여있다.
이번에는 분단 주역의 하나인 미국의 역사를 돌아본다. 지구상에서 유독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한 천사 표 선입견이 일부나마 바로 잡혀지기를 바란다.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가. 미국 역사
가-1. 독립과 팽창
1. 동인도회사 적자를 메꾸기 위해 1773년 5월, 영국은 미국식민지에 차세법을 공포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대표들은 1775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2차대륙회의를 열어 대륙군 창설을 결의하고 G. Washington을 사령관에 지명한다. 1776년 7월4일, 식민지대표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6년5개월의 독립전쟁 결과, 1782년 12월5일, 영국왕은 의회에서 미국독립을 승인했고, 1783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조약문에서 미국의 국경은 서쪽은 미시시피강이고 남쪽은 스페인령 Florida였다. 초대 대통령에 G. Washington이 취임하여 2번의 임기를 마치고(1789~1997) 물러난다.
제3대 대통령인 T. Jefferson 이 초안한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 받았다.”
2. 전쟁 승리의 원인 가운데 서구 열강의 군사원조가 있는데, 특히 프랑스의 군사원조는 절대적이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1778년 6월에 대영 선전포고를 한다. 이의 후유증으로 프랑스 국가의 과다한 부채가 프랑스혁명(1789)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인민주권의 공화정의 확산을 방지하고자 인근 절대국가들이 대프랑스동맹을 맺고 침범해오자, 프랑스는 이에 대항해 7차례나 전쟁을 치르는데 미국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중립을 지킨다.
3.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스페인을 점령하고 페르난도7세를 폐위시키자 남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멕시코의 경우 1810년 9월16일, 미겔 이달고 신부의 주도로 시작한 투쟁은 1821년 8월24일 코르도바조약 체결로 독립을 쟁취한다.
3대 대통령 T. Jefferson 재임 때 미국은 프랑스의 Napoleon 황제로부터 미시시피강 서부 루이지애나로 불리는 광대한 영토를 사들인다.
4. 1836년 멕시코 영토인 텍사스가 미국인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멕시코군이 진압에 나서자 미군이 개입하여 텍사스는 독립을 얻어(벨라스코조약), 멕시코공화국을 선포한다. 1844년 미국이 텍사스공화국 합병안을 발표하자 멕시코는 반발한다. 국경인 리오그란데강에서 군사 충돌이 나자, 1846년 5월12일 미국은 대 멕시코 선전포고를 한다. 신생독립국에 잦은 군사쿠데타와 보수파와 지유주의파의 대결로 국력이 소진된 멕시코는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1848년에 과달루페하달고 항복조약을 맺는다. 이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절반에 달하는 California, Nevada, Utah, Arizona, New Mexico 알짜배기 땅을 얻어 태평양 진출의 터를 마련한다.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가로서 자리매김한다.
5. 1861년 3월, 링컨 대통령이 취임하자 노예제를 갖고 대립하던 남부 11개주는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북전쟁의 막이 오른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참혹한 전쟁은 1865년 4월 9일 남부 사령관 리 장군이 북부 사령관에게 항복함으로 막을 내린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월1일 노예해방 선언을 하고, 1864년에 재선에 성공하여 취임했으나, 1865년 4월14일 암살된다.
6. 1898년 4월28일~8월12일,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가 일어난다. 쿠바의 독립운동을 스페인이 거부하자 미국이 이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미국의 대 숭리로 미국은 Cuba, Philipine, Guam, Puerto Richo를 차지한다. 미국이 군사력을 이용한 제국주의 정책을 편 하나의 사건이다.
1905년 7월29일, 미국은 일본 도쿄에서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는다. 미국의 필리핀에 데 대한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다는 비밀협약이다.
7. 1894년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미국 영토 내에서 1491년에 1,400만 명이었던 원주민 수가 1920년에는 불과 24만4천 명으로 약 98%가 감소했다. 정부의 보호 정책에 힘입어 1990년 인구 조사에서는 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류학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은 인디언을 착취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노예로 삼았으며, 영국인들은 인디언을 살해했다“ 1970년에 매사추세츠의 왕파노아그족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추수감사절을 ‘민족 애도의 날’로 기리기 시작했다.
가-2. 근대화와 개혁
1. 남북전쟁 이후 철도 확장과 그에 따른 산업발달로 대규모 기업가가 등장한다; Andrew Carnegie, Rockefeller, Swift, Vandebilt, J.P.Morgan 등. 그러나 대자본가에게 의한 독점화는 노동환경 악화, 제품 가격 인상 등 부작용이 나타나, 1877년 철도총파업을 시발로 저항운동이 등장한다.
2. 세계 노동절의 기원인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은 다음과 같다. 하루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하며 벌린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죽은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다음날인 1886년 5월4일 다시 모인 군중을 경찰이 강제진압하자, 경찰을 향해 폭탄이 터져 경찰 7명, 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법원은 혐의자 7명에 사형, 1명에 15년 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한다. 범인과 범행 동기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노동연맹(AFL)이 창설되어 보수주의적 산업화 시대에 살아남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미국의 노동운동은 실패했다. 농민운동도 마찬가지.
3. 1901년~1917년 기간을 혁신주의 시대라 부른다. 이들 개혁가들은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진화론과는 달리 인간은 경쟁보다는 협력으로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은 그가 속한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1901년 9월, 취임한 공화당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거대 철도기업연합인 북부증권회사를 해체시키고, 이후 44개에 반트러스트 제소를 한다. 이어 1906년 정육검사법, 순정 식품의약법 등은 정부가 국민의 위생과 건강문제까지 개입하는 선례가 됐다.
1912년 당선된 민주당의 Woodrow Wilson 대통령은 취임 후 가장 먼저 관세문제를 다루어 958개 품목에 관세를 평균 10% 인하하고,, 세수 결손을 보완하기 위해 누진소득세법를 통과시켰다. 이어 금융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부 주도하의 금융체계를 만들기 위해 연방지불준비법(Federal Reserve Act)를 통과시켰다. 1914년 윌슨은 연방통상위원회법, 클레이튼 트러스트 금지법을 제정했다.
4. 제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는 개방과 다양성 대신 폐쇄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공산주의자의 탓으로 돌렸다. 이는 1920년대 반이민 정서로 이어졌고 이는 남부를 중심으로 인종편견으로 이어졌다.
사회는 보수주의로 급선회하여 1920년대 3대 연속 공화당이 압승하여 다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고 사회는 양극화된다.
1920년대 미국은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 붐이 전개되고 ‘번영의 10년‘을 구가한다. 컨베어벨트 라인을 통해 대량 생산되는 포드의 ’T형 자동차’가 이 시대를 상징한다.
5. 1929년 10월24일, ‘검은 목요일’의 증시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사회를 흔들었고, 실업률 25%, 1932년 Franklin Roosevelt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행동하는 행정부’를 약속하고, 뉴딜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농업조정법, 전국산업부흥법, 주택소유자 대부법, 국가노동관계법 등을 제정했고, TVA사업 등 국가주도 공사를 주도했다.
6. 유럽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고도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한 미국은 1935년에 제정된 ‘중립법’을 준수하고, ‘무기대여법’을 만들어 영국과 소련에 무기대여(외상)를 한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연합함대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미국은 12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대공황을 완전히 극복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150년 동안 지켜왔던 자유방임주의를 종결짓고, 정부주도형 사회복지국가 새 길로 나섰다.
나. 냉전시대와 Pax Americana
1.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유럽의 승전국 경제는 크게 저하하고 패전국 독일 경제는 황폐화한다. 러시아는 혁명으로 세계경제에서 이탈한다. 반면 연합국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병기창 역할을 한 미국은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연합국에 자금도 제공하여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이 높아졌다.
2. 제2차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고, 피해도 가장 적었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원자폭탄으로 대변 되는 등 과학기술 · 군사기술 면에서 다른 나라와의 차이를 크게 벌렸다. 전 세계에서 미국의 비중은 1953년 기준 공업생산이 51%, 수출이 19%, 공적인 금보유량이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3. 이런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은 세계의 정치 · 경제 질서의 수립과 유지를 주도하였다. 우선 경제면에서 ‘IMF 체제’를 통해 통일적인 국제통화금융체제를 재건하고,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는 ‘GATT 체제’를 주도하여 전후 세계무역체제의 틀을 구축했다.
4.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국방비를 삭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있던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천우신조’라고 반겼다(딘 애치슨 국무장관). 경기침체와 실업 증가로 몸살을 앓던 미국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국방비는 4배 가까이 중액 됐고, 군사물자 생산은 7배로 늘었다.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을 통해 대소봉쇄정책을 선언하고, 교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재무장시켰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패권을 완성했다.
5. 태평양전쟁 기간 일본군에 밀려났던 프랑스군이 1946년 베트남에 다시 상륙하여 베트남군과 싸우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항복하고 철수한다. 1954년 제네바정치협상에서 미국의 주도로 북위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할된다.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북폭을 개시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에서 패전하고 철군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 국제수지의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직면하자 미국은 1971년 달러화의 금태환을 정지한다. 이는 달러의 금태환을 기초로 한 IMF 체제(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것을 의미한다.
6. R. Reagan 대통령 재임 시, 영국의 M. Thatcher 수상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을 도입 시행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세계화를 배경으로 UR 타결, WTO 설립 등을 통하여 후진국들도 공산품은 물론 농산물과 서비스업 분야까지 개방을 강요하여, 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7. 1990년대 들어 옛 소련과 동유럽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미국은 정치 · 군사 면에서 경쟁자가 없는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고, 경제력도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8. UN안보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은익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일으킨다(2003. 3.20 ~ 2011. 12.15). 이 전쟁으로 이라크인 사망자 수는 이라크 정부발표가 2005 ~ 2009 사이 87,000 명에 비해, 민간단체(Iraq body count) 2019년 까지 18 ~ 21만 명이고, 의학전문지(The Lancet)는 65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다. 마치는 말씀
1. 미국은 국민주권을 표명한 최초의 공화국을 가진 나라다.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 받았다” 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지난 240년의 역사에서 사람이란 미국 국적의 백인, 기독교인에 한정되었다.
2. 미국은 무력으로 흥한 나라다. 대 멕시코전쟁, 대 스페인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고, 1,2차세계대전으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도 요즘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있다. Texas, California 땅은 원래 멕시코 영토를 무력으로 강탈한 것인데도.
3. 미국은 관세문제로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이후 꾸준히 고율의 관세정책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해왔다. 그런데 최근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후진국들에 시장개방을 강요하고,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관세를 무기로 쓰고 있다.
2020. 06. 29, 맹 행 일
분단극복과 미국-3(분단극복 노력)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가 된 지 75 년이 훌쩍 넘었다.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지 않고 있어 언제라도 선전포고 없이 열전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여행할 수 없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오늘은 정전협정 이후 남북이 펼쳐온 분단극복 노력을 되돌아보자. 75년 동안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자연히 분단극복의 장애물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대책이 보일 것이다.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따뜻한 지적을 기대한다.
가. 휴전협정 이후 6.15공동선언까지
1. 제네바 정치회담
1953년 7월27일, UN군 측 대표와 북한군과 중공군 측 대표가 맺은 휴전협정 제4조 60항에는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와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고위정치회담을 열기로 건의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따라 1954년 4월26일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열리는데, 제1주제는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었고, 제2주제는 베트남 통일이었다.
제1주제 참가국은 한국 외에 UN참전국 15개국 대표와 북한, 중국, 소련의 19개국이었다. 한국 대표 변영태 외무장관은 ‘대한민국은 UN이 인정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다. 그러니 UN 감시 하에 북한에서만 자유선거를 해야 한다. 이때 UN군은 남고 중공군은 북한 땅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북한 대표는 “중립국 감시 아래 한반도 전체 자유선거를 하자”고 대응한다. 한·미 대 북·중·러 안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대결하자 UN 참전국 대표들이 중재를 시도한다.
회담이 결렬되려 하자,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가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협상을 요구했으나 덜레스는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는 종결된다.
2. 휴전협정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군하게 되고 군사적 공백을 우려한 한국의 요청으로 1953년 10월1일 한미 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한다. 조약문은 전문과 6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서류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가 있다.
* 조약문 제4조를 보면, 상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3. 1960년 대 이후 북한은 남한에 대하여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오다가, 1980년 대 이후에는 평화협정 체결 요구 상대를 미국으로 바꾼다. 또한 남한에 대해 쌍방 군사력을 10만 명으로 감축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이면서 북한의 경제규모로 남한과 같은 국방비 예산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4. 1969년 7월, 미국은 Nixon Doctrine을 채택하고, 한국에 남북화해를 종용하며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한다.
남북한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 평화 ·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이후 남북 간에는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등 대화가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유신체제성립과 김대중 납치사건을 빌미로 대화를 단절하고, 곧바로 미뤄왔던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체제를 강화한다.
5. 1975년 11월18일, 제30차 UN총회에서 한반도평화통일 관련 결의안이 통과된다. 내용은 ① UN군 사령부 해체, ② 주한 외국군 철수, ③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④ 남북한 동등한 수준으로 군비 축소.
이 결의안은 아직도 이행된 게 하나도 없다.
6. 1984년 북한은 남한의 수해복구를 위한 원조불자를 보낸다.
7. 민정이양과 한반도비핵화 선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결과로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가 공식 출범한다.
1985년 소련의 개혁개방 선언 이후, 1989년 12월 몰타에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수상이 냉전 종식선언을 한 영향으로, 1988년 7월7일,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을 발표한다. 이의 정식명칭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크게 변화한다.
1991년 9월17일, 남북한이 동시에 UN가입.
1991년 12월18일, 노태우 남한에 비핵화 선언. (북한은 미국이 1957년 남한에 핵무기를 반입한 이래 줄기차게 한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했다)
1991년 12월31일,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
8. 1994년 7월8일, 스위스 Geneve에서 북한의 핵동결을 위한 북미회담이 개최되어 성사된다.
이는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미국계 한국인 2명을 체포하여 간첩혐의로 중형을 과하자, 북미관계가 악화되고, 전쟁 위험이 다가왔다. 이에 재미 학자 박한식의 중재로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가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만난 결과다.
1994년 10월21일,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위한 ‘북·미간 제네바 합의문’ 조인된다. 합의문은 북한의 핵무기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북·미 관계 개선과 북한에 경수로 2기와 중유 등을 제공하기로 한다.
카터와 김일성 회담에서는 Geneve 북미회담 성사 외에 남북한 정상회담이 합의된다.
● 2002년 1월29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축’으로 지목하고, 선전포고 없이 핵타격도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9. 1994년 7월9일, 북한주석 김일성이 사망한다. 7월25일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실망이 컸는지, 대북 조문사절도 거부한다. 이에 비해 미국은 조문사절을 보내 미국 대통령의 조문편지를 전한다.
나. 6.15공동선언 이후
1. 1998년 10월, 대규모 소떼를 몰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을 만나, 남북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2. 금강산관광은 1998년 11월16일, 현대아산그룹의 주도로 해로를 통하여 시작하여, 2003년 9월 육로관광이 시작되고, 이후 2007년 내금강까지 확대하고 개성관광이 시작된다.
2008년 7월11일, 관광객 1명이 북한 경비병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명박 정권은 사업 전체를 중단시킨다.
3. 2000년 6월15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나 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한다. 내용은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통일, 경제협력, 남과 북의 통일 방안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 선언의 결과로 대규모 비료와 식량 대북지원이 성사되는 등 햇볕정책이 시행된다.
북한은 이 협정을 최고인민회의의 비준 동의를 거쳐 국가정책으로 확정했으나, 남한은 아직도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4. 개성공단은 2004년 6월 착공식을 갖고, 2004년 12월15일에 첫 제품을 생산했다. 2007년 100만 평부지 1단계사업이 마무리 되어 125개 기업이 가동 중이었다. 개성공단 교역액은 2004년에 4천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12년에는 19억5천만 달러에 이르러 2013년 현재 남북교역액에서 99.7%를 차지했다.
2008년 ‘비핵개방3000’을 정책으로 내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의 시련이 시작된다. 기숙사문제를 비롯해 시급히 풀어야 할 현안들이 방치되더니, 2010년 5.24조치를 발표하여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시켰다.
2016년 2월10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폐쇄를 명령한다. 이유는 1월6일 4차 핵실험과 2월7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였다.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무자들에 지급되는 임금이 북한의 국방비로 전용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 개성공단 근로자의 월평균임금은 60시간 근로에 129달러(15만 원)였다(JTBC뉴스).
5. 2005년 9월19일, 베이징의 제4차 <6자회담공동선언>에서 북한은 미국이 체제를 인정하고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주면 ‘핵 포기’를 하겠다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위조지폐 발행‘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북한의 BDA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등 제재를 강화하여 이 선언을 파기한다.
6. 2007년 평양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3일 간의 정상회담 끝에 ‘10.4남북공동선언’을 한다. 주요 내용은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상호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로의 전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3자,4자회담 추진, 남북경제협력사업의 활성화, 사회문화 분야 교류와 협력,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이다.
7.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므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대화로 전환된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회담과 9월19평양회담 2차례 남북이 정상회담을 가졌고, 문재인 대통령의 주선으로 북미정상회담도 3차례나 열렸다; 제1차 싱가포르회담(2018. 6.12), 제2차 하노이회담(2019. 2.27), 제3차 판문점회담(2019. 6.29).
그러나 북미정상회담은 아직 성과가 없다. 단계적 대북제재 완화와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북한에 대해, 리비아식 선비핵화 이후 제재완화를 주장하는 미국 측이 접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노이회담의 경우 북한은 싱가포르회담 때 미국과 한 약속한 대로 핵포기의 증거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고, 영변 핵시설을 무력화시키고, 동창리 미사일발사장도 제거했다. 그 위에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5가지만이라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마저도 거부하여 공동선언문도 채택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8.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법적 근거는 한미 SOFA 제5조에 근거하는데, 이 규정은 ‘한국정부가 제공하는 시설과 구역 외 모든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 ’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문제의 방위비 분담금은 예외적 조치에 해당한다.
이 예외적인 조치, 특별협정이 체결되기 전 초기에는 1989년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4,500만 달러를 지불하기 시작했고, 1991년 1차 특별회의에서 1,073억 원에서 그 액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9년에 1조389억 원에 이르렀다.
그런데 올해 미국 측은 50억 달러를 요구하다가 40억 달러(4조9,500억 원)로 깍아 주고 요지부동이다. 1년 만에 380% 인상을 요구하는 꼴이다.
9.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은 OCA회원국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북한의 미녀 응원단과 국기계양 및 국가연주는 국민들에게 신선한 변화를 느끼게 했다.
10. 2019년 1월23일, 북한에 독감치료제 타미플루를 싣고가는 인도적 지원차량을 미국이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 사태가 발생했다. 2019년 6월에는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기념 남북공동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금강산을 가는 남측대표들의 카메라와 노트북을 압수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략물자 반출금지가 목적이라는데, 의도적인 남북교류를 방지한다는 비판도 있다.
11. 한미연합훈련이란 매년 8~9월에 하는 을지프리덤가이던스(UFG), 키리졸브(KR), 독수리연습(FE) 등이 있다. 북한은 이를 매우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이를 빌미로 괌이나 일본에서 핵폭격기, 핵항모, 핵잠수함 등이 한반도로 오기 때문이다. 아직 종전선언도 못한 상태에서 이들 핵공격 무기들이 접근하는 터라 두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휴전협정 위반이기 이전에 UN헌장 위반이다.
다. 마치는 말
1. 도올 김용옥이나 재미학자 박한식은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니라 주체사상국가라고 한다. 주체사상이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등의 모든 분야를 규정 지배하는 통치이념이다. 쉽게 말하면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지도적 지침으로 정치에서 자주(自主), 경제에서 자립(自立), 국방에서 자위(自衛), 사상에서 주체(主體)를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원리가 사람중심철학이고, 사회, 역사 원리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니 이들이 주인다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원리다.
2. 북한 핵폐기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는 우리말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의 준말이다.
이는 2003년 8월27일 제6차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했으나, 북한이 반발하여 철회하고 2004년부터는 포괄적비핵화(Comprehensive Denuclearization)로 대체되었다.
3. 2020년 6월16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에 따라 그해 9월에 문을 연 상징적 건물이 사라진 것이다.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문을 통해 남한이 “한미 실무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 물고 사사건건 북남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 받쳐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비난한지 12 일만이다.
이에 앞서 자난 1월, 경실련통일협의회는 남북관계 전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어 “남북관계 복원을 가로 막는 한-미워킹그룹을 즉각 폐쇄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워킹그룹을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4.27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아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으면 길이 열리기 마련”이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7월2일 최근 폐지론이 일고 있는 한-미워킹그룹과 관련해 “한-미가 최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어떻게 운영방식을 개선할지 논의했다”고 밝혔다.
4. 요즘 ‘죤 볼턴의 회고록’이 화제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읽어본 사람들의 얘기는 분노를 넘어 참혹함을 느낀단다. 미국 네오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전략, 한반도 8천만 동포들의 생존권을 무시하는 비도덕성, 거짓으로 비하하는 남북한 지도자 폄하하기 등. 그런데 이 나라 보수언론과 제1야당을 이 책을 근거로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는데 활용한단다.
5. 남북관계의 목표는 현재 평화정착이다. 북한의 ‘핵 폐기’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면 북한의 ‘핵 폐기’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는 북한이 핵보유를 안 해도 될 때 가능하다. 그러려면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선언을 하고,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고 수교가 이루어지면 될 것이다.
2020. 07. 08, 맹 행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