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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티토 3,1-7
복 음 : 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믿음이 청원과 감사와 함께 커져 간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비를 청하고,
주님 말씀대로 사제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청한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다시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의 업적임을 알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이만
예수님께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와 감사기도를 통하여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청원 기도를 하고 그 청원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진 체험을 한 뒤,
그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릴 때 우리 믿음이 커지고 굳건해 집니다.
필요할 때 애타게 청원 기도를 해도 그 청원이 어떤 방식으로 응답받았는지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깊어지지 못합니다.
삶의 중요한 시기와 고비 때에 절실하게 주님께 매달렸지만
그 시기를 넘긴 다음에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많은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그때 참 열심히 기도드렸고, 주님과 가까웠다고 추억하지만,
믿음이 크게 굳건해지지는 못하였던 듯합니다.
이처럼 청원 기도를 바치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굳은 믿음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청원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깊이 체험하고 이에 감사하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믿음이 커지고 굳건해지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꼬리 없는 원숭이가 쌍둥이를 낳는데, 그중 하나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쏟으며 정성껏 젖을 먹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외면하고 소홀히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건강하게 어른이 되는 쪽은 홀대받던 새끼였습니다.
정성껏 키운 원숭이는 어미 원숭이가 꽉 껴안는 바람에 젖가슴에 질식해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홀대받던 새끼만이 어른 원숭이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잘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품에만 안고 사는 부모의 모습에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운동회 때 가족이 모두 와서 응원하는데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비가 오면 어머니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데,
저는 늘 비를 맞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원망의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힘을 어렸을 때부터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만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상황만을 찾으면, 정작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각종 이유를 들여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함 안에서 감사를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불만보다는 감사를,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 한껏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셨지요. 그래서 그들의 병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때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겠지만,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열 사람이 치유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만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자기의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감사의 마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을까요?
믿음이 없으면 감사의 기도도 바치지 못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고,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홉은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았을까?
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 명의 나병환자와의 인터뷰'라는 존슨 그나나바라남의 꽁트에서 한 기자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소.
혹시 재발할지 모르지 않소. 그래서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선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감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소.”
또 다른 사람은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하는 일을 까맣게 잊었소.”
또 다른 사람은
“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었소. 그런데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다수를 따르오. 그래서 나도 돌아가지 않았소.”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한 사실에 대한 기쁨에 머물며,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돌아옴’과 ‘새로운 출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베풀어진 자비를 입고, 그에 합당한 ‘응답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를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변화된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요 기적이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오고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 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어,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의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2-13)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외칩니다.
"멀찍이." 전염 가능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합니다.
아마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는 예수님 마음도 그리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환자들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치유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가서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당신은 치유를 결심하셨기에 한시도 지체하지 않게 하신 것 같습니다.
또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삼가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마음도 존중하신 것이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예수님 분부를 "믿고"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또 기뻤을까요? 아홉 명은 말씀하신 대로 사제를 찾아 달려간 것 같습니다.
어서 '정결한 상태'라는 선언을 듣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요.
그런데 한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감사드리고 싶어서였지요. 그에게는 공동체의 정결 선언이나 복귀 허가보다
예수님께 올리는 감사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과 거리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바로 발 앞, 그분 가까이까지 다가옵니다.
그와 예수님 사이는 거리도 가까울뿐더러 아무 장애물이 없습니다.
감사를 잊지 않은 그는 치유만이 아니라 "주님 가까이"라는 관계성까지 획득한 겁니다.
감사는 거리를 좁힙니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거리도 친밀하게 바꿉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를 내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보여주고, 축복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치유 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회복과 더불어
주님 가까이를 차지했던 영적 경험까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 3,5)
우리가 받는 은혜와 도움은 우리 자신의 공이 아닙니다.
죄악으로 부패해 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영육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주님 자비의 덕입니다.
이 기적은 때로는 멈추어서, 때로는 가는 길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서 이르시는 대로,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그분의 뜻이 내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 능력 밖의 일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곧 인생일 터이니,
주님 발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점점 더 작아져 가면서 바칠 수 있는 건 감사뿐입니다.
겸손하고 솔직할수록 감사는 더 깊은 진정성을 띱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감사는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친밀한 행위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신 주님이시건만, 보잘것없는 우리 감사에 그분은 감동하고 행복해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내밀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과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는 것이지요.
주님 "멀찍이서" 맴돌지 말고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속삭이는 찬양과 흠숭과 영광,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서 흡족하고 기쁘실 겁니다.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 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 주셨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인 한센인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드렸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다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사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빠진 묵상은 기도가 될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4년 5월 15일에 방영된 EBS ‘리얼체험 땀: 링 위에서 세상을 배우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방황하던 한 고교생 영대(19)가 있습니다.
영대가 일정 시간 권투를 배우며 땀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영대는 ‘자신은 방황하는 중이고, 그런 자신을 붙잡아줄 강한 스승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영대의 스승은 박현성 관장(47)입니다.
과거 자기 모습과 꼭 닮은 모습인 영대를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둘의 첫 만남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영대는 박현성 관장 앞에서 의자까지 들며 위협합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영대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링 위에서 보여줍니다.
영대는 갈등합니다. 권투를 계속 배울지. 그리고 배우기로 합니다.
이제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박 관장은 다시 마지막 권투 스파링하자고 합니다.
박 관장은 과거 권투 유망주였지만, 올림픽 문턱에서 두 번이나 좌절한 후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삶을 비관해 분신자살까지 시도하면서
인생에 기권을 선언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온몸에는 화상의 흔적이 있습니다.
박 관장은 자기 다리를 만지게 합니다.
딱딱하게 굳어 굽혀지지도 않는 몸으로 자신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지막 스파링에서는 영대가 자신을 한 번도 때리지 못하자
양손을 등 뒤로 하고 한 대 강하게 맞아줍니다. 방송 PD가 묻습니다.
“사부님은 왜 헤어지기 전에 대결하자고 하셨을까요?”
“점점 나아지는 내 모습을 보라고 그런 거 아닐까요?
저한테…. 느껴보라고. 딱 하나 정확한 게 하나 있어요. 생각하는 게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난 안 되겠다.’ 이런 생각 말고, 이젠 ‘내가 안 돼도, 한다.’라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글을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도 분명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서 무엇이 빠져있었을까요?
지향입니다. 방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렸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묵상기도가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영대는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스승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관장의 얼굴을 때릴 수 있을 수준으로 향상되었음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감사하게 되고 새로운 삶으로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묵상입니다.
묵상에 십자가가 빠지고, 그 때문에 감사와 찬미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닌 시간 낭비를 한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오늘 복음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 환자는 치유를 받고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고 주님께 감사하지도 않아
주님께서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탄하십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제겐 레오나르도, 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거저 받는 것에 익숙하고,
거저 받는 것이 당연한 나는 아닐까 반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리고 근래에는 더 빈번하게 기적적인 일을 체험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신 거야 하고 제가 느낀다는 말입니다.
뭘 해야지 생각하면 누군가 그에 필요한 것을 보내주시는데
저는 그것이 그분이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보내주신 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혀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손길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도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자주 느끼기에 익숙하고 당연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사랑과 은총을 꿀꺽 삼키고는 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내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돌아와서 감사드리지 않습니다.
성당으로 달려가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습니다.
평양에다 종합 복지관 ‘평화 봉사소’를 세울 때,
그러니까 몇 년간의 아주 힘든 줄다리기가 끝나고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
그때는 그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달려가 감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것처럼 커다란 기적이 아닌,
작은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하면서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된 것입니다.
태양이 뜨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한 것처럼,
태양 빛의 따스함을 감사하지 않고 누리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하느님 책임도 있습니다.
너무 무상으로 주시고,
너무 많이 주시고 늘 주시기에 그러는 것이니 말입니다.
은총을 꿀꺽하고 마는 것,
뇌물을 꿀꺽하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온전한 치유의 구원; 찬양과 감사의 믿음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요셉수도원 정문 입구 거대한 돌판에는 베네딕도 수도회 모토,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모토입니다.
사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모토에 한결같이 충실함이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이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삶이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이요,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 삶의 궁극 목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 여정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일어난 나병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일화입니다.
주변 모두에 활짝 열려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병환자의 치유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이 무엇인가 배우게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과 예수님의 감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겸손히 바칠 수 있는 참 좋은 기도가 자비송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유일한 기도도 이 기도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치유의 구원을 바라며
이 자비송과 더불어 미사전례를 시작합니다.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여기서 유래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역시 우리가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이들은 즉시 몸이 깨끗해지는 치유를 체험합니다.
주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말씀의 능력도 발휘됨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치유에 따른 반응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열 중 하나였고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늘 호의적이었습니다.
다음 장면의 묘사가 그림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앞서 치유 받은 아홉은 반쪽의 육신의 치유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겸손히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생활화할 때 영육의 전인적 건강의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게 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예수님의 눈에는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기특했겠는지요!
과연 나는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은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부단히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
영육으로 건강한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알레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찬미와 감사의, 영혼의 양 날개로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예수님의 결정적 구원 선언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평생 화두처럼 늘 지니고 살아야 할 참 은혜로운 말마디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파스카의 구원의 삶을 상징합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전례 중 영적 나병을 치유 받고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일상에서 넘어져 좌절해 있을 때 이 말씀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힘차게 믿음의 구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의 구원이자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티토서의 바오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2,6-7).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