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2022년 5월21일 토요일
날씨: 구름 기온:26도C
어디를:경기옛길 삼남길 제6길+5길 역방향
세마교- 안녕초교 -용주사-융,건릉-수인선철길-항미교-축만제-서호공원 (21.2km)
누구와:아내와 함께
트레킹 시간:8시간 18분<놀엉쉬멍,시간은 의미없음>
6길,화성효행길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이 깃든 길!배양교부터는 화성시로 접어듭니다.
황구지천변의 들판을 따라가면 용주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정조의 마음이 깃든 용주사는화성을 대표하는 사찰입니다.
용주사에서 다시 남쪽으로 독산성을바라보면서 길을 재촉하다보면 세마교에 도착하게 됩니다.
코스 자체는 짧은 편이지만 용주사에서 버스를 타고갈 수 있는 융·건릉에도 무척 훌륭한
도보길이있으므로 잠시 짬을 내어 꼭 한 번 가보시길 권합니다.
▲전자인증 스템프와 트랭글 괴적
▲1호선 전철, 병점역에 07:41분 도착, 08:11분 향남행 81번 버스로 08:21분 뱅뱅이 정류장 도착, 6길을 이어간다.
80번도 뒤따라 오는 듯..자주 없는 배차인데 서로 다른 시간을 맞추면 좋으련만..
건너 사진은 세마교에서 올때 내리는 정류소
▲화산동 제6길 입구, 갈퀴나물꽃과 찔레꽃이 군락을 이루며 지천으로 피어 기분 좋은 시작을
▲황구지천을 따라 배양교를 향해 걷는다.황구지천뒤로 석성산성이
황구지천의 유래
종점인 서탄대교 건너로 황구지천의 원래 주인인 황구지마을이 있다.
옛 항곶진(亢串津)이었던 나루터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용소리 뒷산 청룡사에는
본당과 요사채 사이에 내(川)가 있어 주지 황구지(黃口地) 스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1970년 제방축조 당시에 거대한 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화성 평택간 고속화도로 아래 벽화 쉬어가기 좋은곳
▲6길 이정표와 스토리보드
▲넓은 들판 끝에는 고층아파트가 병점 방향
▲신한미지엔 아파트 쪽으로 횡단보도 건너 이정표 따라 안녕초교 쪽으로
▲분홍색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 반겨주고,
▲5월은 장미의 계절이라고 하더니 탐스런 장미가 한창이다.
▲마을 이름을 따 이름도 예쁜 안녕초등학교
▲ 1966년 10월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화성의 들판을 찾았다고, 학교 담장의 벽화
▲학교 담장에 삼남길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빨강 장미는 언제 봐도 좋고 정열적이다.학교 담장에
▲모내기를 마친 논엔 아파트가 잠겨있고,
▲안녕초교 담장
▲용주사 입구, 삼남길 앱에서 6길 전자인증 앱이 울린다.
▲51년만에 다시찾은 용주사, 경내를 둘러본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 대본산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창건주는 염거화상으로 도의국사에 이어 가지산문 제2대 조사이다.
고려 광종 때는 혜거국사가 머물며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갈양사가 다시 중창하게 된 것은 조선 제22대 정조 임금 때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아버지 묘와 화성의 건설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둥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의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때 정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스님이 보일당 사일스님이다.
장흥 가지산 보림사 출신이었던 보일스님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설해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보일스님이 들려준 부모은중경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용주사는 이렇듯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이자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사찰을 거느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용주사 들어서면 대웅전 가는 길 양쪽에 세워져있다.
입차문래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거든 모든 알음알이와 갖가지 견해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천보루 앞의 7층 석조 사리탑.
천보루 안내문
"용주사 천보루(龍珠寺 天保樓)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용주사의 문루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 정조가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
이때 함께 세워진 천보루는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이다.
궁궐의 누각처럼 웅장한 천보루의 양옆에는 사대부집의 행랑채 같은 요사채가 길게 늘어서 있다.
모두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전면으로 1칸만큼 돌출시킨다.
나머지 2칸을 양옆의 요사채와 바로 연결시켰으며, 뒤쪽 좌우에 누의 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전면 1열 양옆에는 사각형의 장초석(長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짧은 기둥을 놓아 마루귀틀을
받도록 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요사채의 기단 위에 바로 초석을 놓고 누하주(樓下柱)를 세웠다. 따라서 전면에서는
양옆의 요사채 기단과 천보루의 누 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입면에서도 대웅보전으로
통하는 문루로서의 기능을 확실하게 나타내었다.
또한 대웅보전에서 보면 천보루가 단층 건물로 보이도록 하여 양옆의 요사채와 함께 마당의
윤곽을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전후로 길게 귀틀(마루를 놓을 때 먼저 굵은 나무로 가로나 세로로 짜 놓은 틀)을 건너질러
누 마루를 만들고, 누 하부의 내부 기둥은 생략하였다.
누 마루 전면과 양옆 돌출 부분에만 난간을 돌려서 만들었으며, 대웅전 쪽에는 마루를 내지 않고
바로 머름 위에 창호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연봉이 조각된 이익공계로 되어 있고 초각 문양은 대웅보전과 같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용주사 대웅보전
▲인자하고 편안함을 보여주는 부처님 얼굴
▲ 용주사 대웅전 안내문
"용주사( 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호성전(護聖殿)·독성각(獨聖閣)·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천불전과 동종
▲ 시방칠등각. 시방칠등각은 칠성과 산신, 독성을 머금은 산신각과 호성전,전강대종사 사리탑
▲유명한 용주사 범종
▲용주사를 둘러보고 도보로 약 2km 정도 서쪽에 있는 융,건릉으로 이동한다.
주변이 한창 공사중이라 차도도 예전길이 아니고 어수선하다, 50여년전 옛기억을 더듬어 없어진 도로를 찾아 따라
화산 자락으로 이동하여 융릉과 건릉을 돌아본다.
▲용주사에서 융,건릉 가는 옛길이 없어져 기억만으로 공사구간을 건너간다.
▲주말이라 많은 시민들이 줄을서서 매표를 해야 한다. 일반:1500원, 24세이하:무료 경로:무료
▲융,건릉 설명문
▲역사문화관
▲ 재실 앞에는 엄청 큰 柏松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융릉 재실, 천연기념물인 개비자나무가 기이하게 자라고 있다.
▲불두화와 부엌살림 도구, 떡판과 돌절구,재를 올릴때 섰던 도구인가?
▲노송이 우거진 산책로
▲융릉이 보인다.
▲나무가 아치를 만들어 주는 융릉 모습
▲융릉 해설판
▲ 융릉은 정자각과 살짝 비켜나 있다
뒤주에 갇혀 그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 앞을 막지 않고 묘를 쓴것 같다.
그러니 자식의 마음이 어떠 했을지 짐작이 간다.
▲ 융릉의 정자각
▲융릉의 비각
▲내용
사적 제206호. 장조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소생으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배봉산(拜峰山: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혜빈 홍씨는 1815년(순조 15)에 죽어 그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76년에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한 뒤 1800년에 죽자 현륭원 동쪽에 초장하였다가 효의왕후가 1821년에
죽자 현륭원 서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융릉[편집]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또는 장헌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 ~ 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1] 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융릉을 둘러 보고 건릉으로 가는길
▲노송이 어우러진 건릉 가는길
▲산책만 해도 힐링이 되는 길
▲건릉
건릉(健陵)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릉의 정자각
▲정조의 비각
▲건릉 비문
▲가까이 가 볼 수가 없어 아쉽다.봉분을 쉬볼 수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세종릉 같이 옆에서 보겠끔 해 주면 좋으련만
▲건릉 홍살문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융,건릉을 한 시간여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용주사로 이동한다.
융,건릉을 다녀 오는데 약 2시간이 소요 되었다. 다시 용주사 옆 제6길을 이어 간다. 12/17분,
▲화산터널옆 화산리 마을을 지난다.
▲경사진 시멘트길 힘들게 올라 시원한 바람 맞으며 쉬어간다.
백천장 묘에 대해
백천장(白天藏)은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시조인 백우경(白宇經)의 후손이다.
그는 원나라에 유학해서 국자진사, 한림학사, 좌복야사공대사도(左僕射司空大司徒),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역임하고 귀국한 이후에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진 인물이다.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이다.
고려말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고 원나라로 유학을 가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나이가 들어 귀국한 뒤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져 재상을 지냈다.
그의 묘는 최근 새롭게 단장하여 고려 후기 무덤 양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세운 묘비와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장명등과 문인석이 있다.
묘역의 오른쪽 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수원 백씨 시조의 사당이 있고,
묘역의 진입로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다.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로 옮기면서 세자의 능에서 10리 이내의 산소는
모두 이장하게 했으나, 그의 묘소는 조정에서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
▲어느집 정원에서 살짝
▲모심기가 끝난 논
▲황구지천에 도착, 배양교가 지척이다.
▲황구지천을 건너가는 배양교, 여기서 제6길을 끝내고 제5길을 이어 간다.
제5길 중복들길(서호공원 입구 ~ 배양교)
탁 트인 중복들을 가로지르며 걷는 길!
중복들길은 서호공원에서 출발하여,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인 배양교에 이르는 길입니다.
서호(축만제)는 정조가 수원의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인공저수지로 지금도 농촌진흥청 시험장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의 해질녘 풍경은 ‘서호낙조’라 하여 수원8경 중 하나로 꼽히는 절경이기도 합니다.
서호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옛 수인선 협궤 철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소요시간2시간 (8km)
서호공원 입구-항미정-중보교-옛 수인선 철도-고색중보들공원-배양교
수원축만제
축만제(서호)는 신도시로 수원을 건설한 정조께서 이 지역의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저수지입니다.
축만제와 함께 조성된 대규모 국영 농장은 現 농촌진흥청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다수확 개량종인 통일벼가 탄생하였습니다.
▲중복들 앞 황구지천을 따라 배양교를 향해
▲중복들
▲모내기 끝난 중복들 모습
▲황구지천과 서호천의 합수지점을 지나 서호천 따라 10전투 비행단 수원비행장 담벼락을 따라 걷는데 지독한 냄새,
왼쪽 서호천 건너 수원시 음식물 처리 위생시설에서 나는 냄새다.
▲평리교를 건너 수원시 고색동으로
▲공장과 중고차 매매 골목길을 벗어나면 중보들공원으로
▲고색 중보들 공원을 지나간다.
▲공원에서 다시 횡단보도 건너 서호천을 만나
서호천(西湖川)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광교산 파장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서 황구지천으로 유입되는 길이 11.5km 규모의 지방하천이다. 황구지천으로 흐르는 도중에 경부선 화서역 인근에서 서호의 물을 이룬다.
수원시의 토속어종이었던 서호납줄갱이의 서식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호천을 따라
▲옛 수인선 철교의 아련한 추억을 더듬어 보며...지금은 자전거길로 각광 받는 길이
▲중보교 아래를 지나
▲평고교를 지나 벌말교 아래를 지나
▲수원시 평동에 있던 선경직물이 SK그룹의 시작이지요.
젊은시절 차를 타고 지나 다니며 본 그 공장이 국내 대기업의 모태가 되었다니,ㅠ
▲오늘은 보라빛 꽃길을 시작해 끝날 때까지 꽃길에 취해 걷는다.
대체로 지금은 노란 금계국이 지천인데 이쪽은 살갈퀴꽃이 지천으로 피어 기분좋은 걸음이다.
▲서호천을 따라 걷다가 공사구간이 있어 징검다리를 건너 잠깐 우회한다.
▲서둔교 부근 한창 공사중
▲농업진흥천 담벼락을 따라 항미정에 도착하여 5길 스템프도 찍고
▲항미정 뒤 쪽 풍경
▲항미정
항미정은 축만제 서호에 있는 정자로 1831년(순조31년)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항미정은 1908년 10월 2일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을 하였을 때, 융건릉 참배 후
서호 임시정거장에 도착하여 축만제 뚝방길을 지나 항미정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하다.
▲축만교를 건너
▲축만제, 서호 저수지
조선 시대 임금의 가장 큰 관심은 농사였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었던 조선 시대, 임금의 가장 큰 관심사 역시 농사였습니다.
특히 농업개혁에 정성을 쏟은 임금이 있는데,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는 수원 화성 서쪽 여기산 아래(현 농업진흥청 옆)에 커다란 인공저수지 곧 축만제(祝萬堤)를
만들고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축만제는 이내 서호(西湖)로 이름이 고쳐졌지요.
축만제를 만든 뜻은 튼튼한 나라 재정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수원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목적도 컸습니다.
또 정조는 이곳을 우리나라의 표준 농업도시로 만들려 계획했습니다.
축만제를 중심으로 한 관계시설을 축만제둔(祝萬堤屯) 또는 서둔(西屯)이라고도 불렀고
지금도 이 마을 이름은 서둔동입니다. 이곳은 말하자면 우리 농업역사에서 혁신적 농업정책을
펼쳤던 시발점입니다.
현재 농업진흥청 곁 축만제둑에는 '축만제'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을 위해 농협개혁을 이루려던 정조는 1799년 6월 28일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시간을 내어 축만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일입니다
▲제방위에 세원진 빗돌과 노송
▲저수지 가운데 섬이 수 천마리의 가마우지 배설물로 수목이 하얗게 말라 죽어간다.
생태계에 폐해다.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겠다.
▲농촌진흥청의 벼 시험 재배지역
▲서호공원으로 든다
▲서호공원
서호공원(西湖公園)은 서호천이 유입되는 저수지인 축만제(祝萬堤) 주변에 조성된 공원으로,
축만제는 원래 1799년(정조 23)에 화성을 쌓을 때 축조한 저수지로, 서호(西湖)라는
이름으로 농촌진흥청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2020년에 공식적으로 서호는 축만제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서호공원의 서호는 인공호수치고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서호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산책을 할 경우에 보통 50분 이상 소요된다.
서호공원은 기러기, 청둥오리, 가마우지, 중대백로, 물닭, 흰뺨검둥오리 등등 다양한
철새들이 찾는 규모있는 철새도래지이다.
서호공원의 서호는 물고기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먹잇감을 얻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서호의 대부분이 얼지 않기때문에 수많은 무리의 철새들이 찾아온다.
▲여기서 5길을 끝내고 4길 가는 길을 알아두고 가려는데, 리본도 이정목도 안보인다.ㅠ
▲서호공원을 나와 육교를 건너 화서역으로 이동하여 오늘의 일정을 무사히 마무리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오늘은 5월의 세번째 주말이며 절기상 소만이자 둘이(2+1)하나가 된다는 부부의 날이다.
또 삼남길 길나섬을 시작한지 네번째 주가 되는 날이며 제6길+5길을 역방향으로 걷기로 하고
여늬때와 같이 이른 새벽 길을 나선다. 세번의 환승을 거쳐 07:41분에 병점역에 내려
08:11분에 도착하는 81번 마을버스를 타고 지난주 7길 끝난 지점 세마교앞 뱅뱅이 정류장에
08:21분에 하차하여 신호등을 건너 제6길을 시작한다.
보라색 갈퀴나물 꽃들이 흐드러 지게 피어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찔레꽃 붉은색 토끼풀의
자색 꽃들이 반겨주는 길 황구지천을 따라 배양교를 향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들판과 화산리마을을 지나 아름다운 장미꽃이 한창인 안녕초등학교 주변을 지나 용주사에 도착,
조선시대 정조때 세워진 용주사다.
유서 깊은 건물들과 천보루 앞 7층 사리탑도 돌아 보며
대웅보전 불상의 평화스런 얼굴 모습이 염화미소로 답해 주심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사찰을 둘러봄이 아니라 정조의 효심을 둘러본 시간이라 찡한 마음의 여운을 안고
또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융,건릉을 돌아 보기로 하고 2km쯤 떨어져 있는
융릉으로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길을 지나 먼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으로 이동한다.
용주사와 이곳 융건릉은 필자가 군대생활 시절때 51년전 같은 부대에 근무하던 동료3명과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걸어 본 길이기에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융,건릉과 가까운 곳에 (봉담면 와우리) 살던 친구네 집에서 친구 어머니가 빚은 동동주를 4명이
모두 거나하게 마시고 수원에 사는 친구네 집으로 가기위해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걸어 나와
융,건릉 입구까지 왔던 기억이 가물하다
노송이 울창한 산책길을 걸어 아들 정조의 효심으로 이장을 하고 합장을 하여 지금의
이곳 화산에 왕릉처럼 보존되어 있다.
정치의 희생이 되어 억울한 죽음이었는데 아들로 인해 왕릉으로 격상되어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보고 싶을 때는 이곳을 찾아오곤 하였단다.
이곳 화산은 아름드리 노송과 울창한 숲들로 주말이면 많은 시민들이 나와
힐링을 즐기곤 한다.
융릉에서 5, 6분 걸어 건릉으로 이동하여 정조의 릉을 돌아 본다.
조선시대 왕의 릉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지만 모두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효심이 남달랐던 정조는 죽은 아버지 발밑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죽은 뒤에는
사도세자릉 에서 서쪽 옆 능선에 뭍혀있다. 접근 금지로 가까이 가 볼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며 다시 용주사로 돌아와 6길 코스를 이어 간다.
배양교에서 제6길을 끝내고 황구지천과 서호천이 만나는 합수머리를 지나 제5길가는
길에는 오른 쪽으로 수원 비행장 담장이 길게 이어 지고 서호천엔 오리들만이
한가롭다. 기온이 올라 한낮에 덥지만 시원스레 불어주는 바람은 길손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중보들도 지나고, 고색동의 예전과는 낯설게 변한 모습들을 보며 다리들을
통과하여 서둔동에 접어들어 힘든 다리도 쉬어 주며 늦은 점심을 먹고 간다.
서둔동 행정복지센타 직전의 5길 공사구간은 잠시 징검다리로 우회하고 농촌진흥청 앞에
도착하여 항미정으로 간다. 항미정에서 스템프도 찍고 축만제 둑방길을 걸으며
낭만이 깃들던 곳 서둔동의 딸기밭과 서호 저수지, 지지대 고개 예전의 많은 추억들이
있는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서호 저수지 섬엔 가마우지떼 수천 마리가 살고 있어 수목들을 흉물스럽게 고사 시키고
있는데 수원시에서는 무슨 대책이 없나 아쉽고,
서호공원에서 5길까지 마치고 화서역으로 이동하여 오늘의 긴 여정을 마친다.
걷기도 좋은 날씨에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날 삼남길 6+5길과 용주사, 융건릉은 덤으로
둘러본 삼남길이였다.
다음길엔 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반겨줄지? 한주가 기다려지며
5월의 꽃길은 또 그렇게 하루의 여정에 에너지가 되어 즐겁고 행복한 꽃길 여정을
마무리한다.
여기까지....
2022. 5. 21
첫댓글 예전에도 용주사 입장료 있었나요?
주차료는 받아도 되지만 입장료는 무료해야하네요
단 자기 쓰레기 주범들은 벌금을 세게 부과해야하네요 멋진 걸음에 즐감하고가요
글쎄요 예전에는 입장료 없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입장료를 받고 있더군요.
그래도 문화재를 볼 수 있음에 감사 해야지요.
감사 합니다.
서호저수지까지 북상하셨으니
곧 상경후 완주가 머지않으셨네요
조선의 역사가 깃든곳을 따라 걸으시며
정조의 효심을
느끼셨는지요
용주사와 융건릉까지
역사공부 잘 했습니다
장거리도보 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네번의 길나섬으로 서호공원까지 북상했습니다.
해가 긴 계절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두 번만 나서면 삼남길도 끝나게 되겠지요.
용주사를 둘러보고 융,건릉으로 걸어갔습니다.
정조의 효행 길 다시 한번 의미 있게 둘러 보았습니다.
51년 전 군인시절 전우들 4명이 함께 휴가 나와 놀던
옛추억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다시보는 융,건릉 새롭기만 하더군요.
숲들도 많이 자랐고, 허허 벌판이던 릉 입구엔 도시화가 되어 있더군요.
사실 삼남길이 제게는 익숙하고 잘 아는지역이라 크게 와 닿지 않아
아직까지 미뤄 두었던 곳이기도 했답니다.
수원과 화성은 젊은시절 저의 고향이였지요.
늘 건강하시고, 화사한 장미와 함께 즐거운 한 주 되세요.
성원에 감사 합니다.
삼남길 6~5코스를 역방향으로 두분이 먼길을 걸으셨네요.이제 40% 나았네요.
영,정조의 애달픈 사연과 용주사,융,건릉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역시 5월 장미가 아름답군요
감사 합니다.
먼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건행하시길 바랍니다.
다녀 가셨군요.
5길까지 마치고 이제 수원 의왕 구간이 남았습니다.
성원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 길이였습니다.
장미의 계절 5월도 어느덧 끝자락이네요.
화려한 장미와 함께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성원 감사 합니다.
아. 여전히 정성 가득한
가곡님 글을 대하면서
고향에 온 듯 푸근합니다.
변함없이 길에 서시고
자연 풍경과 마음을
잘 담아주셔서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바쁜 일, 집안 복잡한 일로
이곳엘 들어오지 못해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삼남길도 거꾸로
끝에서부터 출발해
1코스를 향해 오시는군요.
융건릉 가본지
한참이나 흘렀네요.
역사의 이야기까지
상세히 풀어주셔서
천천히 잘 보고 갑니다.
안녕하셨지요?
그 동안 바쁘시고 집안 사정이 있으셨군요.
모두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 오셨기를 바랍니다.
삼남길을 상행 방향으로 걷고 있지요.
그렇게 걷는 것이 삼남길의 참 맛을 느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도 용주사 융,건릉을 참 오랫만에 50여년 만에 다녀왔습니다.
역사 공부도 하고,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한 주변 풍광도 새롭고
모두가 삼남길의 매력과 백미라 생각합니다.
이제 수원에서 남태령 구간이 남아 있지요.
그 옛날 지지대 고개 주변의 딸기 밭은 모두 없어 졌겠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 주에 그 길을 걸어 볼까 합니다.
신록으로 변해가는 계절 장미꽃이 한창인 좋은 계절을 맞이하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성원에 감사 합니다.
용주사와 서호 저수지 아름다운길, 길찿아 더듬거리던 추억의길,
장미꽃핀 길들을 다시되새겨봄니다,
이제 남태령 도착이 얼마남지않았군요,
두분의 삼남길 완주을 다시한번 응원합니다.
삼남길 6길과 5길은 볼거리와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길이지요.
요즘 장미가 한창이라 더 멋진 풍경을 보여주지요.
평택에서부터 상행 쪽으로 올라오며 5길까지 걸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마무리가 될 거 같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덕분입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집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후기따라 가본 삼남길 6.5코스 맛갈나는 글과 사진
즐감하고 갑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벌써 신록으로 변해가는 5월의 끝자락이네요.
정조의 효심에 의미 있는 삼남길을 걷고 있습니다.
맛깔 나는 후기라 즐감 하셨다니 고맙습니다.
남은 길도 열심히 걸어 보겠습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