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필레 7-20
복 음 :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제1독서에서 봉독되는 필레몬서는 한 장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부유한 신자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가 도망쳤다가 바오로 사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통하여 입교하였고, 옥중에 있는 바오로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안전을 생각하여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가 노예로서 지은 죄를 용서하고
신앙의 형제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바오로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필레몬에게 요구할 권위가 있음에도,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필레 14절)
바오로가 이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쓴 방식은 권위로 지시하기보다
필레몬의 성숙한 신앙과 애덕을 믿으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필레몬에게 입힌 손해를 자신이 직접 갚아주기로 합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가 필레몬의 마음을 누구러뜨렸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두 사람 사이를 섬세하게 중재하는 바오로의 모습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시 보며, 그들 안에 성숙한 신앙과 애덕에 기대야 합니다.
권위적인 지시보다, 선의를 움직이게 하는 부탁과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손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중재자의 희생적인 행위도
화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늘 망설입니다.
좋은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딱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선택합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님께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집필하는 데만 무려 25년이 걸린 대하소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
암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필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토지’의 서문에 나오듯이,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면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쓴 글이기에
대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척박한 땅에서 자라야 스스로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진짜 좋은 포도주를 키우지 않습니까?
고통을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유익함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유익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에 좌절하고 실패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우리에게 모범을 주시는 주님께서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큰 고통이 부활의 기쁨으로 바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희망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시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에 맞춰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 때문에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 너머에 하느님 나라라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선물을 주십니다.
앞서 박경리 선생님께서 고통을 마주하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고통의 유익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마지막 날 주님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있으면 천국
반영억 라파엘 신부
대학 수학능력 시험일입니다.
모든 수고와 땀의 결실을 이룰 수 있길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 21장 3절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간절히 입국을 원하는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
하느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현존 속에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행복한 세상...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와 관련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물론 이 세상은 때로 정의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심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의지에 달렸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지옥의 시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옥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있지 않은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이 아주 어지러울 때 난리, 난리 해도 이런 난리 없다고들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이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볼 때의 저는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냉정해지려고 하고 침착해지려고 합니다.
너무 난리 법석을 떨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저는 꽤나 교만하고
신앙적인 자존심이랄까 자부심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이 수도자라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조금 다른 뜻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분노로 거리로 나설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
특히 분노의 감정과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서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두려워 나서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가 나서야 하며
사람들이 절망할 때 그때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이게 나라냐?!’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번번이 이런 지도자를 뽑을 것이고
나라는 이 모양이 될 것입니다.
이번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을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세계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설마설마했는데
트럼프를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인 히틀러를 뽑았듯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이런 선출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정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지,
복음의 가르침에 그 어떤 것보다 가치를 두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8년 전 그러니까 2016년에 제가 한 강론의 요약입니다.
수평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8년 전과 올해가 너무 똑같지요?
그래서 마치 올해 강론이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있지 않으면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 또 반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그 나라에 있지 않고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면 또 그리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느냐?”고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허튼소리나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와 있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고,
‘여기’에 있는데 ‘다른 어디’서 오는 것처럼 묻고 있으니 허튼소리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듯 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면 됩니다.
쉽지 않지요.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아예 제쳐놓지는 말아야 합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향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완성을 향해 차츰 나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이고,
종말론적인 완성을 나이 먹을수록 살아가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자주 즐겨 외는 자작 애송이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요즘 만추의 단풍으로 아름답게 타오르는 대한민국은 어디나 하느님 나라 천국 같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마다 바라보는 불암산을 바라보며 외우는 자작 짧은 애송시가
기도의 계절, 10월, 11월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무리 나눠도 계속 나누고 싶은 또 하나의 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이미 익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현인들같습니다.
“옛 어른들은 항상 삼가고 번민했기에 오히려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다산>
당신 수의를 미리 마련해 놓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던 친지 옛 여러 어른들도 생각납니다.
“군자는 평온하고 너그럽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논어>
옛 군자라 할 수 있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선비들의 삶이 그리워
영조시대, 글씨에 있어서는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면서도 능가한다는,
또 그림에서는 겸재 정선을 보완하면서도 능가한다는 명문가이나
서얼출신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박희병) 2300쪽에 달하는
양권의 방대한 책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옛 아름답고 깊은 전통과 너무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의 천박(淺薄)한, 얕고 엷은 세태에서 초연하고 싶은 갈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도 역시 생각납니다.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시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빛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평화가 되게 하소서”
끊임없이 솟아났던, 한마디로 제 인생자체가 주님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언제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아 나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살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수도원 경내 산책이 성지순례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느님 나라의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 가지도 마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 때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천 년 만 년 임 향해 흐르는 강처럼’,
늘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삽니다.
산과 강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영성이기도 합니다.
‘산과 강’이란 옛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강(江)은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산(山)곁에 있다
나도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임 곁에 있다”<1999.1.28.>
바로 성인들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저절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나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빤짝 한번 나오는 제1독서 필레몬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를 위해 필레몬에게 보낸 격조 높은 서간이 참 깊고 향기롭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성인들의 글은, 말은 이렇듯 깊고 향기로워 영혼을 위무하고 치유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주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사랑이, 예의와 배려, 존중의 사랑이 가득 담긴
참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간곡한 청이 담긴 서간입니다.
무례하거나 불손한 면이 추호도 없습니다.
오네시모스에 대한 한없는 사랑, 필레몬 동지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구구절절 감동적입니다.
옥중에서 쓴 수인서간이지만 하느님 나라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대자유인 사랑의 사도 바오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서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 각자 삶의 자리, 꽃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