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례사
결혼 주례사를 아주 잘하는 선배가 있다.
주례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테지만 이 선배에게 주례사 요청이 자주 있었던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준수하고 점잖은 용모에다 신언서판 요건을 갖춘 분이라 주례 선생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언젠가 나도 딱 한 번 이 양반의 주례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명성대로 아주 감동적인 주례사였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분량에다 몇 군데 유머 코드도 들어 있어서 하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
선배는 주례사를 직접 쓴다고 했다. 인터넷만 검색해도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한 좋은 글들이 넘쳐나지만 이 분의 주례사는 영혼이 없는 그런 글과는 달랐다.
그는 첫 출발을 하는 신랑 신부를 위해 한 줄 한 줄 마음을 담아 주례사를 작성했으리라.
며칠 전에 만난 그 선배가 말하길 예전에 주례를 해 준 커플이 이혼을 했단다.
아무한테나 주례를 서지 않는 선배이기에 주례사를 해 준 사람한테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어떻게 사나? 느슨하게라도 관심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도 인연이라 여기는지 가끔 선배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차마 부모한테는 말하지 못할 사연까지 들어 주기도 했다.
얼마전에 고민을 토로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끝내 이혼,,
주례사를 했다고 그 사람들 인생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선배는 마치 자기 잘못인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2. 백일장과 신춘문예
인터넷이 없던 시절 종이 신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연히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 또한 권위가 있었는데 신춘문예 출신 작가는 대우부터 달랐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이 되었으니 작가의 역량 또한 뛰어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종이 신문 시대에 1월 1일자 신문은 두툼했다. 각종 특집 기사에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렸기 때문이다.
당선작이 궁금했던 나는 해마다 몇 개의 신문을 사서 통독을 했는데 웬만한 교양서 두어 권 읽은 것마냥 유익했었다.
언젠가부터 당선작뿐 아니라 심사평을 더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매의 눈으로 나는 심사평을 읽었다. 제외하는 이유도 당선으로 결정한 이유도 다양하다.
나야 순전히 아마추어 눈이지만 시를 많이 읽다 보니 문장을 받아 들이는 내 나름의 기준이 생기기도 했다.
종이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춘문예 제도는 살아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때문인지 올해 유독 응모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나도 예전처럼 1월 1일자 신문을 뭉터기로 사서 읽는 일은 없다.
다행히 해마다 연초에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모은 시집이 나오니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나오자 냉큼 구해 읽었다. 여전히 내가 미숙한 눈이라서 그런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 당선작도 보인다. 그런 작품을 뽑은 심사위원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작품을 뽑는 기준이 있을 테고 전문가의 눈으로 결정했으니 좋은 작품일 거라고 생각한다.
신춘문예는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등용문이다. 그래선지 어느 당선자의 당선 소감에 이런 문구가 보인다.
<꿈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차표를 끊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작품 보는 눈은 없지만서도 내 나름의 심사 기준을 꼽는다면 당선자가 앞으로 얼마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느냐다.
나는 당선작보다 당선 이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선지 예전에 관심 있게 읽은 심사평이 떠오르는데 어떤 심사위원이 그랬다. 최종 두 명을 두고 누구를 당선작으로 할까 고심을 했는데 심사위원 두 사람 의견이 서로 갈렸다.
결국 합의를 한 것이 어떤 사람이 앞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냐에 두고 당선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
신춘문예든 백일장이든 당선만 하고 끝이 아니라 그 후가 중요하다. 심사위원의 눈은 이래야 한다. 궁극적 목표가 당선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문단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 아닌가.
실제 당선만 하고 그냥 멈춰 있는 작가들도 많다고 한다. 녹음 기술이 좋아 노래를 음반으로 들을 때와 달리 나중 라이브에서 그 가수의 가창력이 드러나는 것처럼 글도 그렇다.
백일장뿐 아니라 미술 공모전, 음악 콩쿠르 등 작가의 길로 떠나는 차표를 끊어주는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당선이나 수상만 하고 창작 활동을 멈춘다면 그 차표로 훨훨 날개를 펼칠 누군가의 기회를 뺏는 셈이다.
1년에 딱 한 장뿐인 이 차표를 결정하는 심사위원들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다.
어디 백일장만 그러겠는가. 어쩌면 사회 생활이나 사람 관계에서도 만남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예전에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들어간 직장이 있다. 나는 근무하는 동안 행여 소개한 사람에게 누가 될까 늘 신중하고 조심했다.
세상살이란 결국 뽑거나 뽑히는 것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후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다.
투박한 문장이지만 정성을 다해 주례사를 썼던 내 선배나 고심을 거듭하며 당선작을 결정했을 신춘문예 심사평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첫댓글 주례를 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어렵고 부담 가는 이유가 글에서 엿보여 공감이 갑니다.
다행이..
요즘 주례 없는 결혼식이 주를 이루니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인생을 결정할 지도 모르는 주례나 심사는 편견 없고 안목 넓은 분들 몫이겠죠.
그이도 주례를 부탁 받는 적이 제법 있는데
예전에는 딸만 둘이라서 안된다고
사양한적이 있었어요 ㅎ
얼마 되지도 않은 세월에
딸 선호로 바뀌었네요
저도 손녀를 바랬거든요 ㅎ
김포인 선배님도 주례를 해본 경험이 있으셨나 보군요.
제가 글에서 언급한 선배처럼 김포인님도 그런 성품을 가진 분이라서 주례 봐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을 걸로 보입니다.
세태가 변하면서 예전에 주례 선생이 보증했던 혼인서약서도 보기 힘들어졌고 갈수록 이벤트 결혼식을 자주 보게 되네요.
시대에 따라 결혼 문화도 변하겠지만 주례사 들을 기회도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삶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선배님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ㅎ
신춘문예를 당선한 시인들의
기차표 한 장 손에 든
그 후의 활동에 대한 글이기도하지만
그 후를 중요시한다는
유현덕님의 삶의 대한 성찰을 보게 됩니다
신춘문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바로 검색해서 읽고 자야겠어요
자랑질 하나 하자면
잠들기전 시 서너 편은
꼭 읽고 잠드는 게 습관이 되었거든요
아하~ 잠들기 전에 시 서너 편을 읽으신다는 윤슬님의 습관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자랑질이야말로 제가 꼭 닮고 싶은 습관이지요.
인생 최초의 시적 감성 접촉이 엄마가 불러 준 자장가에서 출발했듯이 잠들기 전에 읽는 싯구야말로 엄마 자장가의 귀착점일 겁니다.
올해 신춘문예는 20살 대학생부터 60살 늦깍이까지 다양한 당선자를 배출했더군요. 신기하게도 연식이 비슷한 60대가 쓴 시일수록 더 공감이 간다는 점입니다.
제가 늘 다짐하기를 사람이든 직장이든 첫 만남보다 그 후와 마무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산답니다.ㅎ
안수현시인의 시제가 마음에
들어 검색해 보고
배꼽쥐게 웃었습니다
작년에 열매맺지 않은
우리 토마토 나무를 보고 느낀 것과
비슷해요
글 하나 써 놓았거든요
토마토의 생명을 조금 더
살리기 위해
영산강 물을 데려왔다ㆍ
써 놓았네요
잠들기 전에 시를 읽으시는 윤슬님의
아름다운 습관
세상에 공짜는 없다를 다시 새깁니다
시를 읽으셨던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반석을 만드셨으니요.
저역시도 시간나는대로 책을 잡고 있는편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습관처럼 잡고 있는 ㅡ
@헤알
헤알님의 댓글 하나만 봐도
차마시 듯 하는 독서량이 보여
부럽습니다
저는 17년 동안
거의 책을 읽지 못한지라
짤막한 시라도 읽자는 것이
지금은 습관이 되다보니
내가 쓴 시인지
어디서 본 시인지 ᆢ
긴가민가 합니다
이가림 시인의 시
「어느 노(老) 생물학자의 주례사」입니다.
오늘 새로이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딛는
신랑과 신부에게
내가 평생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기생충을 들여다 본 학자로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미잘이 소라게에게 기생하듯이
그렇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그런 사이만큼만 사랑을 해도
아주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해삼과 숨이고기처럼
한 쪽만 도움 받고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片利共生)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세요
이상...
**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라! **
여기가 좋아서
오래 전에 읽고 기록해 둔 시입니다
말미잘과 소라게
저는 흰동가리로 알고있었는데
같은건지 다른건지
차자봐야겠네요
악어와 악어새등
공생관계 참 많죠
부부도 그러해야
또 배웁니다~^^
@정 아 이렇게 댓글에서도 배웁니다
저는 오늘 이 시를 읽었으니 코해도 되겠쥬? ㅎ
저는 이가림 시인의 이 시를 처음 읽습니다. 주례사도 직업 성향이 나타난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절절하게 배웁니다.
시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숨은 마력이 있어 매력적인 예술이지요.
나름 많은 시를 읽는 편임에도 세상에는 좋은 시가 너무 많습니다. 윤슬님 덕분에 눈에 착 감기는 좋은 시를 제 가슴에 담습니다.
하여, 윤슬님은 제 글벗이 확실합니다요.ㅎ
@정 아 말미잘과 소라게를 흰동가리로
알고 계셨다니
저는 또 흰동가리를 모르니
검색해 봐야겠어요
저도 정아님 따라 배웁니다
이가림시인은 돌아가신지
10여년 쯤 된듯 한데
빙하기ㅡ라는 시집을 보면
유럽풍 언어들과 전문용어들이
섞여 있억
시가 난해하기도 하지만
1940생으로
그 때 당시 어수선한 시국에 대한 고뇌를
써낸 시인이며
영국인가 어디서 유학한
엘리트에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2.05 09:32
갑자기
저 슬픈 생각이ㅠ.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달리는 차표를 가지고 있나 싶어졌어요 힝~~
늘 그 후가 중요하죠
늘 자랑이 앞서는 사람보면
다 살아봐야 아느니라~속으로만 꽁시랑합니다 ㅋㅋ
정아님은 지금 아주 잘 살고 계시니 슬퍼할 것 하나도 없네요. 댓글에서 느껴지듯이 정아님의 차표는 안심열차이니 걱정하지도 마시구요.
그 후는 현재 최선을 다하면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 같은 거 아닐까요. 정아님이 늘 긍정적이니 아무리 드센 것도 순하게 녹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날씨는 많이 춥지만 따뜻한 밤 되셨으면 합니다.ㅎ
매캐한 곰팡이먼지가 쌓인 청계천 중고책방에서
철지난
신춘문예 작가들의 글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한때
누구는
꽁초를 태우며 치열하게 글을 쓰고
나는 그들을 따라 다니며 그 혼들을
컨닝하고...
그 후...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ㅎ
현덕님 글에서
지난 단상을 만납니다..
이 댓글 읽으면서 마음이 하늘처럼 파란물로 가득했을 문청 시절의 요석님을 떠올려 봅니다.
어쩌면 그 시절 헌책방에서 마주한 활자가 요석님의 가슴 속에 알알이 담겨 있기에 이렇게 풍성한 감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요석님이 세상 곳곳을 바람처럼 떠돌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만든 힘도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활자의 힘이란 때론 삶을 고뇌하게 하면서도 한편 치유제로도 쓰이니 그 효용성의 가치를 어찌 표현할까요.
글통이란 바로 이런 거겠지요.ㅎ
시어를 이해하시는 분들은 대단 하다고 생각 합니다.
저도 도통 시에대한 느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어에 숨계진 함축의 의미가 늘 알쏭달쏭.
시작은 창대하였으나,ㅎ
그 끝은 어떤 사유로든 사장되지 말았으면 하는 말씀으로 이해 해 봅니다.
길 지만 정갈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말로만 떠들지 실제 시를 읽고도 모든 시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답니다. 이번 당선 시집에서도 도통 공감을 하기 힘든 작품도 있었거든요.
시인 탓이라기보다 문장을 받아 들이는 저의 미숙한 이해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커쇼님,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 어려운 시를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시도 있구나, 저는 그러고 말거든요.ㅎ
세상엔 공감이 가는 문장과 함께하기에도 시간이 짧습니다.
좋은 날들 되시길요.
일상에서 그 이야기를 벼리고
일반적인 인식을 흔드는 힘이 있는 작품들
신춘문예에 관한 현덕님의 글을
정독했습니다.
압축과 긴장의 강도가 점점더 높아지기도
하는 현대시의 표현에 저는 알듯 모를듯
읽고 나면 미쳐 따라가지 못하는 부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읽고
감각의 정체 ㅡ다른 눈의 관찰 , 다른 호흡 코
다른 언어의 간격을 키우는 에너지가
도대체 몇 겹인지 잘 알지 못하기에
머뭇거리는 시간도 저는 즐기려합니다ㅎ
현덕님과 함께하는 신춘문예의 단상
끝까지 새로운 언어로의 도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현덕님의 주문을 곱씹어 보는 시간에
감사합니다.
다른 언어의 간격을 키우는 에너지!
어쩜!
제게 정말 빈약한 부분이라서
무릎을 칩니다ㆍ
환경이 습관을 만들어 난독증에
걸리게 하거든요
헤알님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윤슬하여 결국
작가와 독자간에
낯설게 하기,돌려 놓기,거리 두기 ,
작가의 방향에서 스팩트럼으로 보기 등등
여러가지의 시작법들이 있겠지만
저는 여전히 팔랑거리는 귀동냥이
가볍습니다ㅎㅎ
사고의 길이 좁으니
그 사고가 돌아나가지 못하고
그 길이 끊기매 품고 있던 생각을
기어이 쏟고 마는 ㅡ
윤슬님의 해학적이면서도 늘 파릇한
서정이 저의 서정까지도 살찌우는 세련됨의
침투가 즐겁습니다.
환하게 밝아오는 이 교류를 사랑합니다.
시를 대하는 헤알님의 태도가 아주 바람직합니다. 헤알님 댓글에서 문장을 녹여 내는 사유의 깊이가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어려운 시를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면 저는 부채감뿐 아니라 열등감이 생기니 빨리 포기하지요.ㅎ
대신 저는 제 방식대로 시를 해석하니 마음이 편합니다. 시인이 세상에 내놓은 작품을 내것으로 만드는 맛에 저는 시를 읽는답니다.
제가 뒷줄에 서는 것이 더 익숙하긴 해도 세상엔 이렇게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이 이리 많거늘,, 요로코롬 생각하며 배운답니다.
윤슬님과 헤알님의 고급스런 댓글 소통도 참 보기 좋네요. 이렇게 멋진 글벗들이 있어서 참 기쁩니다.ㅎ
@헤알
이 교류를 사랑합니다ㆍ
저도 그렇습니다ㆍ
참 옛 생각 납니다
연초 1월4일 이면 경향각지의 종이신문들..
이 정도면 나도 쓰겠다...
그 게시 한 거 두고두고 읽었었지요
지금요새는 고향친구 가
지방지 에 꾸준히 추라이 중. ㅊㅊㅊ
제 글로 향적님의 옛 추억을 소환하게 만들었다면 참 다행입니다.ㅎ
향적님한테서도 짙은 문향이 느껴지는 걸 보면 가슴에 담긴 활자가 잘 숙성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문청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 자꾸 두드리다 보면 열릴 때가 있지 않겠는지요.
어쩌면 늦깍이 문학도들에게 유리한 것이 신춘문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꾸준한 친구님도, 항적님도 응원할게요.ㅎ
신춘문예 그 이름만 들어도 열등감 쩔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래도 참 열심히 찾아 읽고 심사평에 더 열내기도 특히 사춘기 때는 청소년 문학지 학원에서 문학상은 우리의 로망이였지요
당시 학교만 다녔으면 저도 응모의 기회를 얻었을텐데 열등감과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고통스런 날들이었지요
신춘문예 이젠 열망도 식었고 시샘과 열등감 또한 자연히 사라졌어요 뭔들 남아 있겠나요 이렇게 현덕님 통해 지난 열정을 아쉬워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ㅎ 운선님이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저는 응모할 생각보다는 해마다 발표되는 당선작들을 그저 구경하면서 즐기는 정도에 그쳤거든요.
바둑을 어깨 너머로 구경하면서 배웠듯이 문학과 글쓰기도 저는 구경하고 즐기면서 배웠답니다.
제 글이 비록 근본은 없지만서도 그 시절의 문향을 차곡차곡 가슴에 담았기에 이 정도라도 문장을 이해하는 힘이 남아 있지 싶습니다.
안 그런 척 했지만서도 밀려드는 열등감 저한테도 있었습니다.
그 열등감이 때론 나를 살게하는 힘이었고 잘 견뎌왔으니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열등감은 재우고, 무식함은 키우기 위해 오늘 점심은 좀 매운 것으로 먹을려고 하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