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복음묵상
요한 12,24-26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어찌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124위 순교 복자 시복식이 거행된지 벌써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참 세월이 빠릅니다.
통상 바티칸 외에서 거행되는 시복식은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인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방한하셔서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하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성지(대전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복음 묵상글을 옮겨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