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11.25.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묵시14,1-3.4ㄴ-5 루카21,1-4
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의 삶을 사는 사람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중 성녀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문을 바탕한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성가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은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대변한다 싶습니다. 마태복음의 진복팔단을 연상케 하는 참행복한 가난한 과부요 자기를 다 비운 주님을 닮은 분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가 참으로 부자라 하는데 하느님만으로 부유한 가난한 과부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해 자신의 비움의 삶을 확인한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가난하나 살아있는 참보물 주님을 모시고 사는 내적으로는 부자요 자유로우며 행복한 과부입니다. 참으로 소유욕의 집착에서 벗어난 초연한 사랑, 초연한 자유의 사람입니다. 마태오의 참행복 선언중 다음 둘에 그대로 해당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은 예수님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될 정도로 참행복을 사셨던 예수님이셨고 바로 주님을 닮은 가난한 과부가 그러합니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요, 하느님을 볼 것이라 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도 부요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과부의 내면도 이처럼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 <다산>의 지혜입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하룻밤이면 끝나지만, 뜻에 충실하지 않으면 평생을 취해서 산다.”
가난한 과부처럼 초지일관 봉헌의 삶에 충실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부자의 내면은 텅빈허무이겠지만 이런 빈자인 가난한 과부의 내면은 텅빈충만의 행복이요 자유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한 예수님을 감동케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런 봉헌이야 말로 주님께 대한 전적 신뢰와 사랑, 그리고 희망의 표현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텅빈충만의 내면임을 봅니다. 놀랍고 반가운 것은 아무도 못보고 모르는 것 같지만 주님은 가난한 과부를 그대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121장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을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며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주시리라.”(시편121,4-7)
바로 이런 가난한 과부의 안식처가 되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루카복음이 지상에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다뤘다면 제1독서 묵시록은 ‘어린양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대로 미래의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싶습니다.
새삼 가난한 과부가 궁극의 희망을 둔 것은 천상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산,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어린양과 함게 서있는 십사만 사천명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하는데 세례성사를 받아 인호를 받은 우리의 미래를 엿보는 듯 합니다. 이들에 대한 묘사가 평생 날마다 제대 주변에서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지상에서의 거짓없는, 흠없는 삶을 반영하는 성인들의 천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며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던 삶을 반영합니다. 이런 천상적 삶에 희망을 뒀던 가난한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천상의 희망을 능가할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위령성월, 희망성월, 성인성월 11월 마다 제가 끊임없이 애송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도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 마지막 34주간은 성서주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사랑하듯 성서를 충실히 공부하며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마태24,42.44참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