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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3요한 5-8
복 음 : 루카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청원 기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모두 다 이루어진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의 청원이 올바르지 않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청한 것ㅇ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첫 번째로 그 청한 것이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끈질긴 과부의 비유는
바로 기도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올바른 판결”을 요구합니다.
한 번의 요구로 그치지 않고, 거듭하여 요구합니다.
과부는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갈 것이고,
재판관은 마침내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것을 청할 줄 아는 지혜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인내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청원 기도에 대하여 조금 더 깊게 묵상해 보면,
끈질기게 요구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보다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원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끈기있고 한결같이 청하지 못합니다.
정작 성실하고 한결같이 청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한결같이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닮아가며, 주님께서 우리의 청원에 빠르게 응답하시듯
우리도 그분 청원에 재빠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청원을 기억하여 청원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일치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군대 제대 후에 신학교 복학 전에 사회 현장 체험을 하라는
성소국장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주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 주유소에서 제일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경유와 휘발유를 구분해서 넣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승용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경유를 넣어야 하고,
또 어떤 RV차는 경유를 넣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휘발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분에게 꼭 물어보았습니다.
“경유 넣을까요? 휘발유 넣을까요?” 그러면 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면 몰라?”
운전면허증도 없었을 때였고, 차라고 하면 버스, 택시밖에 모를 때였으니 당연히 보면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고서도 모른다고, 주유소 직원이 왜 그러냐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이렇게 떠올려지는 이유는 지금도 보고서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나의 무지가 하느님의 일을 잘못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유소에서 일할 때는 스스로 모른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물어보아서 실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모르면서도 아는체하며 경유와 휘발유를 바꿔 넣었다면 차주의 소중한 차를 망가트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행동하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과부에 관한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귀찮도록 매달리는 과부의 청에 결국 올바른 판결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삶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하느님의 창조를 깨뜨리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 많은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정작 이렇게 기도하지 않음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 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기의 기도가 들어 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더 많이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가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린 결단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초기 인류는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삶을 이어갔습니다.
태양, 불, 물 등의 자연 에너지를 통해 생존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런 원시 에너지 사용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였지만,
인류 발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에너지 사용이 업그레이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석탄과 석유의 대규모 사용은
인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화석 연료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환경 오염과 에너지 자원 고갈이라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등장한 핵에너지는 전력을 생산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원자력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을 동반했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 태양열, 풍력, 수력 등 재생 에너지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에너지를 바라보는
철학과 윤리적 태도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한테서 왔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빛은 에너지의 근원이자,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모든 에너지는 신이 창조한 세상의 일부로,
인간이 받은 선물이자 자원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라"라는 사명을 받고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도 책임감과 절제, 지혜를 요구받습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청지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창조의 돌봄과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부유한 국가들이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
빈곤한 국가들은 최소한의 에너지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배치되며,
에너지 자원도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를 통해 관리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전합니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지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새 창조를 향한 책임 있는 준비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생태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는 사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종종 ‘불’로 상징되며, 이는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의미합니다.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능력이 창조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에너지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신앙인으로서 창조의 청지기 역할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에너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에너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에너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 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난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을 베풀면 향기가 만리를 간다고 합니다.
2024년의 달력도 이제 1장 남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남은 1장의 달력을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수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조욱현 토마 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에게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에게 그러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때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그렇게 어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마디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묵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적당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처럼
하느님이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기도 지향, 미사 지향의 대부분은
가화만사성, 명문대 합격, 좋은 직장 취직,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승승장구, 무병장수... 등등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계와 결핍투성이인 한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 든든했던 그, 영원히 나를 지켜 줄 것으로 확신했던 그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집니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갑니다.
유일한 희망이요 미래라고 여겼던 자녀가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내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황찬란한 대상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같은 우리네 인생도 한순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로장생,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과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신앙 여정의 충실한 동반자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게 계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체되지, 하느님은 지체하지 않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주님께선 우리의 기도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는 기도와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체하더라도 들어주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즉시 들어주신 경험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들어주실 뿐 아니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빨리해 주고 싶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지체가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지체하시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둑으로 치면 장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인간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합니다.
어떤 때는 수를 찾느라 이삼십 분 끙끙대고 그런데도 못 찾기도 하지만
인공 지능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수를 찾아내는 데 1초도 안 걸립니다.
이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인가? 말 것인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미적거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체치 않으신다는 것은 미적거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거나 들어주셔도 지체하신다면
당신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이유 때문에 안 들어주시거나 지체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거나 우리 믿음이어야 하는데
우리 믿음이 그러하지 못함을 잘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들어주시거나 안 들어주시거나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신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들어주지 않으실 이유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심이 우리에게 더 사랑이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거라고 믿는 겁니다.
우리도 자식이 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면
예를 들어 지금 고도비만인데 먹을 달라고 하면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청은 아예 안 들어주는데 그것이 사랑이고 더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더 잘 아시는데
그렇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거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다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 마음은 조급하여 당장 들어주시길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중이 더 좋다는 것을 아시기에 지체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보통 새벽에 나타나십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 새벽에야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밤새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에게 새벽녘에 나타나시고,
부활하신 뒤 밤새 고기잡이 한 제자들에게도 새벽녘에 나타나셨지요.
기진맥진할 때를 기다리시고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질 때를,
그때를 기다리신 것이고 진정 그때까지 애타시며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 갈망이 없이 청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희망이 단단하지 않으며
그래서 안 들어주신다고 쉽게 실망하고 더 나아가 절망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애타시며 기다리십니다.
빨리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지기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지체하니 그것 때문에 우리보다 더 애타 하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지체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시시로 돌아가면 당신 뜻을 알려주실 거라고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고 실제로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알려주셨습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이 말씀을 1205년에 프란치스코가 들었는데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기까지 3년여가 더 걸렸고,
그 후에도 그 깨달음이 계속되었던 것을 보면
완전한 깨달음까지는 프란치스코도 지체됐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미흡하여 지체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판단 능력이나 사랑이 부족하여 미적거리거나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합시다
<진리의 협력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대 젤투르다 주보 성녀 대축일을 지내는 서울분도수녀원은
오후 2시, ‘상지피정의 집 리모델링 축복식 및 대축일미사’가 봉헌되며
요셉수도원에서도 여섯 수도형제가 참석합니다.
대(大) 젤투르다로 불리는 성녀는 1256년 1월6일 독일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여
15세 학교를 마치고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는 성녀 멕틸다 수련장 밑에서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타고난 지능과 열망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1281년 1월27일 예수님 발현을 체험한 후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전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으며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습니다.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로 불리는 그는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사도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3세기 독일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독일의 데레사’라 불려집니다.
1288년 제투르다는 합병증을 앓아 병상에 눕게 되며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그녀는
1302년 11월16일 향년 46세에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무려 병상 생활 14년 후 그녀는 아름다운 임종어 “아! 신랑께서 오신다!” 부르짖으며 선종합니다.
그녀는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시성식을 거치진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아 공경을 받았으며,
167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성녀에게 ‘위대한(Great)’ 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대(大) 젤투르다 기념일을 제정하여 모든 교회가 성녀의 기념일을 지내도록 지시합니다.
11월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입니다.
성녀는 연옥 영혼들에 대해 항상 연민과 동정심을 느꼈으며
예수님이 발현하여 가르쳐 준 기도를 매일미사 후 바칠 것을 권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1000명의 연옥 영혼을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과 온 세상 교회에 있는 죄인들과
내 집안과 가정 안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 드는 모든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의 가장 값진 피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아멘.”
남은 11월 위령성월도 천상의 성인들을 기리며 계속 부르고 싶은,
제가 참 좋아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도다.”
성녀 젤트루다는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야말로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 가이오스에게 전하는 서간이 참 품위있고 아름답습니다.
얼마 전 바오로가 필레몬에게 전한 서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이오스의 환대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그를 ‘진리의 협력자’란 영예로운 칭호도 부여 합니다
“나는 그대를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마디, ‘진리의 협력자’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주교가 되었을 때 사목 표어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님이 살아 계실 때 감동적인 인터뷰 기사를 나눕니다.
“교황님의 묘비에 무엇이 새겨지기를 바랍니까?”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주교가 되었을 때 진리의 협력자란 사목표어는 어떻게 지었나요?“
-진리의 협력자라는 말은 요한의 셋째 서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감동하여 더욱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진리에 봉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협력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임 베네딕도 교황에 대한 존경과 사랑, 신뢰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두 분의 아름답고 품격 있는 우정도 감동적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마음을 지키면 보존되고, 놓으면 사라진다. 때 없이 들고 나기에 그 거처도 알 수 없다.”<맹자>
마음을 지키는 첩경의 지름길은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룩하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자신을 “진리의 연인”이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순교에까지 이르게 되고, 저절로 진리의 협력자가 되며
기도 역시 간절하고 항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를 들려줍니다.
고집불통의 완고한 재판관도, 지칠 줄 모르고 물러설 줄 모르는
과부의 목숨을 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항복합니다.
진리의 협력자가 되려면 이정도의 영적탄력 좋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진리의 협력자가 되려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는 믿음이 정말 절대적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는 말도 있듯이 기도하다 죽을지언정 결코 기도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기도도 정화되어
‘원하는 것에서 필요한 것으로’ 올바른 판결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고
날로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닮아 주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며 저절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은, 신망애(信望愛)의 탄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뿐이요 이래야 평생 진리의 협력자로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의 영적 탄력을 날로 좋게 하시어
당신의 충성스러운 진리의 협력자로 성실히 살아가게 하십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시편112,4).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