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린]전 해병대사령관님이 2013년 2월 21일에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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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봉에 새겨진 해병혼(海兵魂) / 임 종 린
*천자봉 구름 속에 높이 솟았고 옥포만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진해가 해군과 해병대의 요람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천자봉과 장복산으로 둘러 쌓인 천연의 군항요새는 임진왜란 당시 해전승리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은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옥포해전은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우리해군전사에 찬연히 쓰여진 전승의 곳이기도 하다.
천자봉은 해군사관학교생도뿐만 아니라 해군의 기초훈련과정을 통해 장병들에게 끈기와 인내를 불어넣는 훈련장이며 특히 1949년4월15일 해병대가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될 당시 해병혼을 처음 심어주기 시작했던 육체와 정신적 훈련장이었다. 그 후 1973년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되면서 해병대교육단이 해체되어 포항으로 신병훈련소가 이전하면서 천자봉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해병대장병들이라면 현역은 물론 예비역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장병이 거의 없을 것이다.
멀리 구름 속에 우뚝 솟아있는 천자봉 정상에 하얀 글씨로 새겨진 해병혼의 글자는 반세기 아픈 해병대역사를 말해주며 지금까지 선명히 빛나고 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생도시절은 물론 1968년 1차 베트남전 참전 후 귀국해 신병훈련소 중대장을 지내면서 신병들과 같이 안방 드나들듯이 산을 오르내리며 해병혼을 심어 준 곳이다. 그 시절은 베트남전 파병기간이기 때문에 더 강한 훈련이 필요한 때였다. 강한 훈련을 통해서 해병이 만들어 진다는 훈련철학은 밤과 낮이 구별되어지지 않았다. 천자봉 하록에는 덕산사격장이 있었는데 사격장까지는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그곳에서부터 천자봉 정상까지는 선착순이다.
천자봉 정상을 정복한 기분은 해병대라면 느껴보지 못한 자 없겠지만 어찌 정복의 쾌감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천자봉 정상에서 “나는 해병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싸워서 지는 자 죽은 사람보다 못난 겁쟁이다” 정신교육은 힘을 더하며 실시된다. 정상정복의 감격 속에서 ‘나가자 해병대’ 우렁찬 군가가 불러지면서 흘렸던 땀을 잠깐 식히고 나면 또다시 선착순으로 사격장까지 산을 내려가는 훈련이 시작된다. 야간에 실시되는 훈련은 반복 실시 되며 야간작전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 되었다.
내가 신병훈련소 중대장시절에 연예인들이 많이 해병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기억나는 연예인으로 가수 남진, 태원, 진송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그들은 지원해서 입대한자들이 아니고 한때 사회일각에서 방성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때였기에 연예인들이 반 강제로 입대하였다. 그 후 내가 2차 베트남전에 파병해서 그들을 상하의 정글에서 다시 만났는데 최전방중대까지 배치되어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들은 연예인이지만 천자봉을 오르내리며 해병혼이 심어진 해병이었고 베트남전에서도 용감히 싸웠던 해병임을 중대장으로 직접 보았던 사실을 알리고 싶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이라는 슬로건은 해병대출신이라면 지니고 있는 철학이다. 그 철학은 천자봉을 오르내리면서 터득한 알찬 해병대정신의 뿌리로 내려진 것이다.
그 해병대정신 속에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들어 있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이 가득 차 있으며 또한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단결심과 끈끈한 전우애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해병대교육단은 진해에서 해체되었지만 포항으로 이전된 신병훈련소는 새로운 천자봉을 포항시 영일군 오천읍 오어사 뒷산에 진해 천자봉 보다 더 가파른 천자봉을 새로 선정해 해병혼을 심어 주고 있다. 지금 우리해병대는 포항에 교육훈련단이 창설되어 진해에서 보다 더 강한 신병 및 하사관후보생과 장교기초반훈련을 시키고 있다.
나는 1974년 해병1사단에서 대대작전장교를 끝마치고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 된지 2년이 지난 후였기에 그때만해도 진해에는 해병대흔적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진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속은 어쩐지 허전한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같으면 진해시가지는 물론 경화동에 이르기까지 해병대의 군화소리가 들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휴일이면 외출 나온 해병들의 씩씩한 모습도 볼 수 있고 선술집에서 들려오는 해병대 곤조가(부라보 해병)는 해병대의 자부심을 일깨워 주기도 했는데 가슴 아픈 심정이었다.
그때 육군대학은 입학시험에 합격된 장교들만 입교자격을 부여하는 자칭 고시1기생인 정규반 75기생 나였다. 나와 같이 우리해병대도 4명이 입교했으며 육군장교가 197명, 태국과 대만장교가 각각1명으로 모두 203명의 동기생이 있었다. 계급은 대위에서 소령까지 혈기 넘치는 장교들이 전후방 각지에서 근무하다가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후방생활을 1년 동안 하게 되어 모두들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열심히 공부도 하며 아름다운 진해바다의 정경을 만끽하면서 서로친교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휴일이 되면 나는 육군장교들과 외국군장교들과 어울려 테니스도 하고 술도 마시며 때로는 낚시도 하면서 진해곳곳을 그들에게 소개하며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입교 후 3개월 정도 되던 일요일 어느 날 어쩐지 옛날 신병훈련소중대장시절이 생각나서 경화동에 위치한 교육단과 덕산해병대발상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날따라 부슬비가 내리고 마음마저 맑지 않은 날이었다. 교육단 정문에는 부대간판이 푸른색으로 바꿔져 있었고 옛날 그때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나를 몹시 슬프게 하였다. 오전에는 교육단과 보급정비단 일대를 둘러본 후 내가 옛날 자주 다녔던 경화동 곱창 집을 찾았으나 없어져 다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해병대발상탑이 있는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으로 향했다.
그날 나는 부대출입을 쉽게 하기 위해 군복을 착용했기에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경화동 꽃집에서 작은 꽃바구니 한 개를 준비하여 해병대발상탑에 헌화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고 해병대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반성도 하면서 미래의 해병대발전을 위해 기도도 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덕산사격장으로 가서 천자봉을 쳐다보니 희미하게 보이는 해병혼의 ‘병’자에 오른편 획이 사라지고 없지 않았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슬픔을 느끼며 발길을 돌려 길 잃은 나그네 마음으로 해 저무는 노을을 등지고 육군대학 건너편 내가 옛날 기거했던 독신자 장교숙소(BOQ)골목의 곰장어집에서 소주 몇 잔 마시고 되돌아왔다.
육군대학생활도 중반을 넘어가면서 육군장교들과의 사귐도 친숙해졌던 어느 날 육군장교들과의 술자리에서 천자봉해병혼 글자의 획이 날라간 사실을 알리며 일요일에 나와 같이 그 글자를 복원시키는데 협조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더니 동석한 7명의 육군장교들은 모두들 동의했다. 그 다음주 일요일로 날을 정하고 나는 시내 건재상(建材商)에 횟가루와 물통을 준비시키고 해병대예비역에게 소형트럭 한대도 빌리는 등 준비는 모두 마쳤다. 우리일행은 일요일 오전 9시경 도시락과 각자의 준비된 휴대품을 지참하고 덕산사격장에서 천자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 도중 3~4회 쉬면서 올라갔지만 약 2시간 정도 걸려서 정상에 도착하니 그 기분은 옛날 그때보다 더 감격스러웠고 정상정복감도 더했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일은 너무나 빗나가 우리가 가지고 간 횟가루와 물로서는 글자의 점 하나도 제대로 복원시키지 못할 정도로 글자의 크기가 엄청나게 크지 않는가. 나도 육군장교들도 기가 막혀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나 우리일행이 그 훼손된 부분을 전부 복원시키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은 쉽게 가라앉았다. 우리일행은 정성껏 훼손된 해병혼의 일부분을 손질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산하여 육대로 돌아오는 길에 곰장어집에서 소주도 마시며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이들 육군장교 중 3명은 후에 장군으로 진급되었고 한 명은 국방부장관까지 해서 내가 사단장과 사령관시절에 종종 만날 때마다 그때 천자봉에서 있었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웃음짓기도 했다.
<국가와 국민은 우리해병대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었다. 감격스럽게도 내가 사령관시절 해병대사령부를 경기도화성시 근처야산에 신축해 1994년 이전을 했는데 우연인가 필연인가 신 사령부 앞산의 이름이 덕산(德山)으로 1949년 진해에서 해병대가 최초 창설된 곳과 이름이 같은 덕산(德山)으로 나는 덕산대(德山臺)라고 큰 자연석에 새겨 사령부입구도로변에 세웠다. 그래서 해병대체력단련장(골프장)이름도 덕산대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은혜라고 신사령부 입주식 때 축사에 포함시켰다>
그 후 내가 해병대사령관 시절 진해 해병대전우회에 부탁하여 해병혼 훼손부분을 복원해 달라고 요청하니 몇 년 전에 이미 복원시켰다고 연락이 왔다. 이 “해병혼” 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우리들의 마음을 감싸게 하는지, 그것은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천자봉에 새겨진 ‘해병혼 글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천자봉: 경남 진해군항의 요새 좌청룡 격인 해발 693.8m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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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병혼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전역 40년차가 됐지만 여전히 해병인가 봅니다.
글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가슴속엔 영원한 해병대란 단어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운명 입니다. 해병대 화이팅!!!
아 그이름 "해병혼 듣기만해도 가슴이 찡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