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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98
이 사건을 잠시 놓아두고 영국이 세금을높게 부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7년 전쟁의 후유증이었던 겁니다.
전쟁에는 이겼으나 바닥이 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금을 영국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홍차뿐만 아니라 신문 광고의 모든 문서에 인지를 붙이는 인지세,수입하는 설탕에 붙이는 설탕세법, 하다못해 유리, 종이, 잉크 등에도 세금을 붙이는 타운센 트법을 만들었습니다. 아메리카인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고 하마터면 폭동이 일어날 뻔한 반발이 거세어 졌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1766년 인지세를 비롯한 세금 정책을 철회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 니다. 영국이 거센 반발을 받아들여 세금 정책을 철회한 것은 식민지를 무력 으로 누를 힘이 부족했던 때문이었지요. 전쟁의 후유증은 그만큼 컸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를 그대로 놔 둘 영국이 아니었습니다. 1733년 영국 의회는 치밀하게 조사를 한 바탕으로 홍차법을 만든 겁니다. 식민지인들이 비싸게 사 먹는 홍차가 정식 통관된 제품이 아니 라,밀수업자들이 질이 떨어지는 네덜란 드 홍차를 대량으로 들여와서 비싼 이윤 을 붙여 팔아먹는 수법을 모두 알아내어 일타쌍피의 묘법을 찾아 내었습니다.
중간 마진을 전부 없애고 홍차법을 통한 홍차만을 유통하게 만들어서, 값은 오히 려 떨어지지만 질 좋은 홍차를 사게 하 고 이익금은 세금으로 영국에 흡수되게 만든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 식민지인 들이 반발했겠습니까? 영국의 식민지 라고 해서 영국의 법이라면 무조건 나쁘 게 해석 했겠습니까? 실제 그 때까지 아메리카 식민지의 살림은 본국보다 나 은 점도 있었고,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 은 독립에 대한 욕구가 거의 없었습니 다. 그렇다면 영국이 증오스럽고 이 세 법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요? 바로 밀수업자들 이었습니다.
홍차의 막대한 수익으로 탱자탱자 놀고 먹던 밀수업자들은, 끊어진 수입으로 인해 졸지에 파산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밀수업자들의 대빵이 바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던 존 핸콕입니다. 존 핸콕을 비롯한 밀수 업자들은 살기 위해서 일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행정가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나,사람을 선동하 는 능력은 타고난 사무엘 애담스가 있었 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의와 부조리 는 불행하게도 기묘한 악의를 가진,절대 정치를 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정치를 업고 부풀리고 선동하면 진실은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념을 만들고,그 신념을 선동으로 기치를 세워 버리면 이길 재주가 없습니다. 그 당시 는 식민지인들은 물론이요, 조지워싱톤 조차도 독립의 개념을 갖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존 핸콕은 영국의 홍차 법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식민지의 독립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독립의 의식을 심어 줄 사건들이 필요했고 만들어야 했습니다. 홍차법은 싫으나 좋으나 식민지 사람들을 독립에 눈 뜨게 하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존 핸콕과 사무엘 애담스 가 만든 사건이 드디어 실행되고 말았습 니다. 사무엘 애담스가 포섭한 부랑자 백여명이 모호크 인디언의 복장을 하고, 얼굴엔 시커면 석탄을 바른 후 손엔 도 끼를 들고 영국의 다트머스호외에 두 척 의 상선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이들은 선장과 선원들을 협박해서 열쇠를 빼앗 아 화물칸을 열었습니다. 화물칸에는 질 좋은 중국의 우이옌 차 상자가 342 개나 있었습니다. 그 차 상자들은 무참 하게 모두 바다에 버려졌고 그 가치는 16억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신문을 통해 삽화까지 그려져서 대대적 으로 보도되었고 이후 이와 비슷한 사건 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광장에서 홍차들이 불태워지고 바다에 버려지는 홍차는 부지기수. 심지어 차를 실은 배들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 거의가 밀수업자들의 소행 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식민지의 시민들 은 뜨아했고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고 할수 있습니다. 홍차법으로 인한 불만이 없었는데 일련의 사건들은 계속 일어났으니까요. 이 사건들로 인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손해는 천문학적 이었고 영국은 분노했습니다.
식민지인들 조차 이러한 행위들을 비난했고 조지 워싱톤과 벤자민 프랭클린도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맹비난을 퍼부 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일부 식민지인들의 이런 행위는 죄악이라고 단정지으며 영국의 손해를 보전해주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10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고 영국에 전달하려 했으나 영국 정부에 의해 매몰 차게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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