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스틸러스의 홈구장 ‘스틸야드’는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이다. 포항은 1990년 11월 포항제철소 공단 안에 있던 축구장 잔디 위에 전용구장을 세웠다.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1983년 출범한 한국프로축구는 스틸야드 건립 이전까지만 해도 육상트랙이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 육상트랙의 간격은 생각보다 멀었다. 관중들은 경기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선수들은 팬들의 응원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라운드의 선수들과 관중석의 팬들은 하나되기 어려웠다.
스틸야드는 달랐다. 육상 트랙이 없을뿐더러 그라운드와 관중석은 한두 걸음이면 닿았다. 선수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스틸야드는 선수들에게도 큰 힘이 됐다. 관중들의 함성은 경기장 밖으로 퍼지지 않고 그라운드 안으로 모이며 용솟음쳤다. 1만 명이 2만 명이 됐고 2만 명이 4만 명이 됐다. 최초의 전용구장 스틸야드는 그런 곳이다.
포항과 성남 일화의 2007 K리그 챔피언결정전 1차전이 열린 11월 4일 스틸야드를 찾은 포항팬 장기형 씨는 “벌써 17년이 됐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스틸야드를 찾곤 했는데 구단에서 나눠주는 책받침에 있는 선수들 이름을 모두 외울 정도로 열성팬이었다”며 “그때는 스틸야드가 아닌 다른 경기장을 찾으면 축구의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축구전용구장이 지어졌지만 스틸야드에 비할 바 못 된다. 스틸야드는 스틸야드만의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색 바랜 스틸야드, 전통의 포항
수많은 공장 굴뚝 사이로 스틸야드가 서있다. 뿌연 연기를 내뿜는 공단의 굴뚝과 녹색 잔디의 축구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스틸야드가 탄생한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SPORTS2.0)
㈜포스코의 행정지원부 관계자는 “축구전용구장을 지으려 했는데 건축 허가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 박태준 회장이 밀어붙였다. 그때는 그만큼 힘이 있었고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았다. 포항의 K리그 경기와 더불어 포스코 직원들의 사내 축구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고 설명했다.
스틸야드를 둘러싼 숲이 울창하다. 17년 전에도 그랬다. 애초에 동산을 깎아 잔디구장을 지었고 그 위에 스틸야드를 세웠다고 한다. 공단의 탁한 공기는 스틸야드를 에워 싼 우거진 숲으로 희석된다. 스틸야드는 숲 속에 있는 독일의 축구장 발트슈타디온(프랑크푸르트 홈구장)과 비슷한 환경이다.
17년의 시간은 스틸야드 본래의 색깔을 바꿨다. 스틸야드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짙은 회색으로 바랬다. 최신식 시설을 갖춘 월드컵경기장과 견주면 낡고 허름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통의 미가 배어 있다. 포항은 수많은 우승 트로피와 함께 내로라하는 대표선수들을 배출하고 축구 인프라를 구축한 명문 클럽이다.
1986년과 1988년 K리그 정상에 선 포항은 1991년 홈구장을 스틸야드로 옮기며 분위기를 바꿨다. 전해인 1990년 11월 10일은 한국축구사에 새 장을 연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 스틸야드가 위용을 드러낸 날이다. 1만여 홈팬들의 축하 속에 스틸야드가 문을 열었다. 고려대와 치른 개장 경기에서 고졸 스타 최문식은 결승골을 터뜨려 포항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포항에 막 입단한 김기동은 “고려대와의 경기를 앞두고 포항 1군과 2군이 스틸야드에서 연습경기를 했다. 스틸야드에서 열린 진짜 첫 경기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씨였고 1-1로 비겼다. 프로에 데뷔했으니 어떻게든 1군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던 시절이다. 축구계의 염원이었던 축구전용구장에서 뛴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기억했다.
포항은 스틸야드를 홈구장으로 쓴 첫해인 1991년 시즌에는 12승15무13패로 3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듬해 13승9무8패로 다시 K리그 정상에 섰다. 스틸야드에서는 첫 우승이었다.
당시 팀을 이끈 ‘포항의 전설’ 이회택 감독은 지도자상을 받았고 홍명보는 신인선수로 MVP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세대교체도 큰 폭으로 이뤄졌다. 1980년대 포항의 전성기를 이끌던 노장들은 1992년 스틸야드에서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수준급의 기술축구를 선보였던 이흥실과 콧털을 휘날리며 골을 터뜨렸던 조긍연이 그해 유니폼을 벗었다.
뛰어난 신인 홍명보가 입단했고 최고의 외국인선수로 꼽히는 라데 보그다노비치가 등장했다. 1992년 시즌 스틸야드에 둥지를 튼 라데는 이후 포항에서만 55골 35도움을 올렸다. 이듬해 황선홍이 영입돼 포항은 최강의 공격진을 갖췄다.
스틸야드의 특별 관람석(왼쪽 위)과 라커룸(오른쪽 위).포항 라커룸은 그라운드와 곧바로 연결돼 있다.(아래)(사진 선원익)
축구 관계자들은 “포항이 1990년대 초반 빠른 공수전환과 뛰어난 기술력을 보인 데에는 잔디 상태가 고른 스틸야드의 도움이 컸다. 라데는 돌파력과 어시스트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잔디가 고른 스틸야드가 아니었다면 그의 이런 능력은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포항의 전통을 설명하는 데 스틸야드만한 시설물도 없다. 세월의 때가 묻어 회색빛으로 변한 스틸야드에는 포항의 17년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포항 홍보팀의 박준형 사원은 “(스틸야드가)공단 안에 있다 보니 우리끼리는 철 먼지가 많이 쌓여 색깔이 변했다고 얘기한다.
워낙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도색 작업을 검토했으나 10억 원의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포항의 전통을 살려 스틸야드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주춤하는 스틸야드와 포항
1만 8,960좌석과 최대 수용인원 2만 5천 명을 자랑하는 스틸야드는 오직 축구만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이다. 몇 차례 보수 공사를 했지만 전체적인 외관은 준공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축구전용구장과 견줘도 그라운드와 관중석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관중석을 향해 드리워진 지붕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지어진 10개의 월드컵경기장 못지 않은 안락한 관전 환경을 제공한다.
포항은 스틸야드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는 축구장이 되도록 정성을 쏟았다. 월드컵경기장 수준의 최첨단 컬러 전광판을 설치했고 경기장 내 조명 및 음향 시설을 새 것으로 바꿔 실감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게 했다. 2003년에는 한국형 잔디를 걷어내고 외국형 4계절 잔디로 바꿨다.
포항 홍보팀의 박준형 사원은 “스틸야드를 처음 지을 때는 현재의 1만 8,960석보다 좌석이 많았다. 1999년 본부석 왼편의 골대 뒷자리를 걷어냈다. 의자를 치우고 서포터 전용석을 만들었다. 전후반 90분 내내 서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서포터들에게는 의자가 필요없다. 대신 서서 응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좌석으로 따지면 한 500석 정도는 될 것이다. 막상 만들어 놓으니 활용도가 높지 않아 안타깝긴 하지만 축구장에 서포터 전용석을 만든 클럽은 국내에서 포항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팬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포항의 노력은 좋은 결실을 맺었다. 1991년 시즌 첫선을 보인 스틸야드의 경기당 평균 관중수는 1만 4,022명을 기록했다. 포항이 통산 3번째 별을 가슴에 단 1992년 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1만 5,577명의 팬이 스틸야드를 찾았다. 포항은 이후 1997년 시즌을 빼고는 1999년 시즌까지 해마다 1만 5천 명 정도의 관중을 모아 K리그의 인기구단으로 우뚝 섰다.
파리아스 감독(왼쪽)이 아니었다면 포항의 부활은 없었을지 모른다. 박원재(오른쪽)는 포항 유소년 클럽 시스템이 키운 대표적인 선수다.(사진 선원익)
선수들은 뛰어난 경기력으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우승은 못했지만 1995년 성남과 3차례 맞붙었던 챔피언결정전과 백승철의 멋진 골로 기억되는 1998년 울산 현대와의 플레이오프는 K리그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승승장구하던 포항은 1999년을 고비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1999년 시즌 12승3무12패로 K리그 10개 팀 가운데 5위에 그친 포항은 이듬해 5승11무11패로 9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2003년 시즌까지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포항은 2004년 시즌 전기리그에서 깜짝 우승을 했지만 후기리그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하며 수원에게 우승트로피를 내줬다. 대표선수들도 하나둘 빠져나갔고 스틸야드를 가득 메웠던 포항팬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2000년 스틸야드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1만 2,094명이었다. 이듬해 1만 1,615명으로 줄었다. 2002년 시즌 1만 1,953명에서 2003년 시즌 6,823명으로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뒤로 틀을 갖춘 K리그의 ‘빅4(수원 삼성, FC 서울, 성남 일화, 울산 현대)’에 포항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포항 클럽의 고위 관계자는 “1998년 시즌까지는 구단에 대한 지원이 괜찮았다. 그런데 1999년부터 모기업인 포스코의 정책이 바뀌었다. 우승보다는 유소년 선수 육성이나 축구 인프라 구축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송라 클럽하우스도 그 무렵 짓기 시작했다. 성남이나 수원 등 수도권 팀들이 선수 영입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때였는데 우리는 그럴 사정이 못됐다. 조금은 자만했던 것도 같다. 유소년팀에서 성인팀으로 올라오는 선수들이 있으니 수도권팀들처럼 무리하게 선수를 영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떠오르는 스틸야드와 포항
11월 4일 스틸야드에서 열린 2007 K리그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정규리그 1위 성남이 이길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좌우 윙백 박원재와 최효진의 빠른 돌파로 기선을 잡은 포항이 전반 31분 선제골을 터뜨렸다.
포항의 공격형 미드필더 따바레즈가 페널티 박스 왼쪽 외곽에서 올린 프리킥이 수비수에 맞고 흐르자 박원재가 강력한 왼발슈팅으로 연결해 성남의 오른쪽 상단 골망을 흔들었다. 다급해진 성남이 공격라인을 바짝 끌어 올리면서 포항에게 뒷공간을 내주는 꼴이 됐다. 포항은 후반 고기구와 이광재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경기 종료직전 장학영이 한 골을 만회한 데 그친 성남을 3-1로 꺾었다.
스틸야드는 축제 분위기였다. 포항은 정규리그를 5위로 마쳤지만 6강플레이오프에서 경남 FC, 준플레이오프에서 울산, 플레이오프에서 수원을 잇따라 무너뜨리며 포항 시민들의 발걸음을 다시 스틸야드로 향하게 했다. 열세가 예상됐던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포항 시민들은 열광했다.
황선홍, 홍명보, 박태하, 이동국(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은 포항 유니폼을 입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선수들이다.(사진 제공=포항 스틸러스)
챔피언결정전 1차전이 벌어진 스틸야드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경기장 남문 부근 관중석에는 “나의 포항, 나의 사랑”을 외치는 포항 응원단이 붉은 색으로 서포터 전용석을 도배했다. 성남 서포터가 자리를 잡은 북문 주변에는 2천여 명의 해병대 장병들이 홈팀 포항을 응원했다. 이날 관중은 2만 875명이었다. 스틸야드에 2만 명이 넘는 관중이 찾은 것은 2002년 7월 17일 수원전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선제골을 터뜨린 박원재가 성남전 승리의 수훈갑이었다. 박원재는 포항 유소년 클럽 시스템이 키운 대표적인 선수로 꼽힌다. 포항이 직접 지원하는 포항동초등학교와 포철중, 포철공고를 졸업한 박원재는 포항에 입단한 이후 꾸준히 출전 기회를 얻으며 성장했다.
포항의 맏형 김기동은 “대표팀 경기를 지켜보면서 대표선수 누구누구보다는 우리 팀 선수들이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황재원과 황지수를 그런 선수로 꼽을 수 있다. 한 명 더 꼽으라면 박원재다. 축구협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스틸야드에서 열리는 포항 경기를 자주 본다면 이들이 대표선수보다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항 김현식 사장은 챔피언결정전 1차전 승리에도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올시즌을 끝으로 임기가 끝나는 김사장은 11월 5일 SPORTS2.0과 만난 자리에서 “연임 여부는 주주 총회에서 결정된다. 전적으로 주주 총회의 결정에 따를 것이지만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김사장은 “포항을 비롯해 K리그에는 14개 팀이 있는데 진짜 프로팀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립도가 형편 없다. 포항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우리는 나은 편이라고 보는데 모기업의 지원을 50% 수준으로 낮추고 나머지는 관중 수입이나 향토 기업 후원 등으로 메워야 할 것이다. 포항의 입장 수입은 1년에 5억 원에 불과하다. 포항의 1년 운영비가 200억 원이 넘는데 이런 구조로는 도저히 수지 균형을 맞출 수 없다. 클럽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스틸야드에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를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포항과 성남의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다음 날 다시 찾은 스틸야드는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듯 어지러웠다. 관중석 여기저기 널려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손이 분주했다. 라커룸 청소도 끝나지 않았다. 라커룸 한쪽 구석에 버려진 ‘우황청심환’에 눈길이 갔다.
포항 관계자는 “아마도 국내선수들이 먹은 것 같진 않다. 빈야스 피지컬 코치가 먹은 것 같다. 수원과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빈야스 코치가 우황청심환을 먹는 것을 봤다”고 귀띔했다.
어지러워진 스틸야드를 정리하는 작업을 지휘하는 인물은 포스코 행정지원부의 스틸야드 담당 진명길 씨다. 1996년 입사해 포스코 본사와 스틸야드에서 번갈아 가며 근무하고 있다는 진씨는 스틸야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다.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에서 일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경기장이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만큼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관중이 많이 오면 내가 일을 잘한 것 같아 뿌듯하다. 반대로 빈자리가 많으면 내가 일을 잘못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여기에는 축구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축구박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넓은 광장이라도 있으면 팬들이 보다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