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1독서 : 다니 12,1-3
제2독서 : 히브 10,11-14.18
복 음 : 마르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교회는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하며, 가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난한 이들과 깊은 형제애를 나누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와 가난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 되셨습니다.(루카 4,18; 19,10 참조)
교회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바로 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가난의 깊은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가난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참되게 거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긴 십자가의 가난에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면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세상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가 되셨듯이 교회도 비우고 버려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교회헌장 8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난을 자기 것으로 할 때,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간직할 때 시작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성녀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약간의 선의에도 조건이 붙으면서 주님의 활동을 가로막아
자기의 거룩함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됩니다.
악습에 빠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먼저 비판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비판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를 위해, 비판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아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성호경으로 주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호경이 힘든 기도일까요?
성호경 하는데 5분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 힘들다고 인정하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5초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 조금의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서 거룩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선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얼마 안 있어 끔찍한 일들이 자기들 주변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 말씀에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이며,
특히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선의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 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 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전 생애를 통하여 천국 갑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천국과 지옥 중에서 어느쪽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예, 다행입니다. 천국을 갈망하고 살아온 은총이 열매 맺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13,27).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끝까지 믿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죄우한다’는 광고문도 있었지만,
믿는 이들의 순간의 선택은 영원 생명과 직결됩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릴’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리 준비된 사람은 구원의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고, 지금이 은총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이 순간을 통하여 미래가 옵니다.
그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마르13,24) 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3,13-15).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하는 분이 계시나요?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요즘은 입시지옥, 취업 지옥, 지옥 같은 부부생활, 생계 지옥,
솔로 지옥, 지옥 쭈구미, 지옥같은 경제위기에서 살아나는 방법,
지옥이라는 참담하고 어려운 것을 표현합니다.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2,13).
지금 지옥을 만드시나요? 천국을 가꾸시나요?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지옥 간다면 너무 화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천국 모두 갑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13,31). 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읽지 말고
나의 구원을 위한 말씀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천국을 바라시는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하늘을 살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착한 목자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품아(세상을 품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8년 명성진 목사님은 학교를 나와,
세상에 버려진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은 소년원엘 들락거렸고, 본드를 흡입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고독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명성진 목사님은 우연히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경찰서, 법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중독은 중독으로 치료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음악 공연을 했습니다.
자전거로 몽골 여행을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습니다.
목사님의 진심을 본 학생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튕겨 나온 학생들이 이제는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전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는 바퀴가 있고,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학생들이 ‘믿음과 희망’의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목적을 잃으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자전거처럼 넘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1988년, 지금부터 36년 전에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돈 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만든 청소년 자립 직업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들이 찾아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왔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청소년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것이 살레시오 수도회가 되었습니다.
1988년 군대에서 제대한 저는 복학 할 동안
돈 보스코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소국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돈 보스코 센터에서 ‘선반, 조립’과 같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미사도 드리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주일에는 학생들과 함께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갔습니다.
저는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때 했던 영어 공부는 복학해서 대학원 시험 볼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제가 본당 신부로 갔던 본당에서
그때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함께 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결혼해서 세 아이의 아빠가 돼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청소년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0년 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한다고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제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 존재로서,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 13장 전체에 걸쳐서 하신 종말론적 담화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해 실현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26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
(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카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참조: 요한 11,52).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 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더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 10,12-1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는 유달리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많습니다. 바로 작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이런 분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고 동반하려는 교황님의 의지가 대단합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총애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 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이혼 후 재혼한 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단호하게 직진하십니다.
“실수와 죄악은 단죄돼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해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현대 가정의 실제 삶과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이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합시다.”
“우리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그 안에서 성체는 완전해진 자들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우선적 선택과 극진한 사랑을
얼마나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종말의 법칙: 죽음의 법칙을 알면 생존 법칙도 보인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적어도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묵상할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멸망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우선 세상의 한때 잘 나갔다가 망하게 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에게서도 분명 태양과 달, 별이 빛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먼저 한때 휴대전화 분야의 글로벌 리더였던 노키아 제국의 멸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키아는 자신의 명성과 기술에 안주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애플과 구글의 터치스크린 시스템을 거부하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더는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코닥의 멸망을 살펴볼까요?
코닥은 세계 카메라 필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결국 자기 이익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그 기술을 묻어버렸습니다.
다른 회사들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고 실용화하였을 때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제품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불량품을 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호통을 치며,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5년 삼성 휴대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희 회장은 공장에서 휴대폰, 텔레비전, 팩스기 등
불량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추정 가치 약 500억 원(당시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삼성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 이익만이 아닌 고객을 감동하게 하려는 마음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다.”(1976년 언론기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면 그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익은 잊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매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러면 망하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의 관심은 고객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차차 자기 이익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홍익인간, 곧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잊힐 때는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기억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조금은 희생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계명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려면 규칙적인 화형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셋째 날에 땅에서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존재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해는 하루, 달은 한 달, 별은 1년 주기로 돌아옵니다.
이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는 하루, 한 달, 1년 주기로 규칙적인 예배 규정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무시되는 날 종말입니다.
이것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대전 ‘성심당’을 모델로 삼읍시다.
창업자 임길순 씨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라는 정신으로
‘성심’(예수님 마음)으로 가게명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냈다가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후손들은 창업자의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시작하여
5개의 매장으로 순이익이 3,400개 대기업 파리바게뜨를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은 성당에 나와 기도하며 하느님과 창업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든 물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괜히 그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파기합니다.
제 역할 수행을 위해 우리의 태양과 달과 별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교회 典禮의 週期는 12월 초, 대림 첫 주일에 시작하여,
그다음 해 11월 말,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끝납니다.
典禮週年이 끝나가는 시기, 곧 오늘과 같은 날에는
미사에서 복음으로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고,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당연히 유대교 묵시문학의 언어를 상기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 전 2세기 유대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문헌에 익숙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 문헌의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의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모두 유대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미래가 가깝다는 사실을 말하는 주제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종말의 ‘시와 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기원 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후, 유대인들의 완전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했고,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의 참패와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를 겪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며, 건강식품과 보약을 먹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신앙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立身揚名하여 재물과 권력을 얻어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이 다가올 때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이 원하시는 미래가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일만 실천하며 살았던 생명이 겪는 종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곧 자기의 현세적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던 대자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들더니 어느덧 낙엽 되어 떨어지고,
우리의 발에 밟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푸르지만 않습니다.
단풍도 들고,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중히 생각하였던 우리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삽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업이나 보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시선과 몸짓,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사람을 살리는 몸짓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관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나의 나라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만이 내 인생의 최대 보람이라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미래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를 축복이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내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보장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미래를 찾아 나서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을 치장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행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삶입니다. 한 번 하는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도,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예행연습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이 하는 소중한 일들은 모두 이렇게 연습도 없이, 준비된 대사도 없이,
보장된 것도 없이 감행해야 하는 모험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면, 헛되고 헛된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우리가 보고 확인할 수도 없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현재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삽니다.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하실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기에
우리에게는 어려움, 곧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도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를 사는 길이고,
또한 하느님의 미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