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 영화 발전 거점 역할했던 곳"
서울 도심 극장으로 1990년대 한국 영화 중심 역할을 했던 서울극장이 다음 달 개관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 한국 영화 전성기를 여는 데 큰 몫을 했던 극장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되면서 “한국 영화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극장은 지난 2일 홈페이지에 “1979년부터 약 40년 동안 종로의 문화중심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울극장이 2021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공지 글을 올렸다. 영화계에 따르면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합동영화사는 최근 건물 매각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종로3가 흥행 트라이앵글’ 중심축
서울극장의 역사는 합동영화사가 재개봉관인 세기극장을 1978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충무로 유력 제작자였던 곽정환(1930~2013) 합동영화사 회장은 극장을 개봉관으로 변경해 79년 새로 문을 연 후 빠르게 서울 중심 극장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1989년 단관극장을 벗어나 3개관으로 증축하면서 멀티플렉스 시대를 선도했다. 97년엔 7개관으로 시설을 확충했다.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이준익 감독은 “당시 서울 1번 극장은 충무로 대한극장이었으나 서울극장이 90년대 두각을 나타내며 서울 대표 극장으로 부상했다”고 밝혔다.
서울극장이 떠오르면서 종로3가는 한국 영화 흥행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을 중심으로 서울극장(남서쪽)과 피카디리극장(북서쪽), 단성사(북동쪽)가 포진해 ‘흥행 트라이앵글’을 형성했다. 90년대 세 극장의 관객 끌어 모으기는 전쟁 수준이었다. 극장들은 지하철 입구마다 호객꾼을 배치해 전단을 배포하는 등 잠재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극장 사이 영역 다툼도 치열했다.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서울극장은 세기극장 시절부터 영화를 보기 위해 자주 들렀던 곳인데 90년대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경쟁이 치열해 암표상마저 각 극장 구역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서울극장이 중심 극장으로 부상하는 데에는 합동영화사의 영향력이 한몫했다. 곽정환 회장은 합동영화사 소유로 부산 대영극장, 대구 중앙시네마 등 지방 유력 극장들을 인수해 전국 배급망을 구축했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지사를 설립해 수입사를 거치지 않고 영화 직접배급(직배)에 나섰던 변혁의 시기였다. 서울극장은 배급망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한국 영화 중심 대접을 받았다. 합동영화사의 흥행 영화 확보도 서울극장의 성장 동력이었다. 합동영화사는 자사 출신 강우석 감독과 사업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며 ‘투캅스2’와 ‘초록물고기’ ‘넘버3’ 등 화제작에 투자해 성과를 올렸다.
서울극장 매표소 관객 줄이 흥행 척도
서울극장이 흥행 메카로 자리 잡자 영화 개봉일(당시는 매주 토요일)마다 영화인들이 종로3가를 찾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서울극장에 관객이 얼마나 드는지 보면 흥행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다. 영화인들이 진을 쳤던 곳은 서울극장 2층 커피숍 팡세였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마케팅과 광고 일을 할 때부터 10년 넘게 매주 토요일 서울극장 앞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서울극장 매표소에 관객이 얼마나 줄을 길게 섰냐에 관계자들의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관계자들은 피카디리극장과 단성사 개봉 영화와 기싸움을 하기 위해 줄을 길게 보이게 하려 꼼수를 쓰기도 했다. 매표 담당자에게 발권 속도를 늦춰 달라고 종용하는 해프닝이 종종 발생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전화 문의 건수가 흥행 예측 지표이던 시절이기도 했다”며 “서울극장 전화안내원이 바를 정(正)자로 문의 건수를 기록하면 영화인들이 주요 정보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 공세에 몰락
서울극장의 위세는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한국 영화 화제작 대부분이 서울극장에서 언론배급 시사회를 열었다. 배우들이 흥행을 위해 무대인사를 시작하는 곳도 서울극장이었다.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들이 문화 관련 행사를 위해 찾는 곳도 주로 서울극장이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인들이 시사회에서 만나 투자와 협업 등을 논의했다”며 “서울극장이 영화계 주요 동력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오 평론가는 “서울극장의 영업 종료는 극장산업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강한 신호”라고 덧붙였다.
서울극장의 영화는 대기업 계열 멀티플렉스 체인이 세를 확장하면서 퇴색했다. CJ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동양그룹 계열사로 설립, 현재는 중앙그룹 계열사)가 공격적으로 지점을 늘리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이준익 감독은 “강우석 감독 등 90년대 한국 영화를 일으킨 세대가 서울극장을 거점으로 꿈을 키웠다”며 “한국 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는 “서울극장을 찾아가 좋은 관을 배정해달라고 읍소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서울극장의 퇴장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