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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묵시 1,1-4.5ㄴ; 2,1-5ㄱ
복 음 : 루카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하신 말씀은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청하는 눈먼 이를 곧바로 고쳐 주시지 않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신의 바람을 아룁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예수님께서는 그가 바라는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게 됩니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내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애덕의 행위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행위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는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배려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려는 선의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을 받도록 강요할 때입니다.
살레시오회의 설립자인 요한 보스코 성인은 사랑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때 상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상대를 중심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식복사 없이 생활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대형 할인 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 안에는 없는 물건 없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카트 안에 넣게 됩니다.
특히 ‘원플러스원’ 상품의 경우는 큰 이득이라는 생각에
지금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카트 안에 넣곤 했습니다.
산 것을 집에 와서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한숨을 짓게 됩니다.
찬장, 창고에 1년은 거뜬하게 살만한 물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데 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많아져서 때로는 골치까지 아파집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유통기한이 지나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물건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감정만 가져야 하는데, 불필요한 감정까지 품고 삽니다.
미움, 원망, 판단, 걱정, 불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우리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는 우리가 아닌, 필요한 것만을 갖는 우리가 될 때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물건도 그렇고 또 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만을 가지려고 할 때,
주님께도 필요한 것만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달라는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실 보통 구걸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빈곤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 푼 줍쇼~”를 말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셨고,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 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마음은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형제애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일 미사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형제님과 자매님이 면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사목회가 있었지만, 저를 찾아온 부부와 면담했습니다.
10년 전에 달라스 성당에서 아들과 함께 세례받았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로 이사 갔다가 다시 달라스로 왔다고 합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성당을 멀리하였다고 합니다.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서 벌 받았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염치가 없이 어찌 그런 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부님께라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은 형제님이 성당에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형제님이 성당에 다니지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청하면 기꺼이 장례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슬픔이 가득했던 부부는 위로받았고, 아들을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전구 함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조욱현 토마 신부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준다.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에서도 벗어났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개안의 여정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119,105)
날마다 등불에 불을 켜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린 왕자의 점등인點燈人을 이해합니다.
어린 왕자는 예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과 나눴을 때 참 좋아했던 책이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그 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어린 왕자는 점등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 아저씨, 왜 지금 마악 가로등을 껐어?”
“명령이다. 안녕.”
“점등인이 대답했다.
“명령이란 무어야?”
“가로등을 끄라는 명령이다. 안녕.”
“그런데 왜 다시 가로등을 켰어?”
“명령이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데.”
하고 어린왕자가 말했다.
“알아듣고 어쩌고 할 것이 못돼. 명령이야, 안녕.”-
명령에 복종하듯 쓰는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진리이신 주님 명령에 복종할 뿐입니다.
얼마 전 새롭게 읽은 한용운의 시 ‘복종’이 생각납니다.
순명, 순종 말마디보다 요즘 부쩍 좋아진 복종이란 말마디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명령에 기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소복음서라할 만큼 내용도, 상징도 풍부합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는 늘 새롭습니다.
강론 제목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날로 눈이 열려가는 눈밝은 개안의 여정인 우리의 영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점차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 중에 날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림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무명의 눈먼 이’가 상징하는바,
바로 눈이 가려 방향을 잡지 못한 가련한 인간 존재를,
또 길가에 앉아서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은 도인道人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복된 운명의 도인들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닫혀있지만, 영적 갈망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 깨어 있는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말마디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르짖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아랑곳없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마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과의 문답은 불가의 선문답을,
또 사막교부를 찾았던 제자와의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말도 글도 행동도 짧고 순수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단도직입적 질문에,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문득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 선사가
그의 스승 석두스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경우가 생각납니다.
정처 없이 떠돌던 효봉이 석두스님 소식을 듣고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을 찾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가?”
스님의 물음에
“이렇게 왔습니다.”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 돌고 앉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이라 법명을 내립니다.
진리를 찾는 열망이 간절했기에 이런 동작으로 답했고
이에 화답한 석두 큰 스님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걸인에 대한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전제되는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영적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이를 본 군중도 고무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이들의 믿음도 한층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새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진리이신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찬미드리라 있는 입이며,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 이상 눈멀지도 않았고,
더 이상 걸인도 아니고, 더 이상 길 위에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길
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만나 길의 방향을 잡았고
주님과 함께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삶의 방향, 삶의 목표,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 인생입니다.
말 그대로 개안의 여정이요 그의 마음의 눈은 날로 밝아지고 맑아졌을 것이며
영적시야는 날로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개안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물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 에페소 교회에 주는 말씀이
흡사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듯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하여라.”
초발심을 회복하여 주님 사랑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은총이 주님 찾는 열정에 불을 붙여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