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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4월 30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聖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드시며 당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오늘 ‘성소 주일’을 지내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성직과 수도 생활을 지망하는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늘 귀 기울이도록 기도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하며 주님께서 한국 교회에 풍성한 성소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한마음으로 청합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
우리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러보면 많은 사실을 알게 되고 밭농사나 논농사도 그 작물의 특성에 따라서 길러야 하고 그 특성에 맞추어 물을 제때 주어야 하고 적절하게 비료나 거름을 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또한 과수들과 원예작물도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보통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잘 자라게 할 수 없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특히 가축을 길러보면 가축의 특성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특성을 모르면 가축을 제대로 기르지 못합니다. 가축을 기르는 일 중에 가장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말을 키우는 일이라고 하는데 말은 그만큼 비싸고 잘 돌보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몇 가지 가축만 키워봤지만 개나 소는 비교적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엄청나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꼭 반대로 하는 바람에 돼지를 한번 잡으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돼지를 앞으로 가게 하려면 꼬리를 잡아당기면 쏜살같이 앞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양은 더 말을 잘 듣는다고 하는데 길러보지 못해서인지 양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실제로 그런지 의문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호주를 여행할 때에 양 목장을 견학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기계로 양털을 깎는데 양이 정말 조용히 그 말을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을 잘 듣는 반면에 양들은 엄청나게 고집이 세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황소고집’이라고 해서 고집이 센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소와 같이 시키는 대로 곧게 하는 사람을 ‘우직’(愚直)하다고 하는데 이는 소처럼 절대로 뒷걸음을 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강직한 성격을 묘사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에게 뒷걸음을 시키려 했다가는 큰 코를 다치기도 하는데 양도 그렇게 고집이 센 모양입니다. 염소는 그래도 길러보기도 하였는데 이솝우화에 나오는 외나무다리에서 염소 두 마리가 만나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정말 고집이 셉니다. 그리고 화가 나면 뿔을 들이대고 받으려고 하는 통에 겁이 납니다. 느닷없이 머리를 들이대는 염소는 당할 재주가 없고 높은 절벽도 아주 잘 타고, 바위가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은 의심이 많아서 주인 외에 모르는 사람의 말은 듣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는 자신들이 귀하게 여기는 음식을 올려놓는데 우리나라에는 주로 소고기를 올려놓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양을 통으로 태워서 바치거나 피를 바칩니다. 그래서 양이 속죄의 제물로 많이 쓰인 모양입니다. 양은 약으로도 애용되고 한의학에서 양은 양(陽)을 돋우는 보신 보양 동물이라고 합니다. 염소도 양의 일종이지만 성격을 판이하게 다르답니다. 양은 아주 독특한 성격을 지닌 동물이라 더운 여름날에도 서로 살을 맞대고 붙어 있기를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상처를 입을 정도까지 비비고 붙어 있으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염소는 양떼 사이를 헤집고 다녀서 양들을 떼어놓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의인과 악인을 갈라놓으신다는 말씀이 양은 서로 사랑해서 붙어 있으려고 하고, 염소는 서로를 갈라놓으려고 하여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웃과 갈라진다면 염소의 무리에 들어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또 이웃과 갈라지도록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나 이웃사람들 얘기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을 염소처럼 될 것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요한 재산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양과 염소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염소와 양을 낮에는 언덕에 방목하여 풀을 뜯게 하고 밤에는 우리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양의 고기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즐겨 먹었기 때문에 양고기는 참으로 부드럽고 맛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냄새가 약간 난다고 싫어하였는데 나중에는 어린 양고기 맛에 푹 빠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나 양이나 염소도 태어난 후 7일 동안은 반드시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함께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레위 22,28)고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애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고기와 젖을 사람에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털을 옷감 재료로 제공하여 겨울을 따스하게 보내게 합니다.
이처럼 양과 염소는 고기는 식용으로, 털과 가죽도 의복으로 사용되어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동물입니다. 성서에서도 무려 500회 이상이나 양이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백성을 양떼와 염소로, 하느님은 목자로 자주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린양과 염소는 악의가 없고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염소는 풍요, 또는 생식력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어린양과 함께 고대 근동 지역과 지중해 연안에서 제사 때 제물로 바치는 희생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에서 어린양은 가장 흔한 희생의 제물이었습니다. 제단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희생의 어린양이 한 마리씩 바쳐졌다(출애 29, 38-39). 아람어에서 ‘종’과 ‘어린 양’을 의미하는 말이 같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는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 29)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은 희생과 속죄라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친근한 동물이었습니다.(허영엽 신부, 성서의 동물들 참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양에게 비유하시고 당신을 목자로 비유하시는 것에는 서로 사랑하며, 붙어있으며, 의심이 많고, 참 목자에게 순종과 겸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집도 세고, 목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둑한테 생명을 빼앗기고, 약탈을 당할 가련한 신세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켜주실 주님께 우리는 진정으로 의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문이라고 하셨으니, 또한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어 이끌고 가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분의 품에서 떠나지 않고 그분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실 때에 잘 알아듣고 딴전을 피우는 우리를 그 분께서 바로잡아 주실 때 곧장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불러내시어 앞장서 가시는 그 분의 길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서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20ㄴ-25
사랑하는 여러분,
20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21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
23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축일4월 30일 성 비오 5세 (Pius V)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1504-1572년
같은 이름 : 비우스, 피오, 피우스
교황 성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교외 보스코(Bosco)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래 이름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였다. 그는 어린 시절 목동으로 양을 치며 지내다가 14살 때에 보게라(Vogher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서원을 하고 미카엘(Michael)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에 제노바(Genova)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파비아(Pavia)에서 16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며 교수로 재직했다. 1550년에 이단자들의 피신처로 스위스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코모(Como)와 베르가모(Berga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성실히 직무를 수행했고, 당시 교황청 검사성(檢邪省) 장관인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a) 추기경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검사성의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555년 카라파 추기경이 바오로 4세(Paulus IV)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그는 신임 교황에 의해 네피(Nepi)와 수트리(Sutri)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어 1557년 3월 15일 추기경이 된 그는 다음 해에 검사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66년 1월 교황 선거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마지못해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교황명을 전임자인 비오 4세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비오 5세로 정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즉위 이후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년)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지켜나갔는데 교황복 안에 수도복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그는 추기경단의 개혁을 시작으로 주교와 사제들의 상주 의무를 비롯해 공의회의 개혁 규정들을 각 교구 내에 도입하고, 수도회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다. 그가 교회 개혁을 하면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전례서의 개혁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따라 1566년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를 출판하면서 젊은이들에 대한 교리교육이 모든 본당 사목자의 의무임을 강조했다. 이어서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를 개정하고,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새로 출판했다. 그는 또한 불가타(Vulgata) 성경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e Aquino)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1576년 3월 11일 그를 교회 박사로 선포하였다.
교황 성 비오 5세의 재임 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에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고, 영국 가톨릭 신자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애썼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의 화해에 실패하면서 1570년 2월 25일 회칙을 통해 여왕을 파문하였다. 그는 또한 서유럽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협하던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Osman Empire)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하여 1571년 8월 8일 베네치아(Venezia)와 에스파냐와 함께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남쪽 코린토스만에서 터키군과 대적하여 레판토(Lepanto)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전투에 참전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묵주 기도 바칠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신자들과 함께 로마에 있는 도미니코회 본부인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 성당에서 승리를 위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묵주 기도를 바쳤다. 그는 레판토 해전의 놀라운 승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로 인해 가능했음을 믿으며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선포하였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는 이 축일의 명칭을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하였다.
수십 년 동안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교황 성 비오 5세는 1572년 5월 1일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는데, 1588년 1월 교황 식스투스 5세(Sixus V)가 그의 시신을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Maggiore Basilica)으로 옮겨 화려하게 장식한 새 무덤에 안치하였다. 그는 선종한 지 100년이 지난 1672년 5월 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전통적으로 매년 5월 5일에 기념했었는데,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4월 30일로 변경하여 보편 전례력에서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비오 5세 (Pius V)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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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