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16)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① 새벽에 쓴 시, 새벽에 읽다 2-2/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울산매일 https://cp.news.search.daum.net/p/
[박영식 시인 ‘육필의 향기’] (29) 이승하 시인의‘화가 뭉크와 함께’
① 새벽에 쓴 시, 새벽에 읽다 2-2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홍우계 선배는 대학 3년 동안 쓴 모든 시가 학우들에게 난도질당하고
미당 선생님에게 매도되는 수모를 겪다 참담한 심정으로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논산훈련소의 악명 높은 조교였던 선배는 신병의 사물함에 정음문고 44권
《徐廷柱詩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압수합니다.
대학시절에 시를 가르쳤던 스승의 시를 뒤늦게,
책이 닳도록 읽은 홍우계 선배는 비로소 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울화앙앙한 마음으로 보낸 대학시절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스승이 단 한마디로 선배를 인정하는 날이 옵니다.
제대하고 나타난 제자가 시를 칠판에 판서했을 때 스승 왈 “굼벵이가 군대 갔다 오더니 매미가 되었네그려.”
홍우계 선배를 《현대문학》으로 등단시킨 스승은 지방에 내려가 교사 생활을 하는 제자에게
때때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자상한 면이 있었습니다.
전화를 교장 선생님께 먼저 걸어 제자의 위상을 한껏 올려준 저의는,
잡무를 많이 맡겨 시 쓸 시간을 빼앗지 말라는 배려를 교장 선생님이 알아서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홍 선배가 근로장학금을 탔다는 희소식을 들은 시골 어머니는
‘근로’의 뜻은 잘 모르겠으나 ‘장학금’이라는 말에 그만 감격했습니다.
“고마우신 교수님께 내가 무슨 선물을 해야 할 텐디 뭐가 좋을랑가.”
고민 끝에 만든 것이 토속주였습니다.
우직한 아들은 개강 첫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술을 륙색에 지고 강의실로 들어와
학우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습니다.
미당 선생은 희색이 만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없네. 우리 모두 홍흥기(홍우계 시인의 본명) 군 어머니가 손수 담그신 저 술에 취해보세.”
스승과 제자가 학교 잔디밭에 둥글게 앉아 권커니 잣커니 술잔을 돌리는 동안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번지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있는데 가무가 빠질 수 없습니다.
스승은 그날, 이미 날 저문 캠퍼스 한 구석에서 제자들이 합창하는
〈푸르른 날〉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날 스승이 부른 노래의 제목을 기억하는 제자는 없습니다. 모두 너무나 취했기 때문에.
스승은 시가 무엇인지 아는 제자에게는 전폭적으로 사랑을 쏟았습니다.
시를 잘 못 쓰는 다른 학우가 보면 이것은 아닌게아니라 ‘편애’였습니다.
귀가 커 ‘이소(耳笑)’라는 호를 받은 임영조 선배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계곡 같은 시인이 되라고 ‘우계(又溪)’라는 호를 받은 홍흥기 선배는
특별히 많은 사랑을 받은 경우에 속합니다.
또한 재주 비상한 송기원 선배를 선생님이 얼마나 각별히 사랑하셨던가는
당신의 산문집 《未堂隨想錄》(민음사, 1976)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전 아홉 시부터 시작되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4학년 교실로 들어가려는 길에 송기원 군을 만나 그의 웃음도 아닌 웃음 앞에 나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여기 4년생 송기원 군은 금년째 8년을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중략)
너는 ‘피’라는 것을 너무 과도히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물이다. 피는 물과 색소의 반죽으로 색소만은 물보단 더 멀리 갈 자격이 있어, 태양 광선이 닿는 데까지는 물론 갈 수가 있지만, 영원히 갈 수 있는 빗물질의 영혼의 능력에는 따르지 못한다. 피보단 영혼을 믿고 지금 당장 무엇이 잘 안 되는데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네 능력 살려 가는 데 주력해라. 학교에서 할 수 없어 자퇴 권고했으면 우선 나오지도 말고, 어디 깊은 절간 같은 데나 들어가서 처박혀 글이나 쓰도록 하렴. 뒤에 봐서 선생님들은 어련히 너를 풀어주려고 하겠느냐. 봐라.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게 굵게 다 이루어질 길은 없는 것도 알아야 한다.
네가 첫째 네 능력보다 훨씬 더 싼값으로 없어지지 않도록은 어떻게라도 해야지……. 나는 그에게 이런 뜻의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그도 ‘예’ 승낙하기에, 어느 절간에 갈 생각이면 내가 소개해줄 테니 언제든지 와서 말하라고 하고, 그 곁을 떴다.
젊은 날의 방황과 월남전 참전으로 8년째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송기원 선배의 열혈(熱血)을 다스리기 위해 선생님은 ‘영혼의 능력’을 믿고 글을 써야 한다고
이처럼 간곡히 충고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메시지를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사랑과 은혜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저는 1981년부터 3년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시 강의를 들었습니다.
창작실기 과목이었으므로 강의는 아예 없는 셈이었고,
학생 습작품의 판서에 이어 수강생들의 합평이 있은 뒤에 스승이
몇 마디 강평을 해주는 식의 수업 방식이었습니다.
강의실 뒷자리 구석에서 담배를 태우시며 앉아 계시는 동안 스승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합니다.
‘저 철없는 녀석, 뭘 모르면서 저렇게 흥분하여 친구의 시를 혹평하고 있군.’
‘저놈은 시를 쓸 줄도 모르지만 영 남의 시를 볼 줄도 모른단 말야.’
아마 이렇게 생각하시며 미소를 짓고 계셨을 것입니다.
저는 홍우계 선배가 초기 습작기에 그러했듯 써서 내는 족족 스승과 학우들로부터 끔찍한 평을 들었습니다.
운 좋게 대학 2학년 가을에 《시문학》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시를 투고하여 당선됨과 동시에
초회 추천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눈에 저는 시종일관 젖비린내 풍기는 문학 견습생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는 쓰지 말게”,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등 가혹한 말씀을 줄기차게 들으면서도
줄기차게 칠판에다 시를 썼습니다.
현실참여의식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비판을 하셨고,
저는 광주에서 죽은 동시대의 학우들과, 스승이 극구 칭송한 전두환 장군을 생각하며
스승의 마음에 들지 않을 시를 반항하듯이 판서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칭찬을 들은 기억이 전혀 없고, “이 시는 이 부분을 대폭 손보면 될 듯도 하네”라는
정도의 평만 들어도 감지덕지였습니다.
4학년 2학기도 막 저물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복학생 선배들도 다수 듣고 있는 수업 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만 지목하여
그간 써온 시를 전부 정리해서 갖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0편을 정서하여 드렸더니 이 노트 찾으러 댁으로 한 번 오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은 저의 글재주보다는 성실함을 아꼈던 것입니다.
댁으로 오라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저는 그때야 알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내제자(內弟子)로 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실험적인 시라 마음에 들지 않을 작품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작품에만 A급이라는 ◎표시를 하셔서
나는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고개를 계속 갸우뚱거렸습니다.
○표는 B급, △표는 C급, 표시가 없는 것은 D급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풍과는 완전히 다른, 수업시간에 보여드리지도 않은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신 것에서 나는
스승의 대가적인 풍모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B급 시는 스승을 의식하고 쓴 전통지향적인 시였고
C급 시는 신춘문예를 겨냥해서 쓴 모범답안 같은 시였습니다.
A급은 중앙일보에, B급은 한국일보에, C급은 조선일보에 투고했는데,
내심 제일 기대했던 곳이 신춘문예 역대 당선작을 의식하고 쓴 조선일보였습니다.
결과는 중앙일보 당선, 한국일보 최종심 오름, 조선일보 낙선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눈은 귀신같이(?) 정확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도 당시로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말더듬이 어법의 시
〈화가 뭉크와 함께〉여서 선생님의 안목에 저는 거듭 감탄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몇 편의 친일 작품을 써 생애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저는 1985년 여름호 《실천문학》을 통해 선생님의 그 작품들을 보고 실망을 넘어 절망해 버렸습니다.
시대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과오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80년대 내내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저로서는 선생님 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인데, 어찌 보면 비정의 세월이었습니다.
제대 후에 전화며 편지로 안부를 몇 번 여쭙기는 했으니 그것이 연말 연하장으로 대체되었고,
어느 해부터인가 그것마저 중단했습니다.
선생님의 과오가 어떠했던지 간에 미욱한 제자에게 베푼 그 크신 사랑을 배신할 자격이 제게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좋은 가르침과 크나큰 사랑을 베풀었거늘 저는 심정적으로 늘
스승의 정치적 과오를 단죄하는 사람의 무리에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선배의 시를 끝끝내 ‘아니다’라고 판정하신 것처럼 저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어 그리 떳떳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꾸중을 밥 먹듯이 들으면서도 시를 끈질기게 써내다 스승의 부름을 받자
‘미당 수제자’라고 학우들의 질투 어린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문병 한 번 가지 않고 스승을 떠나보내고 보니 별명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수업시간에 줄곧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고전을 읽게, 성경을 읽게, 불경을 읽게, 삼국유사를 읽게, 당시(唐詩)를 읽게…….
읽는 동안 길이 열린다고 하셨는데 저는 지금 글품 파는 일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힘주어 하신 말씀을 늘 새기고서 시를 쓰고 있음에 명부의 스승이여,
부디 저를 제자로 여겨주시기를.
시정신이란 건 감성으로건 지성으로건 반드시 가슴의 감동이란 걸 거쳐야만 하네. 가슴앓이 병자가 쇼크를 피하듯이, 시인이라면 마땅히 겪어야 할 가슴의 저 많은 연옥의 문들을 닫아걸고, 사고(思考)의 간편(簡便) 속으로 편승하지 말게. 고도한 정서의 형성은 언제나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지성의 좋은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세.
정말 언젠가 선생님의 마음에 쏙 드실 시 한 편 들고 묘소 앞에 가서 큰소리로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그 독특한 웃음소리와 미소가 떠오릅니다.
읍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수업,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2. 4.22.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16)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① 새벽에 쓴 시, 새벽에 읽다 2-2/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