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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묵시 4,1-11
복 음 : 루카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한 미나를 받아, 수건에 싸서 보관한 종의 잘못은 게으름에 있습니다.
이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마태오복음서는
이 종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태 25,26)
기으름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악덕입니다.
무엇이든 시도해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주님께서는 당신 섭리로 이끄시고,
그 섭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게으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냉혹하시고 무서우신 분으로 여겼기에, 자신이 실패했을 때
그것을 다그치실 하느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 종의 또 다른 잘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만의 성소(부르심)돠 사명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맡긴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십니다.
나라는 사람은 유일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유일무이한 나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성소가 있으며,
그래서 성소의 수는 그리스도인의 수만큼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통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고 또 세상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자신의 성소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두려움 없이 성소의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비록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안에서
언제나 어떤 열매든 맺으리라 믿으며,
담대하고 성실하게 성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삶 안에서 시간이 빨리 가고 끝이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은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본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정말로 빨리 지나갑니다. 문제는 잠이 잘 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끝이 좋지 않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립니다.
이 역시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허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밖에도 시간이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끝이 좋은 경우도 분명히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운동할 때….
이렇게 시간도 빨리 가고 끝도 좋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후회는 늘 끝이 좋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식별해서 가려낼 수가 있습니다.
끝이 좋은 경우를 선택해야 하는데,
단지 순간의 만족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가장 끝이 좋을 수 있음을 알아도
그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운동선수가 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합니다.
그냥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힘든 훈련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시간은 빨리 갈까요? 아닙니다. 아주 느리게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없이는 좋은 끝은 있을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분명 끝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 되어 끝이 가장 좋은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늘 뒤로 미룰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이 세상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힘든 지금의 순간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을 멀리하면 분명 끝은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라고 그들에게 이릅니다.
이 말을 충실히 따라서 한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
한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든 사람은 칭찬받고 선물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한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만 해 둔 사람은 받은 그 한미나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누구의 끝이 좋았을까요? 주인의 말을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끝은 과연 어떨까요?
하느님의 선물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에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 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 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는 것을 가져 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작은 일에 충실해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잘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 ‘한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한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가꾸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데레사).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 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를 위한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 아이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한 중환자 병원에서 4달 동안 지내야 했습니다.
사고 직후 저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보니, 아이의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3번 더 병원을 찾았고, 아이의 모습은 조금씩 좋아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아이를 위해서 세례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아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저와 봉사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아직 아이가 말은 하지 못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조금씩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겨우 발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던 아이가 눈을 떴고, 웃을 줄 알았고,
손을 내밀면 꼭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의 부모는 물론, 봉사자도 모두 울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정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큰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나자렛의 성 요셉처럼 가정을 보호하는 우산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기적처럼 좋은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아이의 병원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성 어린 나눔을 하였습니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서 간호해야 했던 아이의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할머니는 한국에서 와서 아이와 함께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이 엄마의 회사에서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보험이 적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매주 주보에 아이를 위한 기도를 공지하였고, 교우들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에게 ‘성탄 미사’에 아이와 함께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성탄 미사에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세례식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던 표징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는 죽지 않고,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일어나라.)’ 소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일어났습니다.
저도 아이를 위해서 ‘탈리타쿰’이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그렇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걸 슬퍼하기보다 떨어지기 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떨어질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참된 삶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부활의 태양은 떠오르고 새봄 새잎이 또 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 미나의 비유
조욱현 토마 신부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 한다.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지난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 주님 앞에 송구스러운 부끄럽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제 인생 여정 안에 스스로도 놀랄만한
반전과 성장도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신학교에서 동고동락했던 신부님들을 30년 40년 만에 만날 때가 있는데,
너무나 변해버린 제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저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리 자루 마냥,
존재감이 단 일도 없이 지냈습니다.
누가 말을 붙여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늘 여기저기 아프고 비실비실하다 보니
관계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도 영향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완전 바뀌어 버렸습니다.
약장수 저리 가라할 정도로 말 빨도 쎄졌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똘똘 무장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비록 늦게 발견했지만, 죽기 살기로 계발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해 보니,
부족하지만 참 좋은 결과물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한 인간 존재가 환골탈태한다든지 개과천선한다는 것 벼락 맞는 일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판을 완전히 바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주님께서 큰 은총과 자비를 제게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다양한 유형의 고통과 시련, 셀 수도 없이 잦았던 바닥체험,
굽이굽이 지난했던 우여곡절을 겪게 하심으로
저를 부단히 거듭나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나게 감사한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의 한결같음이 아니라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흡사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는 삶, 성장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더 성장시키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있는지 잘 한번 살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순례자
<이미 지상地上에서 시작된 천상天上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대한민국 어디나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단풍 황홀한 11월 만추의 위령성월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느님의 위업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이에 감격한 우리들은 찬미와 감사로 응답합니다.
이런 감동은 결코 값싼 감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사회 현실에 민감히 깨어 있게 하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천국 삶의 실현으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욕심을 비우라는 성현들의 말은 욕심으로 잃었던 나다움을 회복하라는 뜻이다.”<다산>
참으로 하느님을, 진리를 사랑할수록 욕심은 저절로 비워져
나다움의 회복이요 지상에서 시작될 천상의 삶이겠습니다.
“성誠에서 명明에 이르는 것은 본성本性이라 하고, 명明에서 성誠에 이르는 것은 가르침이다.
진실하면 밝아지고, 밝히면 진실해진다.”<맹자>
이래서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함께 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밝아지고 진실해지고 성실해 짐으로 참나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만추의 단풍 아름다운 계절, 땅위에 깔린 단풍잎들이 참 장관입니다.
20년 전 이때쯤 ‘마침내 별들이 되어’라는 제 시를 읽고 감동한 두자매들이
자기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며 감사를 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해의 단풍은 유난히 풍성했고 곱고 밝게 빛났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 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情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05.11.20.>
2005년은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해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의 삶이요,
천상을 향한 희망의 순례자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며 참 성인들은 언제나 천상을 향한 여정에 희망의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진리이자 생명이요 길이신 주님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우물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대목처럼
사막의 순례 여정 중에도 희망의 주님을 품고 살았기에 환희로 빛나는 삶을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예수님은 천상 여정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여정 중에 참 의미심장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 중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열 미나를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 나눠줬고 왕권을 받고 돌아온 주인은 결과를 확인합니다.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 중이었던 종들 중
천상의 꿈과 비전, 희망을 지니고 기쁘게 최선을 다함으로 열 미나를,
또 다섯 미나를 남겼던 종들은 주인의 극찬과 더불어 넘치는 상급도 받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너도 다섯 고을을 가져라.”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자기 역량을 다했던 이들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지상의 삶이 참 아름답고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한미나 그대로였던, 천상의 하느님을 잊고, 희망을 잃고 절망 중에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지냈던 의심 많고 소심한 종은
주인의 호된 질책을 듣고 한미나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이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여정의 삶이요.
생생한 희망과 꿈을 지니고 자기 몫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희망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한미나 그대로의 인생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텅 빈 충만이 아니라 텅 빈 공허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수확을 끝낸 우리 수도원 배밭의 텅 빔은
넉넉하고 편안한 텅 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노년이라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받은 한미나를 얼마나 남기고 있는지 매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 여정의 삶이요,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 되어 살아갑니다.
과연 생생한 희망을 지니고 의욕적으로 내 역량을 발휘하여 한미나를 잘 부풀리고 있는지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고립과 고독의 삶 중에도
풍성한 천상 체험을 통해 내적 풍요의 지상천국을 살았던 요한사도입니다.
천상체험 중 절정 부분을 인용합니다.
하느님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 있는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 여섯에 안으로는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바로 이 부분은 미사전례 중 '거룩하시다'를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부분으로 우리의 영적 풍요의 원천이 됩니다.
이어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경배하며 찬미합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4,11)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공동체는 이 성구를 매주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시 찬미가로 바칩니다.
그러고 보니 성전 제대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으로 바치는 교회공동체의 찬미와 감사의 전례 기도는
그대로 천상 어좌 곁의 천사공동체의 찬미를 닮았음을 봅니다.
파트모스 유배 중인 사도 요한이 이런 내적 풍요의 영적 체험으로 광야의 여정을 살아냈듯이
우리 또한 미사 공동 전례 은총이 천상 희망을 키워주면서
맡은 바 책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지상천국의 삶의 동력이 됨을 깨닫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