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1
글이 길어져 1, 2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금년도 말 그대로 春來不似春이군요. 겨울이 지나고 3월부터는 봄을 만끽하며 열심히 즐기고 살아야지 한 다짐도 마치 지옥의 문을 지키는 하데스의 개처럼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지나가네요. 평생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했는데 환절기인 3월 학기에 시작되었다가 중간시험이 끝나는 4월 25일 경이 되면 멈춥니다. 퇴임임 후 강의를 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코로나 와중에 재발되어 은근히 걱정을 했습니다. 이제 ‘잔인한 달’ 4월마저 거의 다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엘리엇이 읊은
breeding/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얼어붙은 땅에 봄비가 내리면서 눈으로 덮어버린 우리들의 기억과 욕망들이 다시 떨치고 나오게 하는 희망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억을 덮어버리는 것도 때로는 좋지 않은가요? 꼭 이를 헤집어 들쳐 내어 기억을 새롭게 하는 것이 잔인한 것일 수도 있지요. <황무지>의 명구절로 꼽힙니다.
드디어 ‘검수완박’이 통과되었군요. 난 이게 뭘 위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나는 법률적인 측면에 무지하다는 걸 전제로 하고 이 글을 씁니다. 권력만이 아니라 인간사 모든 게 빈 공간을 채우기 마련입니다. 권력의 전이현상입니다. 1970년대 초 경기 등 명문중학, 고등학교를 없애니 모든 게 평등해 졌던가요? 새로운 명문고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문재인 정권 들어 서울대를 없앤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그러면 제2, 제3의 서울대가 생길게 아닌가요? 경찰이 검찰보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가요? 권력자의 힘은 마치 은행과 같다고 합니다. 자산은 100억이지만 그 열배, 백배 대출할 수 있지 않는가요? 권력을 잡으면 명문화된 것 이상으로, 약간 과장되게 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경찰이 권력자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버티던가요? 자유당 시절에는 경찰이 못된 짓은 더 많이 했는데....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리하여 검찰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정권이 하고 싶은 걸 못할까요? 나치시대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나 동독의 슈타지, 소련의 KGB 같이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 없이 또 미국의 FBI 같은 큰 조직을 만들 필요도 없이 경찰의 한 부서에 무슨 일이든 맡기면 잘 할 건데요? 과거 정권의 비리를 표적삼아 담당지역 경찰에게 ‘잘 해봐’ 한 마디만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검찰총장은 임기라도 있어 권력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경찰청장은 권력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경찰정창도 임기는 있지요. 경찰에 정치인 수사를 맡기면 이제 우리 세상이 왔구나 하면 더 신나 막 잡아들여 남영동에서와 같이 주리를 틀지는 않더라도 힘차게 밀어 붙일 건데요? 특히 지방에서는 경찰과 토호들이 손잡으면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겁니다. 참말로, It’s a funny world, 참 우스운 세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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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라면 생각나는 게 많습니다. 나는 국제정치나 외교사 강의를 지정학적 요소들부터 시작합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남북한 인구 7,500만은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독일 다음으로 많은 ‘큰’나라로 시장과 경제력이 그만큼 크다는 말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면적이 44만㎢로 남북한 합친 것의 두 배이며 경제력은 (옛날 기록입니다만) 그 자체만으로 세계 8위였습니다. 지금은 더 올랐겠죠? 텍사스는 한반도의 3배인 66만㎢이구요. 이란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합친 것보다 큰 나라입니다... 등등.
그러면 우크라이나는? 61만㎢로 텍사스보다 조금 작습니다. 프랑스 55만, 스페인 51만, 독일 36만㎢보다 크지요. 냉전시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만) 미국은 정찰위성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곡물(밀) 작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밀 수확이 나쁘면 그 해 세계의 곡물가격이 오르지요. 옛날식으로 말하면 이집트가 로마의 빵바구니(bread basket)이듯이 우크라이나는 미국 중부평원과 함께 (아르헨티나, 호주 등도 있지만) 세계의 곡창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곳이 쑥대밭이 되고 있으니 앞으로 수년간 세계 곡물 값이 엄청 오르겠지요?
역사적, 정치적인 측면을 잠깐 살펴볼까요? 우크라이나는 19세기 카자크 기병대의근거지로 연상되지만 카자크 기병대는 우크라이나의 전유물이 아니라 러시아 등 그 지역민으로 구성된 군사조직이었습니다. 이 보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러시아적 성향이죠. 원래 비슷한 인종이나 인접한 이민족 간에 사이가 좋지 않지요. 2차 대전 중 나치독일군이 들어왔을 때 처음엔 이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워낙 파괴와 살육을 자행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반독일적으로 돌아섰지요. 히틀러가 현명한 판단을 했다면 우크라이나를 아우르면서 곡물을 확보하고 독일남부군은 유전지대인 바쿠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우크라이나는 15개국으로 구성된 소련연방(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의 일원이었지만 유엔 창립회원국입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회의가 열릴 때 50개 회원국들은 대부분이 친미, 자본주의 국가들이었지요.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 패전국이나 한국 등 해방된 지역, 그리고 제3세계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동유럽 위성국 수 개국에 불과했지요. 소련은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소련 연방 중 큰 나라인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벨라루스)에 독립회원국 자격을 줄 것을 요구했고 서방측이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미국의 텍사스나 캘리포니아가 유엔 회원국이 된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비슷한 예로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영국이 4개 회원국 자격을 가진 것이 있지요. 축구 종주국이란 명목을 내세워 FIFA가 자리를 잡지 못한 초창기에 1국 1팀이란 원칙을 무시하고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4개 팀을 가입시켰던 겁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영국 팀’은 존재하지 않고 ‘잉글랜드 팀’은 있습니다. 영국은 FIFA를 쉽게 장악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승은 1966년 ‘안마당’인 런던 대회에서 달랑 한번 했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계속 밀리고 있지요. 우승 못하는 종주국이 무슨 자랑인가요?
우크라이나는 흑해를 끼고 있지요. 고대사에 익숙한 분들은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 등 동부 지중해와 연결하는 지역을, 그리고 근대 외교사에 익숙한 분들은 발칸반도와 크리미아(크림) 반도를 둘러싼 분쟁을 떠올릴 겁니다. 고대는 페르시아 군이 이 해협을 지나 그리스를 침범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로 진격했고) 근대 이후에는 러시아가 지중해 진출과 이를 막기 위한 강대국들이 싸웠지요.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에서 흑해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유럽 러시아에게는 무르만스크 반도에 있는 백해(White Sea)와 함께 유일한 부동항 세바스토폴이 있습니다. 이 항구와 주변지역이 크림전쟁, 1, 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이지요.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의 흑해 연안은 러시아인들에겐 최고의 휴양지입니다. 크렘린 궁 권력자들의 별장은 이곳이 모여 있을 겁니다. 원래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소련연방(USSR)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은 스탈린과 그 후계자인 흐루쇼프가 1954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양도해 버리지요. 당연히 소련, 아니 러시아 영토라고 믿었지만 연방이 해체되고 공화국들이 독립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이를 돌려달라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2014년 러시아가 다시 ‘점령’합니다만 국제적으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영토입니다. 현재의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고 역사적 근거를 내세우면 대마도는 우리 땅, 만주는 우리 땅이 되는 것이고, 국제적으로 이같은 분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겠지요. 2차 대전 후 소련은 흑해를 소련의 호수라고 간주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미국/터키의 해군력 강화로 이 말은 이제 타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2022.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