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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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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봉화일보.내고향명문가.남양홍씨...4
홍왕식 추천 0 조회 62 14.09.15 13: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봉화일보,내고향명문가라는칼럼의남양홍씨기록.

 정승(政丞)에 추증(追贈)되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문정공홍언박에대한글의나머지.....)

충렬왕(忠烈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른 홍규(洪奎)는 충렬왕(忠烈王)이 공주(公主)와 함께 양가(兩家)의 규수(閨秀)들을 뽑아 원(元)나라에 보내려 할 때 자기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이 드러나 한때 가산(家産)이 몰수(沒收)되고 귀양(歸養) 가는 풍파(風波)를 겪기도 했다. **(거짓글이다.후세에만든글인즉.홍규초명홍문계는.맏딸을원나라동경총관홍다구의주선으로,원나라승상아고대에게시집보냄으로써..그배경으로말미암아,작은딸은충숙왕비로보내며 .충숙왕비의소생이곧,충혜왕과공민왕이다홍규는딸이충선왕비와작은딸이충숙왕비,인것이다.)*****
당시(當時) 고려(高麗)는 원(元)의 압제(壓制)하에서 해마다 적지 않은 수(연 5백∼1,000명)의 여자(女子)를 원(元)에 보내야 했다.

충렬왕(忠烈王) 1년(1275년)부터 공민왕(恭愍王) 4년(1355년)까지 80여 년간(年間) 여자(女子)를 뽑아 가기 위해 원(元)이 고려(高麗)에 보낸 사신(使臣)만 50여 차례가 넘었을 정도였다.
이에 민간(民間)에서는 딸을 오랑캐에게 주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結婚)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風習)이 유행(有行)했다고 한다.

홍규는 일족(一族) 홍자번 등의 청(淸)에 의해 가산(家産)이 반환(盤還)되고 풀려났으나 딸은 원(元)의 사신(使臣) 아고대(阿古大)에게 시집갔다. 아고대에게시집간딸이맏딸인것이다>>>
한 나라의 대신(大臣)이 자기 딸을 보호(保護)할 수 없었던 시대(時代), 역사(歷史)의 어두운 한 장은 독립자강(獨立自强)의 절실한 필요성(必要性)을 일깨우는 교훈(敎訓)이기도 하다. 거짖글이다.

그의 딸 하나는 나중에 충숙왕(忠肅王)의 비(妃)가 됐다.

공민왕(恭愍王)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다.

또 한 딸은 충선왕(忠宣王)의 후비(后妃)가 돼 그는 두 임금의 장인(丈人)인 셈.

고려조(高麗朝)와의 이같이 깊은 인연(因緣)으로 당홍(唐紅)의 일부에선 조선조(朝鮮朝) 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다!홍규의후손들이즉..고려왕실의외척들이며,조선태조가,려말에이미,이들을역모와관련하여몰살하였고(홍무무신지변)당성군홍징등을이성계의가병이몰살함.

문정공홍언박의손자들은.공민왕과남색을즐기는파트너였다가자제위사건으로.홍륜,홍관이처형당했다)****

그래서 남양홍(南陽洪)의 융성(隆盛)은 조선조(朝鮮朝) 중반(中盤) 이후(以後)에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朝鮮) 초기 남양홍의 두드러진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개국공신(開國功臣) 이며,집현전대제학이신,남양군, 홍길민(洪吉旼)[호판(戶判)]과 그의 아들

보문각대제학,남양군. 여방(汝方)[이판吏判)], ***이兩代대제학께서조선개국에관여하시면서.비로소남양홍씨조선초기불안전한조선개국에많은역활을하여,홍여방公은인수대비의외옹이며.홍여방의아드님,홍원용은세조의맨윗동서이며.홍원용의아우홍이용은세종의사돈으로평원대군림의장인이셨다.이렇게조선초에는,남양홍씨중랑장파의위인들로인하여,조선의모든남양홍문들이등용되는계기가되셨다..***

세조(世祖)의 쿠테타에 공(功)을 세워 공신(功臣)이 된 홍윤셩(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홍순손(洪順孫) 형제(兄弟)가 있다.

홍윤성(洪允成)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예종(睿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左議政),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를 역임(歷任), 당홍(唐紅) 영화(榮華)의 기반(基盤)을 닦았다.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홍유손(洪裕孫)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운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이정은(李貞恩) 등 뜻을 같이하는 선비(先?)들과 어울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칭(稱)하며 노장(老莊)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토론(討論)하면서 시(詩)와 술(酒)로 세월(歲月)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체제(體制) 비판적(批判的) 현실도피(現實逃避)는 결코 안전(安全)하지만은 않아 그는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 청주(淸州)에 유배(流配)됐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풀려나기도 했다.

성종(成宗)·광해군(光海君) 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當代) 제일(第一)의 풍채(風采)」로 선망(先望)을 받았던 인물(人物). 성종(成宗)은 그를 일부러 명(明)에 사신(使臣)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人物) 자랑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풍채(風采)만큼 글씨도 훌륭했다.

그의 형(兄) 홍응(洪應)은 또 성종조(成宗朝)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다.

이들은 익산군(益山君 )파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參與)한 공신(功臣)으로 벙조판서(兵曹判書)·대사헌(大司憲) 좌참찬(左參贊)을 지내다 사림파(士林派) 출신 언관(言官)들의 탄핵(彈劾)을 받아 벼슬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를 포함(包含)한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작전(反擊作戰)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改革政治)를 무너뜨리고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몰아낸 뒤 복귀(復歸), 좌찬성(左贊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 남양홍인물(南陽洪人物)의 일화(逸話) 가운데 가장 유명(有名)한 것은 중국(中國)에 조선남아(朝鮮男兒)의 기개(幾個)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因緣)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국난극복(國難克服)의 공신(功臣)이 된 홍순언(洪純彦)이 있다.
「통문관지(通文관志)」에 실린 그의 일화(逸話)를 보자. 홍순언이 젊었을 때 연(燕)나라에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청루(靑樓=술집)를 찾아갔는데 한 소복(素服)한 여인이 있었는데 얼굴이 절묘(絶妙)하였다.

 여인(女人)에게 소복(素服)한 연유(緣由)를 물으니 그가 대답(對答)하기를 저의 부모가 본래(本來) 절강(浙江) 사람으로 경사(京師=서울) 벼슬하다가 일시(一時)에 구몰(俱沒=두 사람이 다 죽음)하니 집이 가난(家難)하여 장례(葬禮)를 치를 방법(方法)이 없으므로 나의 몸을 팔아 장비(葬費)에 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순언이 장비(葬費)는 얼마나 필요(必要)한가 물은 즉, 삼백 금(金)은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순언이 삼백근(三百斤)을 주니 여인(女人)이 잘 받지 아니하는 것을 강권(强勸)하여 주었고 몸은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여인(女人)의 순결(純潔)을 보장(保障)해 주었다.
몇 년 후 서기(西紀) 1584년 선조(宣祖) 17년)에 종계변무(宗系卞誣) [우리나라 임금의 종계(宗孫) 착오(錯誤)됨을 해명(解明)함]의 일로 황지천정욱(黃芝川廷彧)을 따라 통역관(通譯官)으로 중국(中國)을 향하였다.
조양문(朝陽門)밖에 닿을 무렵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홍판사(判事) 인가 묻고, 예부(禮部) 석시랑(石侍郞)이 기다린다 말한다.

 이윽고 한 부인(婦人)이 몸종 10여명(餘命)의 호위(護衛)를 받고 교사에 내려와서 홍판사(洪判事)에게 배복(拜伏)[절하여 엎드림] 한다.

 홍판사(洪判事)가 자리를 피(避)코자 하니 석시랑이 이르기를 이 절은 보은배(報恩拜=은혜(恩惠)를 갚는 절)이니 절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고, 부인(婦人)은 고의(高義)를 받아 부모(父母)를 안장(安葬)하였음은 대인(大人)의 덕(德)이라고 칭찬(稱讚)하였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석시랑의 도움을 받아 종손변무(宗系卞誣)가 잘 해결되었고, 그 후 1592년 선조(宣祖) 25년에 일본(日本)이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하는 것을 중국(中國)의 후원병(後援兵)으로 무사(無事)히 물리쳤다.
이와 같은 일도 석시랑의 적극적(積極的)인 협조(協調)로 이루어진 것이니 과연(?然) 홍순언(洪純彦)의 의기(義氣)는 국가흥망(國家興亡)이 좌우(左右)될 때 큰 공헌(公憲)을 세운 것이다. 홍희남(洪喜男)은 남양홍(南陽洪)이 낳은 조선(朝鮮) 조(朝)의 명외교(明外交)가. 임란(壬亂) 이후 대일(對日) 교섭(交涉)에서 조선(朝鮮) 측의 주역(主役)으로 일본(日本)에 여섯 차례(次例)나 사신(使臣)으로 왕래(往來), 국교회복(國敎回復)을 매듭지었으며, 명(明)에도 두 차례(次例)나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遣)됐다.
1649년 인조(仁祖)가 죽었을 때는 일본(日本)의 조문사절(弔文使節)을 부산(釜山)에서 맞아 일본(日本)사신(使臣) 왕래(往來)의 새로운 규례(規例)를 정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효종(孝宗) 10년(1659)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간 길에 서양(西洋)을 통해(通解)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火氣) 발전(發展)에 공헌(貢獻)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천민(天民), 할아버지 춘경(春卿)은 <3대 호당(湖堂)>의 명예(名譽)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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