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초상화.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고 당시 상식으로 통용되던 과학만능주의에 반기를 들어 신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해 매진했지만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동시대인으로부터 외면당한 불운한 아티스트였다.
예술사 - 윌리엄 블레이크
유한과 무한의 문틈 사이에서 질식사한 시대착오적 천재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비록 그 모습이 외부에서 찾아온 듯 보이지만 실은 내면에서, 당신의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한한 세상은 단지 그것을 비추는 그림자일 뿐.
-윌리엄 블레이크
얼마 전 작고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열혈 추종자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이나 화집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윌리엄 블레이크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이렇게 대놓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팬” 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 잡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던 이 천재를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미치광이’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욥과 그의 가족
신전 앞의 사탄.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읽어주는 성경을 주된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던 블레이크는 끊임없이 성경의 세계를 묘사했다. 그러나 원근법이라든가 과학적인 세부묘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칭 모드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상징들을 구도에 적용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했다.
가장 더러운 곳에서 태어난 가장 순수한 소망
윌리엄 블레이크는 1757년 태어나 1827년 사망했다. 인류의 운명에 극적인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그가 살아있던 시기에 한꺼번에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낭만주의가 전 유럽을 뒤덮었으며,
윌리엄 블레이크가 살던 런던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소수의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 산업화는 기계화를 이룬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대신하며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 듯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이 시기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실상은 겉보기와 달랐다. 다수의 민중의 삶은 오히려 산업화 이전보다 훨씬 더 곤궁해졌던 것이다. 농촌의 농부들은 소유주로부터 내쫓겨 도시로 찾아와 빈민층 노동자로 전락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영국의 수도 런던의 뒷골목은 거지와 병자, 창녀들로 북적거렸다.
블레이크는 이러한 런던의 한가운데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말 장수였고, 일곱 명의 아이들 중 셋째로 태어났지만 그중 두 명은 병으로 어릴 때 사망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 비범한 영적 능력을 소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창가에서 천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언덕에 올라가 하늘을 손으로 직접 만진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가 처한 우울한 현실세계에 대한 지독한 거부 반응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어쨌거나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을 초월한 지고한 존재를 만나는 이러한 환상 체험은 훗날 그의 예술세계의 모태가 되지만, 반대로 왜 그가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빈민층 자식들이 흔히 그러하듯, 윌리엄 또한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쓰기와 읽기를 배운 것이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학교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이루어졌다. 독실한 신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성경을 열성적으로 읽어줬는데, 윌리엄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묘사하곤 했다.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윌리엄의 그림은 이미 그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결국 신동 화가 의 소문은 빈민가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런던 시내를 뒤덮었고, 열네살이 되던 해 그는 당대 판화가 제임스 바자이어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바자이어의 밑에서 지내는 7년 동안 윌리엄은 건축, 조각을 위한 스케치와 판화 기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윌리엄의 도제 기간은 그의 스승에게는 실로 인내의 시간이었다. 윌리엄은 그다지 고분고분하거나 차분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분출하는 성마른 젊은이였다.
게다가 바자이어의 판화는 솔직히 말해 유행에 뒤진 고루한 스타일이었고, 제자는 자신이 느낀 감상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어 스승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럼에도 바자이어가 윌리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었다. 도제 말년에 바자이어는 런던에 있는 고딕 양식의 교회들을 습작하도록 했다. 여러 교회 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윌리엄에게 결정적인 감흥과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스승의 추천으로 1778년 윌리엄 블레이크는 로열 아카데미 미술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정통 엘리트 교육을 지향하는 왕립 미술원의 교육은 그러나 어린 시절 빈민촌의 경험이나 교회로부터 받은 영감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6년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한 뒤 윌리엄 블레이크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던 바로 그해, 1789년 ‘순수의 노래(Song of Innocence)’ 를 발간하며 예술계에 데뷔했다.
워낙 글과 그림 양쪽 모두에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의 첫 작품은 자신이 직접 지은 시집에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을 통해 영원을 보라.
-‘순수의 전조’
세상의 모든 순수와 사랑을 있는 대로 다 담을 듯이 순결하고 아름답게 시작되는 이 시는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천상에서 내려와 블레이크가 경험한 삶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고발하다가 마침내는 “거리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짜리라” 라는 비장한 예언으로 끝난다.
이후에 발표된 모든 시집은 이러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비판적이고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그저 부강한 환상만을 품고, 그보다 더 큰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영국 사교계는 블레이크의 시집에 크게 동요했다. 이런 동요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블레이크 자신의 그림이었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과학적인 원근법과 사실 묘사가 중시되던 당시 회화계의 풍토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블레이크는 그림 속에서 원근법을 아예 무시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환상세계를 거칠게 표현했다.
로열 아카데미에서 그를 가르쳤던 스승들은 거품을 물었다. 블레이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징들을 그리며 사실 묘사를 넘어선 인간의 원초적 체험을 구현하고 싶어 했다. 이런 영적 환상세계를 뒷받침하 기 위해, 그는 밀턴의 ‘실낙원’ 이라든가 ‘욥기’ 등과 같은 종교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태고에. God as an Architect, 혼자서 왼손에 컴퍼스를 들고 우주를 창조 중인 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무심한 신의 모습은 이성에 경도되어 감정과 상상력을 상실한 삭막한 세계를 암시한다.
Blake's Ancient of Days. The "Ancient of Days" is described in Chapter 7 of the Book of Daniel. This image depicts Copy D of the illustration currently held at the British Museum.[91
블레이크의 강렬한 동판화와 현실 고발의 시들은 상류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경제적 후원은 끊어져버렸다. 그의 재능을 아끼던 일부 친구들은 블레이크에게 표현의 강도를 조금만 낮추라고 조언했다. 이에 블레이크는 이렇게 화답했다.
“ 나의 편이 아닌 사람은 나의 적이다. 중간이나 중용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그는 극단적인 성격으로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 보다 낫다” 라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한참 어긋난 인간이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신사의 예절이라고 여겼던 런던 사교계에 블레이크는 처음부터 그리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블레이크를 “천사를 실제로 보았다” 라는 둥 헛소리를 하는 광인으로 몰아붙였다. 극소수의 지인들이 소개해주는 일감과 후원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수중의 마지막 동전으로 연필을 사가지고 단테의‘신곡’ 동판화 시리즈를 완성하다가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아담과 이브.
Blake's Newton (1795) demonstrates his opposition to the "single-vision" of scientific materialism: Newton fixes his eye on a compass (recalling Proverbs 8:27, an important passage for Milton)[98] to write upon a scroll that seems to project from his own head.
뉴턴. ‘신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한겹의 눈과 뉴턴의 몽매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윌리엄 블레이크가 친구 토마스 버츠에게 보낸 편지에 쓴 시. 여기서 한 겹의 눈은 세계를 오직 하나의 논리로만 보는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편협함을 의미한다. 블레이크는 동시대인이었던 뉴턴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자로, 이 그림에서도 신의 모습으로 천체 관측에 매진하는 뉴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비판적 의도와는 달리 오늘날 이 그림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의 훌륭한 상징으로 통용되어 영국 대영도서관 앞에는 이 그림을 본뜬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중용은 없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그림들은 보수적인 영국 문화 속에 거의 1세기에 가깝도록 사장되어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다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발굴한 주체는 영국인이 아니라 신대륙 미국의 히피 세대였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베트남 전쟁, 인종 차별, 페미니즘을 한꺼번에 겪으면서 이데올로기 변화와 사회혁명을 극한으로 경험한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환멸을 느꼈다. 기득권의 문화와 전통이란 명분 아래 유지되던 각종 편견과 차별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자유로운 이상을 꿈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술은 이들에게 작게는 숨을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적극적으로는 그들이 표방하는 이념적 상징이 되어주었다.
Joan_Baez_Bob_Dylan.
(상)도어스(The Doors), (하)밥 딜런(Bob Dylan).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20세기 히피세대로 대표되는 반전 아티스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밥 딜런은 그의 시를 응용하여 가사로 차용했고, 록 그룹 ‘도어스’ 의 이름 또한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다.
물론 블레이크의 세례를 받은 유명인사는 이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스티브 잡스뿐이 아니었다. 1960년대‘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던 미국의 록 그룹 도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밴드의 이름인‘도어스(The Doors)’자체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는 문이 있다. 인식의 문이 청결하다면, 모든 것이 무한하게 보일 것이다” 라는 블레이크의 시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반전 가수 밥 딜런은 ‘소중한 천사’ 라는 노래에 블레이크의 글을 인용해 “당신은 신자가 아니라면 무신론자이다. 그리고 중립 지대는 없다” 라는 가사를 쓰며 애매모호하게 중용의 미덕을 발휘하는 회색분자들을 꼬집었다.
“나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멸되는 것을 보았다” 라고 외친 미국 비트 세대의 대표 시인 앨런 긴스버그 또한 블레이크 추종자였다.
20세기 블레이크 추종자들의 공통된 점은 그들이 블레이크의 급진적인 사상은 물론 성마르고 극단적인 성격까지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그들에게는 그러나 기존 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게 박혀 있었다. 근거 없는 루머에 이리저리 갈대처럼 휘둘리는, 오늘날 세치혀와 팔랑귀의 소유자와는 분명 달랐던 그들의 박력이 한층 더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글 :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Quelque chose dans mon coeur - El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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