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공주 수촌리 II-4호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
(사진출처 : 한국향토문화)
백제 금동관의 복원품
백제 금동관의 복원품과 착용 재현
(사진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드라마 《수백향》에서 재현된 백제 금동관모
백제 금동관모 분포도
(사진출처 : 한국 고고학 강의)
1.
백제의 금동관은 대체로 한성 후기인 4세기 말~5세기 대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성기의 금동관모는 반원형 고깔 모양의 상투를 덮는 절풍형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상부에는 긴 대롱으로 반구형 장식이 달려있으며 또한 좌우 측면으로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장식을 갖추고 있는 등 특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관모에 쓰인 금동판에는 투조와 타출, 축조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용문과 봉황문 등을 새겨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제 특유의 금동관은 대체로 지배계층의 고분에서 환두대도 및 금동신발 등과 같은 화려한 위세품과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 근방보다는 충남 일대 등 남쪽 지방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을 지니고 있던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대체로 금동관모의 소유자들이 지방 출신의 유력자로써 백제의 중앙 조정으로부터 왕(王)·후(侯)·장군(將軍) 등의 작호를 수여받은 이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백제에서 왕과 장군의 칭호가 처음 보이는 것은『송서』 이역열전의 백제조의 기록으로, 이에 따르면 대명 2년(458)에 백제 개로왕이 중국 송의 조정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인에게 장군의 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 가운데 목금과 미귀 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여(餘)씨로, 즉 백제 왕족인 부여씨였다. 같은 『송서』 이역열전 백제조의 기록에서는 영명 8월(490)년에 백제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마찬가지로 영삭장군 저근 등 4인에게 작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해당 기록에서는 면중왕, 도한왕, 팔중후, 매로왕, 불사후 등의 왕·후의 작호가 보이고 있어, 보다 본격적인 왕·후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백제의 금동관모는 대체로 그 출토지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집중되고 있는데, 공주 수촌리 고분군 등 중서부지역에서 5점, 전남지역에서 1점, 옥전 M23호분 등 가야지역에서도 2점이 출토되었다. 흥미롭게도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도 출토된 일이 있었다. 때문에 대체로 금동관 자체를 지방의 유력자들만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비교적 최근에는 경기 화성 일대에서도 금동관모가 발굴되었던 일이 있었기에 보다 자세한 발굴과 고고학적 연구가 요망된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 (왕)
기록에 보이는 백제의 국왕이 착용하는 오라관에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 (왕비)
(사진출처 :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고분 출토 은제관식
기록에서 백제 솔계 관등이 착용했다는 은제관식으로 보인다.
부여 능안골 36호분 출토 은제 테두리
부여 능산리 절터 기와 조각에 새겨진 사람의 형상.
절풍에 깃을 꽂은 조우관을 형상화한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재현된 백제왕의 오라관.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재현된 백제 고위 관료의 복식.
2.
앞서 소개한 백제의 금동관은 대체로 5세기를 전후한 것으로, 이후로는 잘 보이지 않는 편이다. 백제는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본래의 도읍이였던 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상실하였고, 이후 웅진(공주)을 거쳐 사비(부여)로 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제는 중국 남조와 깊은 교류를 맺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는데에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중국 남조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도 중국 남조 특유의 벽돌무덤 형식으로 축조된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백제의 복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사》에서는 백제의 의복에 대하여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으나, 제사와 같은 행사를 지낼 때에 관에 깃을 꽂았다고 하였고, 또한 6관등인 나솔(奈率) 이상의 관등은 관에 은화(銀花)를 꽂아 꾸몄다고 하였는데, 이후의 기록인 《수서》에 보이는 점과 거의 동일하다. 특히 《구당서》 등에는 백제의 왕이 오라관(烏羅冠), 즉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에 금화(金花)를 달아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기록은 최소 웅진 말~사비 시기 즈음의 백제 복식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웅진 시기로 접어들어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대폭 늘어나면서도 의복에도 영향을 끼쳐 고유의 금동관모는 점차 쇠퇴하고 보다 간소화된 새로운 복식문화가 생겨났던 것 같다. 다만 부여 능산리 절터 기와에 그려진 사람의 형상을 보건데, 백제 관모의 절풍 형태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던 것 같다.
백제의 관모에 큰 변화가 생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라관에 달았다는 금꽃으로 추정되는 꽃무늬 형상의 금제관식이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최소한 웅진 도읍기의 말기인 6세기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동성왕~무령왕 대에 특히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당시 시대상을 보건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금화관식이 출토된 예는 무령왕릉이 유일하기 때문에 추가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다음과 같은 추론으로부터 어떤 진전이 있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금화관식을 관의 좌우에 달았을지, 앞뒤에 달았을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 모양이 좌우반전으로 되어있기에 아무래도 관의 좌우에 달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백제왕의 오라관에 사용되었다는 금화관식 외에도 6번째 관등인 내솔 이상의 솔계관등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은제관식도 대체로 웅진 말~사비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부여 능산리 고분과 논산 육곡리 고분 등 충청 지역의 것이 특히 대표적이다. 백제 은제관식의 출토양상을 크게 살펴보면 부여를 비롯한 백제의 중심지 외에도 남원, 나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던 바 있는데, 부여의 능안골과 왕흥사지에서는 제비 날개 모양의 철테가 함께 출토되어 아마 철테와 은제관식을 결합하여 관에 부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발견된 은제관식의 존재는 주목할만 하다고 생각되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후술하도록 한다.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
3.
마지막으로 소개할 백제의 금동관은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3개의 초화형(草花形) 장식을 세운 테와 절풍형 장식을 갖춘 대관(帶冠)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형태는 지금껏 살펴본 절풍형태의 백제 관모와 비교해 볼 때 그 형태가 대단히 이질적이며, 오히려 가야와 신라 일대에서 출토된 금관과 흡사한 일면이 있다. 더욱이 백제의 중앙에서도 이와 같은 유물은 발견된 사례가 없기에 백제 문화권에 속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나주 일대의 토착 세력의 지배자가 쓰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전에 고구려의 백라관에 대하여 다루었던 글(#)에서도 언급한 일이지만, 일찍이 몇몇 연구자들이 고구려의 관모는 일정 기간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고깔모양의 절풍 모양을 띄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기실 백제의 경우에도 여러 기록에서 보이듯이 고구려와는 그 복식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하였던 점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절풍형 관모는 그 문화의 공통 요소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한반도 남반부에서 보이는 대관 형식의 금동관은 분명 백제의 금동관과는 별개의 존재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역의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된 일은 『일본서기』 신공기의 기록을 보건데 대체로 4세기 즈음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이 가야 7국 등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면서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깨뜨린 일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영산강 유역에 있던 토착세력으로 여겨진다. 이들 침미다례는『진서』의 장화열전에서 3세기 경에 진(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신미제국(新彌諸國)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양직공도』에서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들을 자신들의 부용국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그 기록에 언급된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己文), 하침라(下枕羅) 등은 모두 영산강 유역의 세력으로 비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산강 유역에는 오랜 세월 동안 옹관묘 문화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어떤 세력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즉 영산강 유역의 토착 세력으로써, 백제 중앙의 영향권 하에 속하면서도 해당 지역에 대한 고유의 지배권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남 일대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발달된 해로를 통한 국제무역으로 축적한 부(富)가 이를 뒷받침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는 고유의 묘제를 유지하면서도 백제와 왜, 가야 등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는데, 그만큼 해당 지역의 대외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5~6세기를 전후하여 영산강 유역에 일시적으로 분포했던 일본풍의 전방후원분 또한 활발한 대외교류의 산물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형식이 규슈 지역의 것과 특히 흡사한 일면이 있던 것으로 보아 문안식 교수의 견해처럼 긴키 지역의 야마토 지방과는 다소 유리된 열도의 규슈 세력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여 영산강 유역으로 이주해온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산강 유역이 본격적으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일은 6세기 중엽으로 보이는데, 그 즈음에 축조된 나주 복암리 3호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는 백제의 관인들이 사용했다는 은제관식이 출토되었으며, 그 형태도 영산강 유역 고유의 묘제와는 달리 부여 능산리 일대에 보이는 이른바 "능산리형 석실"의 형태를 띄고 있다. 6세기 경의 백제는 웅진과 사비로 천도해오면서 동성왕·무령왕 대로부터 국가기반의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돋보인다. 특히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던 독자 세력권도 점차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장해오는 백제에 의해 흡수되어 마침내는 집적적인 지배 지역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4.
결론적으로 볼 때, 백제의 관모는 시기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금동관모는 대체로 한성 도읍기인 4세기 말~5세기 경의 것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당시 백제는 세력확장과 중앙집권화 및 지방통치제도의 개편 등 내부적으로 상당한 변혁을 겪고 있었는데, 지방의 유력자들이 주로 금동관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당시 백제 조정이 지방세력을 중앙관료로 끌어들이며 내부적 통합과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를 꾀했던 흔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을듯 하다. 특히 노중국 교수 등 여러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한성 말~웅진 초에 보이는 백제의 왕·후·장군호의 제도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던 와중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본래 도읍지였던 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잃고 남하하여,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대체로 중국 남조와 교류를 강화하며 통치제도와 문화 등에 큰 변화가 있었다. 특히 백제의 국왕은 금화관식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착용하고, 관료는 은제관식으로 장식한 관모를 착용하는 등 서열의 구분이 엄격해졌으며, 중국의 영향으로 과거의 금동관모에 비해 관모 자체가 다소 간소화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형태는 기존의 고깔모양의 절풍 형태를 유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공주 무령왕릉의 금제관식, 부여 능산리 일대에서 출토된 은제관식 등이 주목할만하다.
한편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된 대관 형태의 금동관은 기존의 백제의 절풍 형태의 금동관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오랜 세월 백제의 영향권하에 있으면서도 경제력을 기반으로 문화권과 세력을 유지하였던 토착 지배자의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에 나주 복암리 3호분의 경우처럼 백제의 석실분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한 고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해당 지역은 점차 백제가 집적 지배하게 된것으로 파악해볼만 하다. 특히 해당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 관인의 관모를 장식하던 은제관모를 통해 볼 때, 백제는 6세기를 전후하여 해당 지역에 관료를 파견하거나 혹은 지역의 유력자에게 직접적으로 관등을 수여하고 지방관으로 삼아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였던 것 같다.
참고문헌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인과 복식』, 국립부여박물관, 2005
노중국, 「백제 왕·후호제와 금동관 부장자의 실체」,『한국고대사연구』 70, 2013
문동석, 『백제 지배세력 연구』, 혜안, 2007
문안식, 『한국고대의 지방사회』, 혜안, 2004
박선희, 「백제 금관의 유형 추론과 관모장식」, 『비교민속학』 35, 2008
정완진, 「고구려 백라관의 형태 비정」, 『동양학』 51, 2012
한국고고학회, 『한국 고고학 강의(개정판)』, 사회평론아카데미, 2010
첫댓글 삼국시대 당시 한중일 세나라 중 백제의 관모와 복식이 가장 균형과 조화미, 패션감각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문화가 결코 중국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금동관을 통해서도 확인되네요. 금동관이 출토되는 곳은 백제의 영토인 만큼 일본규슈지방도 백제 영역임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조속히 한국사교과서에 중국선진문물 운운하는 표현은 삭제학 규슈지방을 백제 영역으로 그려넣어야 할듯 싶어요.
백제의 금동관모에 세련미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이 가지만, 백제의 금동관이 출토된다고 그 곳이 곧바로 백제의 영토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좋으나 싫으나, 웅진~사비 시기에 이르면서 백제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상당수 받은 것은 부인하기 힘든 일입니다.
한편 일본 열도 내에서 한반도 계통의 횡혈식 석실분이 다수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의 흔적도 어느정도 발견되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영산강 유역이나 사비 지역에서도 왜계 묘제가 다수 나오고 있고, 한반도 남부에서도 왜계 갑주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박천수 쌤의 "새로쓰는 고대 한일교섭사"를 추천드립니다.
@원한의 거리 금동관을 백제왕이 지방 제후에게 하사한 것이라면 출토지역이 당연히 백제 영역이 되는거죠. 그리고 영산강일대에 발굴되는 묘제(전방후원분?)와 갑주가 어떤 기준으로 왜계 것이라 단정 하는지요. 마한계 혹은 백제계 것이 일본으로 전래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과 왜국사신을 비교해 보아도 문화수준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바 영산강 일대 묘제와 갑주가 왜계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할 것입니다.
@원한의 거리 웅진~사비성 시기에 남조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간에 문화교류의 단순한 잔영에 불과하지 백제를 압도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할터입니다. 백제문화의 일본전래는 과소평가하면서 남조문화의 백제 전래는 과대평가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大欽茂 마한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했으면 영산강의 전방후원분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이 되어야죠. 그리고 왜계 갑주로 분류되는 것 역시 출토량으로보나 변천 과정으로 보나 일본 열도를 중심으로 출토/발전하고 있으니 왜계 유물로 파악하는거죠.
@大欽茂 고고학 자료 중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묘제 형식에서 백제가 남조의 그것으로 교체되는 반면에 일본의 묘제는 백제식으로 교체되지 않으니 남조의 백제 영향력이 백제의 일본 영향력보다 크다 혹은 모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다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릅니다만.
@大欽茂 1.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시기가 5~6세기에 한정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볼 때 그 형성과정이 열도에서 상세히 관찰되는 반면, 한국에서는 그런 면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왜계 갑주도 그 출토량이나 형성과정이 열도 내에서 더 뚜렷이 보입니다.
2.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백제의 무령왕릉 등이 남조의 벽돌무덤 풍으로 건축되었는데, 그러면 백제는 남조의 지배를 받았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열도에서 백제의 금동관모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 곳이 백제의 영역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대흠무 님이 말씀하신대로 그것도 일종의 문화교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요.
@원한의 거리 영산강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을 축조했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게 됨으로 그곳에서 더욱 발전했다고 보여지고요. 왜계 갑주도 초기에 사용하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감으로 더욱 발전과정을 밟으며 대량 생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죠. 금동관모는 백제의 제후 수장들이 하사 받은 것이라는 연구가 있는만큼 규슈가 한때 백제의 영역일 가능성이 농후하죠. 일본서기에도 열도에 담모라(=담로)가 있다는 기록도 있으니 더욱 그렇죠. 남조의 영향으로 축조된 벽돌무덤은 무령왕릉 하나 밖에 없고 계속 굴식돌방무덤이 축조되고 있거늘 무슨 묘제 교체라 주장하는지요.
@버섯모듬 묘제는 한번 구축되면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산강일대 왜가 도래한 이후 열도의 토양과 기후에 적응 과정에서 왜국 나름대로 묘제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백제가 남조와 교류한 것은 모방이니 강한 영향력을 운운하고 왜국이 백제를 모방하고 강한 영향력을 받은 것은 과소평가하니 이런 소아병적인 해석이 어디에 있는지요.
@大欽茂 대흠무님 논리대로 열도가 백제 영향을 받은 것을 토대로 열도가 백제의 영토라고 하면 남조 영향을 받은 백제는 남조 영토가 되어야죠. 똑같이 영향을 받았는데 열도는 백제 영토고 백제는 독립국입니까. 그런 이중 잣대는 소아는 커녕 유아도 안 할 겁니다.
@大欽茂 야요이 도래인은 이미 기원전 4~5세기에 한반도에서 열도로 들어갔는데 기원후 5 세기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왜계고분을 가지고 도래인 이야기를 꺼냅니까. 열도로 들어갈 때 타임머신이라도 탔나보죠?
@大欽茂 영산강 일대의 전방후원분은 그 시기가 5~6세기에 그치는 반면, 열도 내의 전방후원분은 4세기를 전후한 고분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하거니와, 그 형성과정도 열도 내에서 확인될 뿐, 한반도 내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방후원분은 어디까지나 왜계 고분일뿐입니다. 왜계 갑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제의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와의 교류의 영향일뿐입니다. 이를 확대해석할 생각은 없거니와, 대흠무 님이야말로 후다야마 쪽에서 나온 백제 금동관모 하나로 그런 주장을 하시는 것은 이중잣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송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2개 정도의 벽돌무덤으로 근거로 백제는 남조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궤변도 가능해집니다.
@大欽茂 그리고 일본서기에 무슨 담모라가 열도에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담모라(聃牟羅)를 말씀하시는 듯 한데, 담모라는 탐라 즉 오늘날의 제주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원한의 거리 역사는 흐름을 중시해야지.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를 해석하는건 지양 해야 한다고 봅니다..전방후원분의 전신은 주구묘이고.주구묘는 한반도에서
열도 왜로 갔다는게 일반 정설인걸로 압니다..가야 와 영산강 지역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열도로 이주 하였고 여러 영향을 끼쳤다는건 부인 할 수 없을겁니다.
즉, 주구묘의 풍속을 가진 영산강 집단이 열도에서 주구묘를 전방후원분으로 발전 계승시키다가...5~6세기 ..열도에서 크게 성장한 영산강 가문이..백제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큰 군사집단을 파병하였고..그 흔적이 나주 뿐만 아니라 ..영산강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전방후원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리운길 동성왕 이후의 무녕왕, 성왕의 기록을 보더라도.. 동성왕 과 군사 500인.
그리고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 이러한 역사 사건으론 영산강을 비롯해 흩어져 있는 전방후원분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데요...
남조 와 백제..그리고 왜 의 문화 얘기는 말장난으로 하시는 거겠죠...문화를 어떤 씩으로 받아들이고..어떠한 영향을 끼쳤느냐에 따라서 해석을 하는거라는 걸 무시한채.
그런 말을 하시는것 보니...말장난으로 밖엔...
@그리운길 저도 그정도 가능성까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주구묘가 왜계 전방후원분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조유전 선생이나 강인구 선생 등을 비롯한 여러 고고학자들도 주장한 바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반도 주구묘와 전방후원분의 상관관계도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전방후원분이 설마 한반도 주구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일본 열도에서 생겨났으며 또한 발전했습니다. 전방후원분 자체는 결국 왜계 고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해도 중국의 불교문화와 한국의 불교문화가 엄연히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