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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설득력 있는 강연이었죠? 주제 또한 여러분들과 밀접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고민이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 다를 것 같지만 막상 그 고민들을 모아보면 비슷한 경우도 많습니다. 지원 교우님의 사례를 통해서 이러한 고민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거나 해결책으로 스스로를 안내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모태 신앙이라고 했는데 인생은 자력과 타력이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부모님 또는 동생이 원불교를 다니는데 본인은 오랜 기간 동안 다니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타력은 강했는데 전생의 인연, 서원은 강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오히려 더 크게 발현될 수도 있고 후에 손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현재 잘 다니고 있기에 안 다닌 것보다는 괜찮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좀 더 일찍(제대로) 다녔다면 훨씬 더 크게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출가를 똑같이 해도 누구는 일찍 하고 누구는 늦게 하고 또 누구는 도망가고 누구는 도망갔다 다시 돌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타력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오롯하고 간절했느냐, 진리에 근거를 대고 시인이 확실했느냐, 원력이 정말로 3차원의 세계를 뛰어넘는 원력 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감정적 이었는가, 또 전생에 어떤 인연이 어디까지 원력을 잡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구는 인연을 빨리 만나기도 하고 늦게 만나기도 하고 만났다 헤어지기도 하고 혹은 늦게 만났음에도 오롯이 유지하기도 합니다.
안암교당에 오셨는데 후회 안하십니까? 동생이 왜 하필 안암교당에 오냐고 했었는데 사실 문제가 있는 교당입니다. 안암교당이 외부에 소문나기로는 안암교당은 아무나 못 다닌다더라, 교무가 빡세게 (일을) 시킨다더라,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아서 기가 죽는다더라 하는 등의 소문이 나 있어서 이것이 피해를 주기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공이 더 많이 들어야 하는데 피해 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분들은 알아서 피해 가서 고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여기에 오는 분들은 강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소문에 아랑곳 않고 여기서 버티고 있는 여러분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어디나 사람 사는 데고 여기도 결국 일원상을 모시고 사은사요 삼학팔조를 공부해서 우리가 불보살이 되자는 취지를 가진 곳입니다. 불보살은 삼계의 대도사가 되고 사생의 자부가 되고 삼대의 대권을 잡아 우리가 원하는 복과 지혜가 족족한 분들이다. (여기서) 그런 분들의 타력을 입기도 하고 나도 진리를 깨우쳐서 그런 부처님이 되어 보겠다는 것을 확실히 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걸 왜 입겠습니까? 입으라고 하니까 입는 겁니다. 입으라고 하는 이유는, 첫째로 안 입는 것보다 낫다. 둘째는 네 재주로 네 말(만) 하지 마라라는 겁니다. 대종사님의 법에 진리에 합당한 말을 해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원래 법강항마위 이상만 주는 의복입니다. 그러나 교무가 되면 (제대로 교육받았다는 자격을 보아) 바로 줍니다. 이걸 껍데기로만 보면 귀찮은 존재고 하나의 형식이고, 부담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실을 보면 그건 네 말을 말고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네 것으로 소화하여 이치에 맞게 행동해라 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오신 이유는 다양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기도 하겠지만 결국 그 고민들을 한데 모아 보면 각각이 비슷합니다. 결국은 행복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누구나 원하고 간절해 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깨우침입니다. 그러나 깨우침에도 (이전)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 없이는 깨우칠 수 없습니다. 수행하는 데에도 스승이 있어야 하고 스승은 원력이 있는 사람이 찾습니다. 원력이 없이는 스승을 찾을 수 없고 그 스승을 믿지 않고서는 수행을 할 수 없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깨우치면 그 사람이 부처님과 같은 위력을 얻어서 가장 복과 혜가 족족한 부처님 같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깨우친 사람은 이 세상을 위하여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과를 알고 사은을 느끼고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불공을 하지 않겠습니까? 깨친 자가 어떻게 스스로 구속과 집착 속에서 또 어둠 속에서 헤매겠습니까? 깨우친 자는 자유의 넉넉하고 한가한 진리 속에서 기쁨을 생산하고 만끽하면서 안내해 줄 수 있는 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토요일에 교당에 오신 것도 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잠을 넉넉히 못 잡니다. 모두가 피곤하며 스트레스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종로에서 처음으로 간사를 하던 시절에 6개월 만에 삼청공원에 교구장님이랑 갔습니다. 그분께서 삼청공원을 한 바퀴 도시더니 요가를 하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요가를 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계속 종로 한복판에 있는 건물들의 소음에 시달렸습니다. 옆의 세무서에서 시끄럽게 하고 노래방에서, 상점에서도 시끄럽게 하는 환경 속에서요. 그런데 산 속에 오래간만에 가니까 굉장히 좋았습니다. 자연 환경만 잠시 만나도 그렇게 행복합니다.
여러분들은 대종사님이라는 새 시대의 후천개벽의 성자를 만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실 겁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한 번은 식사하시다가 제게 “대종사님은 새 시대의 부처님이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이 안 오면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첫째는 무조건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반응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듣고 보자 하는 방식입니다. 이 둘은 다릅니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여러분들의 대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무조건 튕겨내면 여러분들의 손해입니다. 여러분이 각종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때 지도자를 튕겨낸다면 그건 여러분의 손해입니다. 우리는 지자본위할 때 지자를 스승 삼습니다. 여기서 지자는 완벽한 지자 즉, 정신 육신 물질 모두 완벽한 지자가 아닙니다. 인물도 좋고 말씀과 목소리도 마음에 들고 모든 것이 내 맘에 쏙 드는 완벽한 대종사님 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대종사님은 “구하는 데 따라 지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어 학원에 가면 영어 잘하는 사람이 스승입니다.그 사람의 외모, 나를 대하는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보다 영어를 잘하면 (거기서는) 스승입니다. 나를 예뻐해 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스승 삼는 도리입니다.
전생 서원 인연으로 해서 오신 분도 있고 본인이 살면서 이게 필요하다 생각해서 오는 경우도 있는데 지원교우님은 후자입니다. 본인이 절박해서 오셨습니다. 여주교우도 출가하는 이유가 같습니다. 여주 교우님은 기계학과를 나오셨습니다. 오토바이를 만드셨는데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좋으셨으면 오토바이를 만들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대학 나오고 포스코 건설이라는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단순히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고 아등바등 살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맞닥뜨렸을 때 취하는 방식이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으로, 누군가는 술로, 취미 활동으로 어떤 사람은 자는 걸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고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찾고 어떤 사람은 도인을 찾습니다. 이것도 전생의 지혜와 서원, 자신의 원력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지혜보다도 인연입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내가 만약에 우리 아버지께서 제 7안식일 간부셨다면 저는 아마 거기서 열심히 했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순복음교회 다니셨으면 나는 그 곳의 목사가 되었을 겁니다.
인연을 따라 가서 나중에 그것이 내 인연이자 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또 각자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 몸을 받아서 온전한 몸을 받아서 부처님의 정법을 제대로 만난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을 받고 그 중에서 또 대종사님 교법을 만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명예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경쟁심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말로는’ 처자식을 위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마음에 깊이 들어가 보면 명예심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인데’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사내 정치를 합니다. 그래서 퇴근도 안 하고 죽어라고 일하고 때로는 로비, 아부와 같은 부정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왜냐? 그것은 무언가 내 삶의 만족거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이든 여행이든 무엇이든 찾아야 하고 그것은 또한 자신 스스로의 안에서 만족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몸은 누구나 먼저 편한 걸 원합니다. 맛있는 것을, 부드러운 것을, 푹 자는 것을 원해요. 색성향미촉법이 입에서는 맛있고 귀로는 좋은 소리, 몸으로는 감촉이 좋은 것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서울대 교수도 사표 냈잖아요. 표층 의식에 매몰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사실은 표층 의식 안의 내면의 의식에 여러분들의 선근 종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선근종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교당에 온 것입니다. 표층 의식이 강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이런 황금 토요일에 법회 보러 온 여러분들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불쌍한 것입니다.
제가 출가하니까 친구 한 명이 “아까운 놈 하나 버렸다”라더군요. 그러면서 “너는 무슨 재미로 사냐”고 그럽니다. 그 말에 대해 제가 “내가 느끼는 재미를 설명해 주려면 시간이 없어서 다 못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재미없이 살겠습니까. 저도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재미를 아직 그 친구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제가 느끼는 것이 다른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어떤 것이 정말 행복하고 기쁜 것인지를 살짝 감을 잡고 있는 것고 때로는 그걸 느끼고 거기로 향해서 가는 겁니다. 그것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유아,’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표층의식에서 느끼는 재미가 아닙니다.
내 안의 참으로 맑고 밝고 훈훈한 자신(참 나)이 있습니다. 그 존귀한 그 자리를 깨치고 그 자리를 내 것 감아서 살려고 하는 그 원력과 맛, 느낌, 향기. 그것들을 여러분들은 갈구하고 원하는 겁니다. 중생에게 인생의 애너지란 ‘갈애’ 즉 욕심입니다. 욕심으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갈애가 다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여기 오신 분도 있고 적당히 양다리 걸쳐볼까 해서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여러분들은 그것만이 아니라 내 안의 마음자리 안에 깊숙이 맑고 밝고 훈훈한 참 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나를 알고 깨쳐서, 수많은 경계 속에서 지켜내며 그 나로서 살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와 계시는 겁니다. 알든 모르든. 말로 표현은 못해도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실 겁니다.
누군가는 인생에 있어서 “뭘 고민하느냐? 시집만 잘 가면 되지. 여행이나 가라.” 일반 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술을 마시거나 직장에서 직책이 올라가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나요? 그걸 끝없는 갈증이라고 합니다. 바닷물을 먹는 것 같습니다. 증류되지 않은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당장 해소되는 듯해도 갈증이 끝이 없이 지속됩니다. 표층의식이 추구하고 있는 현상 세계에서는 갈증과 욕구를 계속 요구합니다. 그러나 끝없는 갈증이 아니라 끝없는 행복, 끝없는 기쁨, 끝없는 여유, 끝없는 밝음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각 다들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의식하며 사는가 봅니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남에게 보여지는 내가 중요한지 아니면 남들의 시비가 있든 없든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손 한번 들어보세요. 오늘 할 것이 많은데 이 내용만 다루어야겠습니다. 6~7세까지는 어릴 때 사랑받는 것이 중요해요. 아까 언급한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도 결국은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그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결국 다른 방법으로 결핍된 사랑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충분한 타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커서는 내 맘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형제가 적은 사람일수록 상당히 자기 위주로 행동합니다. 스스로는 주체라고 주장하고 개성이라고 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저 왕따 같은, 너무나 개성파여서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까 전에 손을 들어보라고 했을 때 양쪽 모두에 손을 많이 들었지만 전자에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 법문으로 싸움을 붙여볼까요? 원래 법문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대중의 심판이다”라는 법문이 있다고 칩시다. 대종사님의 당대에도 간척 공사를 할 때 옆의 부잣집 사람이 그걸 빼앗으려고 작전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대종사님의 제자들이 저놈 못되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교무님들이 인도 네팔의 포카라에 학교 지었는데 빼앗겨 버렸습니다. 밥 다 해놨더니 밥만 싹 빼앗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대종사님께서 “남의 조소에 너무 모질게 굴지 말아라. 그 사람이 가져갔다고 해도 이 땅에서 굶는 사람들에게 곡식이 돌아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참 배포가 크시죠. 그리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필귀정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바를 정을 정할 정(定)자로 바꾸자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비를 겪은 끝에 성공한 사람이 있고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옳은 걸 주장하다 망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옳은 거 주장하다가 귀향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지금 정권에서 정의를 외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거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돈을 관리해줄 사람은 친인척 밖에 없습니다. 대중은 정치인을 우리의 권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달라는 목적에서 정치인을 뽑지 정치인의 친인척을 뽑지 않습니다. 그런데 뽑아놓은 그 정치인의 돈을 관리해준 사람은 친인척뿐입니다. 그러한 구조가 있습니다.
인과의 이치로 보면 당연히 사필귀정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의 대중의 심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옳은 것이 혹시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소수만 옳다 생각하지 않은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쏟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삽니다. 이에 대해 다 각각 가치가 있고 작은 산속의 풀잎도 가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대해 개별적인 사물 자체의 소중함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분명히 또 그 가치는 다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건 내가 목숨을 잃어도 괜찮다는 불굴의 의지를 먼저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차돈의 이야기(순교)를 아십니까? 이차돈은 불교 중흥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중생의 죄를 대신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우리 동학의 1,2대 교도들도 목숨을 버렸습니다. 우리 9인 선진님들도 목숨을 걸고 혈인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로 인과의 이치에 맞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고 내가 죽든 안 죽든 밀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죽으려면 무엇을 믿어야겠습니까? 먼저 내가 이 죽음이 가치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연마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도 함부로 감정만 따라 죽은 걸 객분이라고 해요. 이 분(忿)자는 용기입니다. 용기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바른 용기가 있고 객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계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고 손해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죽을 수 있습니다. 인과에 대한 신념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이차돈처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죽음은 객분입니다. 이차돈은 용기가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객기를 부린 것입니까? 다 원래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용기를 갖추고 정의를 위해 정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법조계에서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정의로운 것은 정의로운 것만이 정의가 아니라 남들로부터도 그렇게 보여야 진정한 정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산 속에 혼자 사는 사람도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자신도 결국 다른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혜택을 가져다 이용하며 삽니다. 이 세상에 혼자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아무리 산 속에서 집짓고 혼자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사회와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의 인지가 너무 어두운 사회가 아닌 이상, 게다가 요즘처럼 대중의 인지조차도 밝은 시대에는 대중의 심판이 정말 무섭습니다.
대종사님 법으로 10년 하면 자기가 안다 했고 20년 하면 대중이 알고 30년 하면 진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불장군 식으로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천 시대의 일입니다. 그러나 후천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천 시대에는 옳으면 인정받게 되어있습니다. 단지 금방 인정받지 못할 뿐입니다. 작전을 쓴 건 지금도 인정받습니다만 갈수록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전 쓴다고 쉽게 승진시켜주는 회사는 곧 망할 겁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내 안에 내 스스로 맑고 청정했을 때 밖으로도 결국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밖을 바라보는 시야가 중요합니다. 밖을 사은님으로 바라보고 함께 동거동락하고 상부상조하는 대상으로서 바라보느냐 아니면 경쟁자이자 이용물이고 타인에게 속지 않겠다는 아만심으로 가득 찬 대타적 시각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거꾸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앞으로 사회는 상대를 부처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부처로 대우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회사에서 제일 미운 인간형은 일등 하려는 인간상입니다. 1등하면 칭찬받는 학교와는 달리 회사는 팀으로서 함께하는 겁니다.
전팔근 선생님께서는 서울대 영문학과 출신이십니다. 교당에서 가르치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그 분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등 하지 마라, 같이 80점 맞으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80점 받아라 한 것에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마냥 다 똑같은 80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혼자 100점 받을 생각하지 마라. 같이 80점 받는 것이 100점 받은 것보다 낫다는 겁니다. 이 의미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은 새 시대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100점 받을 실력이 있음에도 80점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80점 맞을 만큼만 노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최종 목표는 여러분들 자신들을 극대화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말 극대화하려면 타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타력과 함께한 극대화를 해야 하는 겁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려면 이 사실을 눈치 채셔야 합니다. 또한 현실 세계는 다양합니다. 젊으실 때는 다양한 경험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단풍 구경 안 가본 사람, 어릴 적에 운동 안한 사람 모두 참 잘못 성장한 사람들 입니다. 어릴 적에 많은 친구들과 놀지 못한 사람, 근래 2~3년 내에 단풍구경 한 번 못 갔다고 하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느 한 분야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느 한 분야를 이루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사직한 서울대 교수도 한 분야를 이룬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단풍 구경을 예로 들자면 그 경험은 삶의 여유이고 자연의 이치에 함께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의식 세계를 안으로 바꿔보는 겁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그 시간을 못 만듭니다. 그게 더 큰 손실일 수도 있습니다. 일등 하지 말고 단풍구경가고 놀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약간 뒤쳐질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가면 갈수록 탄력이 붙고 진급할 것입니다.
아까 문은식 교무님이 진급에 대해서 설명을 참 잘해주셨습니다. 내가 한계 상황에 다다랐을 때, 포기하고 싶을 때 그 순간을 축복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공부로 잘 극복하면 그 다음 단계로 진급한 거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후배인데 속으로 박수쳐 주고 글도 써주고 왔습니다.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한계 상황에 다다르면 원망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게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회예요. 누구에게나 처음 만나는 경계는 힘이 듭니다.
내가 교당에서 지내면서 우리나라에서 소위 1,2% 안에 드는 학생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충고를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내가 충격을 많이 주고 그 견고한 자존심을 깨뜨려버립니다. 자신이 1% 안에 들면 그 스스로가 완벽한 사람인 것인가요? 자존심이 쓸데없이 강해서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알고 특별대우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 학생들은 제가 한방에 부숴버립니다. 그런 충고를 받았을 때, 반응은 딱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교무님처럼 충고해주신 분이 처음이라고 고마워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충고는 일단 모두에게 다 씁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맞다, 사회에서 더 크게 당할 것을 지금 교무님을 통해서 메꿀 기회구나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교무님은 왜 사람에게 상처를 주십니까, 아무도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내지는 교무님은 종교인이 되어서 부드럽지 왜 않으세요, 하고 저를 비난하고 저항하고 공격하고 외면하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 대응하는 방식들도 참 다양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누가 충고를 해줍니까. 요즘에 진정한 선생이 없다는 게 그 뜻입니다. 그 말 뜻은 진짜 학생을 위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진짜 학생을 좋아하면 그 학생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일단 그 학생을 위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혹여나 상대방이 삐지거나 서운해 할 까봐 충고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님한테 항상 칭찬만 듣고 자랐습니까? 왜 사회에 나가서도 집에서도 못 들은 칭찬을 들으려고 합니까? 보통 관계에서는 쉽게 충고를 해주지 못합니다.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친구라면 가능해야 합니다.
진실한 스승은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둘이 있고 안으로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원불교에 오셔서 뜻을 이루시려면 진짜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영어선생, 수학선생처럼 각자가 구하는 분야의 스승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생의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첫째는 심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삼대 제불제성 그리고 나를 직접 지도해주시는 스승입니다. 이는 수직적인 관계(구조)입니다. 두 번째는 수평구조로서 동지입니다. 정말로 나를 위해줄 수 있는 동지. 나의 치부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스승과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겁니다. 돈을 얼마냐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갔느냐 하는 게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내 마음에 진실한 스승이 있느냐, 그리고 내 옆에 정말로 진실한 동지가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또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양심의 스승입니다. 그걸 심계라고 합니다. 바깥에서 충고를 다 해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심계가 더 먼저 지각합니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고 모른체 해버리고 싶을 때가 많은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혼자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때 밖에서의 타력과 안으로의 자력이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공자님께서는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고 했어요. 세 사람이 가다 보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안의 동지들 간에도 대종사님의 뜻과 부합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해 나가셔야 합니다. 내가 잘하는 것도 좋지만 타력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와 대도를 깨쳐야 하고 깨우치려면 스승이 있어야 하고 그 스승이 내놓은 법을 여러분들이 수행해야 합니다. 그 법이 바로 우리의 정기 상시 훈련이고 사은사요 삼학팔조입니다. 그리고 회상입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먼저 사종의무를 지키는 것입니다. 조석심고, 법회출석의 의무 보은헌공, 입교연원 이 네 가지입니다. 이것이 있어야합니다. 그 다음이 단 조직입니다. 회상에 대한 신이 있는 사람은 단에 대해 우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불교의 활동은 바로 사은 보은 활동이요, 원불교의 조직은 바로 단 조직입니다. 그 회상에 대한 신이 있는 사람은 단 조직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 조직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지원 교우도 제 설법에 대한 이야기보다 단회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제 법회 설교보다 단회가 더 재미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그렇습니다. 시대가 한 스승뿐만 아니라 횡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제자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종횡이 모두 중요합니다. 동지는 스승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주변 동지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서로로부터 도움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동지 선후배 속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 제 후배인 85, 86학번 사람들이,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나온 사람들이 한 사람은 네이버를 만들고 또 한 사람은 거기서 나와 카카오톡을 만들고 또 한사람은 엔씨소프트를 만들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넥센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들 다섯 명이 갖고 있는 주식의 가치가 1조 6천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네이버도 1조 2천억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씨 프로그램이라는 유한회사도 만들었습니다. 회사를 차린지 채 20년도 안 될 사람들이고 다들 40대 후반의 아주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유한회사를 만들어서 앞으로 모험과 탐험과 인재 아니면 기업인 과학자를 위해 투자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시행착오 없이 성공한 기업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비록 나보다 어리지만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 분야의 스승이예요. 이를 통해 시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경제라고 하면 자본, 노동, 토지였지만 지금은 그 관념이 다 무너졌습니다. 자본 노동 없이도 창의적 아이디어만 잘 내면 앞으로 1조를 버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심법이 고맙다 하는 겁니다. 혼자 잘났다고 혼자서 잘 먹고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대단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우리나라가 도덕의 부모국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끌어가는 거고 통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박수쳐 줘야 힙니다. 그게 수희공덕이예요. 그 사람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q.(박원허 교우님) 예전 조직이 작았는데 커진지 2년이 되었어요. 팀장님과 면담을 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조직의 문제가 있냐고 이야기하셨는데 작은 조직에 있던 사람들이 구태를 못 벗어나고 예전 방식으로 해서 예전 조직의 몇몇 사람들과는 피드백과 커뮤니케이션이 안됩니다 했는데 제가 주의를 받았거든요. 주의가 감정이 상했다가 아니라 본인에게 데미지가 오니까 네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감정적으로 대하시더라고요. 저는 팀장님한테만 해야 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한거였어요. 예전의 그분들과는 같이 못 가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신 문제가 고민됩니다.
A.(교무님) 이 문제는 자신은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상사가 감정이 상했다는 문제입니다. 색수상행식이라고 썼습니다. 색수상행식. 이것이 우리 의식의 세계입니다. 중생은 보이는 색이, 내 재산이, 나의 명예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 다음에 사람에게 에너지가 바로 ‘수’ 즉 감정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감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감정을 무시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상황은 빨리 본인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상사가 감정이 상했으면 본인이 옳은 말했어도 사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 하나로 인생을 살지만 원허교우같은 사람은 생각이 발달한 사람입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걸로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건 자기만의 생각입니다. 그건 그저 중요한 것 하나를 언급한 것뿐입니다. 생각. 이것이 또 중요하죠. 어떤 사람은 실천이 최고라고 하죠. 그래서 봉사만 하고 다닙니다. 생각하는 나가 나다, 감정이 나다 혹은 몸이 나고 명예가 나라고 생각하며 중생들은 삽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하셨냐하면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조견오온개공이라. 이것만 하면 일체의 고액을 다 넘어 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을 조견 즉 안에서 비추는 것입니다. “조”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비추어 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즐겁게 해주는 색 감정 수, 생각 상, 실천 행 이걸 자기라고 하죠. 그런데 행동과 가장 가까운 것이 마음세계입니다. 가장 가꾸운 게 보시예요. 보시를 해야 가장 빨리 깨치는 겁니다. 색이 강한 사람은 보시하는 사람을 보고 웃어버립니다. 그래서 감정에 대해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되요. 그래서 감성코칭 화두가 등장하죠. 아까 말씀하신 교무님 께서도 이야기 할 때는 감정을 표현하라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기분이 상하면 끝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감정은 기분입니다. 아랫사람 윗사람에게는 일을 잘하라는 것이지만 또 하나는 기분상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석원교우 정말감사합니다~!^0^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석원교우!!
다시 읽어도 감동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ㅎ 석원교우님 짱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첫 타이핑 축하(?)드려요~
석원 교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