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현대 사회의 사역자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정의하며, 자기가 입은 상처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핍박과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상처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치유된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통전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능력도 주시지만, 슬픔과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빛으로도 일하시지만, 슬픔과 어두움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1~10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7절을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바울을 몹시 괴롭혔고, 위협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 3번이나 간구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였습니다. 바울은 약함에서 온전하여짐을, 즉 여전히 약하지만 그 가운데서 온전하여졌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상처 입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18장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을 혼자서 붙어서 승리했던, 그래서 450명을 칼로 쳐 죽인 영웅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런 그가 4절을 보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런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환경의 어려움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말씀합니다. 형편을 보았다는 것은 환경을 본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환경입니까? 1절을 보면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으려고 사신을 보내 “널 죽이겠다”라고 협박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이 아닌 내 주변의 환경으로 옮겨질 때 우리는 우울할 수 있습니다. 힘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어리석은 기도까지 합니다. 생명을 주신 분에게 생명을 가져달라고 기도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의 어려움입니다.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가고, 거기서 또 광야까지 들어가는 데는 약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입니다. 그 길을 혼자서 뛰어갔습니다.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5절에 보니까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누워 잡니다.
사람에게는 적당한 쉼이 필요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을 끌고 다니는 가축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풀밭에서 쉬게 해야 한다. 바다 역시 밀물 때 한 번 썰물 때 한 번 쉰다. 겨울에는 땅도 몇 달 동안 안식한다” 그런데 몸만 쉬면 안 됩니다. 마음도 쉬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에 쉬는 균형 잡힌 쉼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감정의 어려움입니다. 엘리야는 환경과 육체가 어렵다 보니 실제보다 더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한탄합니다. 혼자만 남았다고 하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엘리야를 도울 만한 7천 명의 귀한 용사와 자신을 이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후계자들을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환경과 육신과 감정의 문제 때문에 큰 고통을 안고 있는 엘리야를 어떻게 만나주시고 치유하십니까? 11~12절을 보면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엘리야 선지자자 고무되었는지 모릅니다. 비록 자신만 남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런 큰 것을 주시면, 자신이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찾아서 호렙산에 와 있습니다. 또한, 불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바람, 지진, 불에 집중했습니다.
바람, 지진, 불은 고대 근동에서 신이 나타날 때의 현상, 즉 신현 현상입니다. 아마도 엘리야 선지자는 이런 현상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을 때 엄청나게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단지 세미한 소리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a low whispr”(낮은 속삭임, ESV), “a gentle whisper”(온유한 속삭임, NIV)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이곳까지 도망해 온 엘리야 선지자를 책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자기만이 남았고, 모세에게 주었던 그 능력을 주심으로, 자기가 해낼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에 똘똘 뭉쳤던 그에게 “세미한 소리”로 격려와 위로를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어떤 기적, 이적, 능력만을 좇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예비하신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5:25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듣는다”라는 말은 “믿는다”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반드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상처가 치유되는 줄 믿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치유 받은 엘리야로 하여금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사역을 맡기신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치유 받은 사람이 되어서, 가정을, 교회를,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놀라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