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국학자 안확(安廓) 선생이 쓰신 한국사 개설서인 『조선문명사』를 읽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민세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 남창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 등과 함께 자산 안확의 조선문명사는 20세기 초 국학자들의 대표적인 저서로 손꼽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찍부터 쉽게 풀이된 책이 나온 조선상고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저서들은 그저 이름만 거론될 뿐, 실제로 읽은 이들은 많지 않다. 30년 전 대학도서관에서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를 처음 접했을 때였다. 위당이 어떤 주장을 펼친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과, 그의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어떤 의무감 때문에 독서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어려운 한자들과 외국어 등이 난무한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결국 완독을 하지 못하고,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들의 책은 대개 20세기 초반의 국한문혼용체로, 한문 원전만큼이나 읽기가 어렵다.
안학은 한글 전용론을 펼친 주시경과 심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국한문혼용을 주장했다. 지금 우리들은 국어 전용론의 한계로 국한문혼용체의 그의 글을 읽기를 어려워한다. 한글 전용론을 펼치는 우리나라라면, 마땅히 국한문혼용체로 쓴 20세기 고전들을 쉽게 한글로만 바꾸어놓은 노력을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학문의 단절없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고전들은 읽기 쉬운 현대어로 제대로 옮겨지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수년 전부터 우리국학총서를 발행해, 국학자들의 책을 현대어로 바꾸고 역주까지 달은 책들을 출판해오고 있다.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권덕규의 『조선유기략』,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상, 하』,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 그리고 이번에 송강호씨의 역주로 『조선문명사』가 새롭게 출간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된 후, 단재와 위당 등의 학문이 단절되고,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식민사학자들과 그의 제자들이 사학계를 장악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 국학자들의 학문은 배척된 반면, 서구식(일본식 포함) 교육을 받은 학자들의 연구 방법 또는 업적만을 제대로 된 것이라고 인정되면서, 우리나라 학문은 사실상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해 버렸다. 그 때문인지 한국사학계에서도 『사고전서』를 소화해 주제별로 분류해 계통을 세운 한치윤의 『해동역사』 조차 제대로 인용하는 학자들이 거의 없다. 국한문혼용체에 20세기 초 고전적인 어법으로 사용된 국학자들의 책을 읽는 이들도 거의 없다. 단재의 학문조차 배척당하는 마당에 위당이나 민세, 자산의 업적들 되돌아보는 이는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국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가장 좋은 국학 진흥 방법은 먼저 국학의 기틀이 되는 선배 국학자들의 연구 성과들부터 현대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후학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역사연구재단의 사업 방침은 요란하게 국학을 진흥시키겠다고 떠드는 단체들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글쓴이도 30년 전 읽지 못했던 『조선사연구』를 완독할 수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안확의 『조선문명사』는 안확이 본래 계획했던 조선문명사 8권 가운데 한권인 조선정치사에 해당된다. 나머지 7권 가운데 조선문학사는 간행되었지만, 나머지 6권은 출간되지 못했다. 1886년에 태어난 안확은 1923년 삼일운동을 경험한 후 저술했다. 안확이 이 책을 출간할 당시,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명사가 출간되자, 동아일보는 출간 축하회가 열린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1920년대 저명했던 그는 오랫동안 잊혀왔다. 그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연구업적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감탄스러웠던 점은 그가 조선의 역사를 서양사와 비교하면서, 우리 역사가 결코 서양에 비해 후진적이지 않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양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정치사의 양상을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 근대 독일이나 영국 등과 비교하면서 우리 정치사의 장점을 드러냈다. 그는 사회진화론의 관점의 영향을 받아 우리 역사를 진화의 관점에서 발전적으로 보았고, 특히 지자체의 발달을 크게 강조했다. 그는 다수 인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우리 역사를 발전시켰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당시 식민통치하의 지식인들이 조선사를 비판적으로 본 것과 달리, 그는 조선을 민족사에서 가장 문명이 발전한 시기로 보았다.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기도 했던 독립운동가인 그의 글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들어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스스로 조선문명사를 쓰기 위해 8,500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정치사 분야에 해당되는 이 책에서도 그의 폭넓은 독서량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신라의 화폐에 금전, 연전, 철 3종이 있고, 그 형태는 모두 문양이 없다는 표현은 그가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보았거나, 1149년 송나라 홍준이 펴낸 『전통(錢通)』을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다. 물론 그가 6두품인 최치원을 평민이라고 본 것이나, 고려 말에 남반이 권력을 독점했다고 본 것 등 현재 학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도 펼친 점도 많다. 몇몇 사소한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우리나라 정치사를 긍정적으로 정리한 거의 최초의 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결코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안확의 조선문명사가 현대어로 옮겨져 출간된 것은 우리나라 국학 연구에 있어서 소중한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업적으로 볼 때 이런 책들은 결코 많이 팔릴 수는 없는 책이다. 이런 책들을 묵묵히 남들이 알아주건 그렇지 않건 간에 뚝심을 갖고 국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역사연구재단의 노력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동북아연구재단 등이 해야 할 일을 민간 재단에서 말없이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아름답다. 묵묵히 일하는 이분들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