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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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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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 동관의 뒷모습 |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